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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날다 Mar 06. 2016

넋들의 돌아옴(鬼鄕)에  술 한 잔 올리고 싶다.

영화 속 이야기가 영화 밖 현실이 되는 영화 <귀향>

 귀향!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뜻(歸鄕)이 아니라, 鬼鄕다. 넋들이 집으로 돌아온다는 뜻일 게다. 그래서 영문 제목도 Spirits’ Homecomming.

이처럼 영화 <귀향(鬼鄕)>은 제목이 그 내용과 형식을 암시하고 있다. 떠난 이들이 돌아오는 것(鄕)이 내용이고 다름 아닌 ‘죽은 이(鬼)’를 불러들이기 위해 주술적, 판타지적 장치(형식)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 영화를 보러 가기 전 두려움이 있었다. ‘소녀’라는 순수한 이미지, ‘역사’라는 대의명분을 파는 또 다른 마케팅이 아닐까 하는 염려가 첫째였고 그 지옥 같은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성적 묘사가 등장할 것이고 관객들의 몰입과 동일시를 위해서는 더 직접적이고 더 강렬한 이미지-<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잔인했던 오프닝 씬이 자꾸 연상되었다-를 쓸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하는 걱정이 두 번째였다. 그러다 어차피 상업 상영관에 걸리는 것이고 더 많은 이들이 볼 수만 있다면 그 정도 양보는 필요하지 않겠나……하는 반쯤은 타협하는 마음으로 극장에 들어섰다.

 하지만 기우였다. 어쩌면 범람하는 센 이미지들에 익숙해진 탓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성, 폭력과 관련된 묘사는 우려했던 것보다 수위가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귀향>은 관객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눈을 게 했다. 왜일까?     

 다 보여주지 않아도 관객은 알 수 있다. 어린 소녀들이 겪었던 비극은 그 어떤 강력한 이미지로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또한 각자의 이름을 지운 우리, 다시 말해 불 꺼진 극장에 앉은 관객은 숱한 세월 동안 소녀들의 비극을 외면해 왔음을. “미친 거 아니면 누가 신고하러 오겠어!”라고 말했던 영화 속 동사무소 직원을 보면서 분노보다 부끄러운 아픔을 느꼈을 이가 더 많았으리라. 더욱이 같은 류의 후안무치한 일이 ‘미래’‘공존’이라는 미사여구와 함께 지금, 이 시각에도 버젓이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다 보여주지 않아도, 더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마음이 불편하고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떤 이는 재연의 실재감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또 다른 이는 제작비가 부족해서인지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평가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귀향>은 재현의 실재감 혹은 완성도의 높고 낮음을 두고 논쟁할 영화가 아니다. 75,270명 후원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과 나눔의 집 할머님들이 직접 그린 고통 가득한 그림을 보여주는 엔딩 크레딧만으로도 영화는 완성될 수 있었다.      

 영화는 남의 땅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소녀들의 넋이라도 돌아오게 하겠다는 소망을 담았다. 그래서 대단원은 넋을 불러 달래는 해원굿이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돌아 넋은 소녀들뿐만이 아니다. 일본군 병사들의 모습이 군데군데 보인다. 이 순간 영화 속 이야기는 영화 밖 현실과 연결되고 과거의 트라우마는 현실의 가능성이 되어 소녀뿐 아니라 관객까지 몸서리치게 만든다.

     

 <귀향>을 만든 조정래 감독은 14년 전 ‘나눔의 집’에서 강일출 할머님의 그림 ‘태워지는 처녀들’을 보고 영화를 구상했다고 한다. 두려움에 떨며 어제까지 함께했던 친구들이 불타는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봐야 했을 어린 소녀의 이야기,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감독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고 한다(씨네 21 인터뷰).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 그 주체인 남성성에 대해 남자로서 죄의식을 느끼게 될 정도였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감독은 끝내 영화를 완성했다. 무려 14년 만에. 천형 같은 피할 수 없는 책임감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다. 그리고 감독은 오랜 시간, 고통을 견디며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영화 속 대사로 밝히고 있다.

 사진 찍기를 싫어했던 위안부 할머님 영옥이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는 어린 은경의 말을 듣고 하는 대사다. “남는다고? 그래 찍자!”

 결기 가득한 말이다. “그래 찍자!” 20만 명의 소녀들이 끌려갔고 238명만이 돌아왔으며 이제 46명만이 남게 된 어린 소녀들, 그들의 이야기를 더 외면하고 지워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이유 다 필요 없고 이제라도 남기자고 호소하는 것이다.      

 영화 <귀향>은 아프게 의미심장한 에필로그를 선물한다. 위안부로 끌려갔던 정민이 예전 그대로인 고향 집 마당에 들어선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부모님과의 재회, 정민의 부모는 덤덤하게 “인제 왔나! 밥 묵자!”라며 딸에게 밥을 먹인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지옥 같았던 고통의 시간이 다 꿈이었으면 하는 판타지를 바랐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안다. 그 모든 일이 절대 되돌릴 수 없는 역사라는 사실을,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일을 낱낱이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이처럼 분명함에도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넋을 불러 한 끼 따뜻한 밥을 올리는 제사라도 제대로 한 번 모신 적이 있는가? 마치 넋들이 차려진 제삿밥을 먹는 듯한 마지막 장면이 자조를 대신해 주는 듯하여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넋들의 돌아옴(鬼鄕)에 술 한 잔 올리고 싶다. 부디 편히 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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