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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날다 Feb 29. 2016

짧아서 안타깝고 피지 못해 슬픈,
靑春

2016년 봄을 아프게 깨우는 영화 <동주>

 엔딩 크레딧과 함께 다시 시작되는 영화가 있다. 영화는 끝났지만 객석에 앉았던 관객이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객관의 갑옷을 벗고  무장해제당한 관객은 북받치는 감정 때문에 울기도 하고 해답 없는 삶의 미로에 갇혀 오랜 침묵에 빠지기도 한다. 이처럼 영화 그 이후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나는 믿고 있다. <동주>가 바로 그런 영화다. 


색을 지우고 소리를 버리고...동주스러운 모습으로     


 영화 <동주>는 시인 윤동주의 스물아홉 해 청춘을 펼친다. 짧아서 안타깝고 피지 못해 슬픈 청춘. 그러나 사실 그의 삶은 우리 모두가 아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를 대중이 보는 영화로 재구성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사실과 다른 영화적 재구성’이라는 출구가 있다 해도 극적인 허구를 더할 수도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윤동주이기에. 

 더욱이 윤동주는 우리 영화가 한 번도 제대로 다뤄본 적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 작심은 크고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 작심하고 시작하는 일에는 힘이 들어가게 마련인 법. 과하기 십상이고 끓어 넘치기 일쑤다. 그래서 작심은 애초의 본뜻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동주>는 달랐다. 색을 지우고 소리를 버리고 흔한 클로즈업도 자제한다. 얼마나 빛나게 채색하고 싶었을까? 그 아름다운 시어를 얼마나 더 가슴 먹먹하게 들려주고 싶었을까? 흔들리는 눈빛 하나, 머뭇거리는 입술 하나 얼마나 더 가깝게 느끼게 하고 싶었을까? 감독은 그런 욕망을 접었다. 그럼으로써 <동주>는 애초의 작심을 온전히 실현한다. 가장 동주스러운 모습으로……     


 

 영화 <동주>가 동주스러울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흑백에 있다. 

 무채색의 암울함은 시대상을 은유하고, 화려하지 않은 순수함은 시인 윤동주의 정서를 반영한 듯 슬픔을 더한다. 또한 흔들리듯, 아련한 듯 불분명한 채도는 관객이 영화를 더 깊게 더 오래, 더 유심히 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더불어 이런 화면은 목소리로 전해오는 시어(詩語)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문어체 대사를 더 열심히 듣게 만드는 장치가 되었다.  우리말, 우리 글에 이토록 집중하게 만든 텍스트가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하다 느꼈을 관객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독한 한 줄 논평과 직관적 재미로 무장한 이모티콘에 중독된 이 시대 사람들에게 동주의 순수한 시어와 그를 표현하기 위해 구성된 정지화면 같은 장면이 심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주와 몽규너로 인해 나를 보는 자화상 같은 존재     


 영화 <동주>는 새로운 인물 송몽규를 소개한다 (영화 <암살>이 약산 김원봉 선생과 우리를 만나게 한 것과 같이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영화는 제목 <동주>가 어색할 정도로 송몽규를 매력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다. 심지어 일본 경찰을 향한 몽규의 마지막 절규는 감독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한, 가장 극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이처럼 언제나 열정적인 행동가였던 몽규, 그에 반해 시종일관 망설이며 고뇌했던 동주를 영화는  계속대비하며 보여준다. 극적 구성, 서로 다른 인물이 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긴장감, 이를 통한 영화적 몰입을 의도했기 때문이었을까?    

  


 감독의 진의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게 동주와 몽규, 둘의 모습은 둘이 아닌 하나로 보였다. 나와 너로 구분 지을 수 있는 대립적 타자가 아닌, 너로 인해 나를 보는 거울 같은 존재, 자화상을 표현하기 위한 의도된 형식으로 읽혔다. 바로 그래서 몽규로 표현되는 동주, 동주로 표현되는 몽규는 시대를 넘어 꿈꾸고 좌절하고 아파했던 모든 청춘들의 상징이 되고 그들을 되살리는 종소리가 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터져 나온 나의 뒤늦은 북받침은 생체실험으로 죽어간 동주의 마지막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시절 동주처럼, 꿈을 빼앗기고 피지도 못한 채 쓰러져간 모든 청춘들에 대해, 그 아픈 기억을 잊고 외면해 버린 스스로에 대한 뼈아픈 각성이었다.      


 청춘! 인기 TV 프로그램은 ‘꽃보다 아름답다’하고 철 지난 유행가는 ‘지고 또 피는 꽃’이라 노래한다. 피지 못한 꽃들의 이야기, 그래서 더 안타깝게 푸른 청춘의 이야기, <동주>가 2016년 봄을 아프게 깨운다.   

        

      

※이 글 속에서, 괄호 속에 묶은 <동주>는 영화를, 그냥 ‘동주’는 윤동주를 의미한다.           


<생각나는 글>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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