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에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전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물음이며 또한 지금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생을 관통하는 물음일 것이다. 가장 먼저 다루어져야 할 것은 이 물음을 던지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것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 논의된 실존주의 사상들이 우리에게 던졌던 이상향은 아무리 발악을 해도 대다수가 휴머니즘에 그치며 고차원적 욕구의 실현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사상들은 데카르트적 회의 앞에서 코기토치오적 이상향이 되지 못한 채 인간에게 무한한 권능을 부여하려 드는 신학적 최후를 맞는다. 무한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가진 절대자나 그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인간의 내재된 초월적 기능을 믿는 신학적 이상주의는 진리에 접근하기 위한 기능으로써 인간의 의식에서 유일하게 쓸모 있다고 믿어지는 코기토를, 회의하는 자아를 절대적 존재의 손아귀에 맡겨 분쇄시켜 버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순수하게 철학적인, 실증적 실존주의를 논할 수 있을까?
인간 의식의 가장 원초적인 의지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이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욕망에 기반하는 사고를 하는 것은 부정하기 힘든 명료한 사실이며 이것은 인간이 충동적이라고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사려 깊은 인간의 충분한 이성적 고찰에서도 그 순수한 창발적 동기가 욕망인 것을 보면 이것이 인간 행동의 가장 깊은 곳의 원인율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게 할 정도로 욕망에 지배당하는듯한 의지의 객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코기토치오적 이상향은 욕망으로부터 정의될 수 있다. 욕망이 순수한 의지의 자체소여로서 존재한다면 우리는 생의 목적을 이것으로 가늠해 볼 수는 있다. 욕망이란 순수하게 우리에게 내재된 현존하는 의지이다. 이것은 막연하게 휴머니즘에 호소하고 세계의 권능에 호소하는 이상향이 아닌 욕망이라는 의지의 현존 그 자체를 전제로 여긴다. 욕망은 신학과 같은 맥락의 수동적 이상향의 소여로서 여겨질 수 있지만 필자에게는 오히려 인간이 내면의 욕구를 배제하고 능동적으로 이상향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막연한 낙관주의로 느껴진다. 능동적 이상향과 욕망은 상호침투적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오히려 상호보완적이다. 심리학자 메슬로우는 욕망을 분류하고 서열화하였다. 욕망의 서열은 사슬처럼 이전의 것이 있고 그것이 충족되었을 때 그다음의 욕망이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이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이상향을 개선해 나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메슬로우의 욕구 단계 이론이나 알더퍼의 ERG이론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욕망의 우열이며 상위차원의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저차원의 욕망으로 퇴행을 설명했다는 점만 다르다. 필자는 저차원 욕망의 충족만이 고차원 욕망의 필요조건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성을 통해 실존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주장했던 스토아학파와 유사한 맥락으로 필자는 이성을 통해 저차원 욕망의 극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극복만이 인간의 본질을 더욱 고귀하게 만들어주며 물질적, 사회적 성취를 이루는 것에 매진하는 것은 인간을 고귀하게 만들어 주지 못하며 이는 오히려 저차원의 욕망에 갇혀 쳇바퀴를 돌리느라 생에 주어진 시간을 소진하고 있는 기구한 인간으로 보이게 만들 뿐이다. 따라서 끊임없는 극복을 통해 실존의 고통을 초월하는 것 만이 인간실존의 코기토치오적 이상향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상향의 추구로 우리가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는 세계의 본질과 우리와의 관계라던가 인간 의식에 내재된 초월적 기능들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이 가늠하는 세계의 범위를 아득히 확장시켰다. 고대인류에게는 절대적 권능과 세계의 미스터리를 함축하고 있던 공간이 하늘이었다면 현대에 와서는 확장된 공간의 9차원 우주뿐만 아니라 세계를 시뮬레이션하는 세계밖의 세계 역시 거론되고 있다. 이렇게 끊임없이 확장되는 세계관은 인간의 실존을 너무나도 하찮게 만든다. 막연히 이성과 수행을 통해 세계의 본질과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는 낙관주의는 당연히 허락되지 않는다. 인간의 존재가 세계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게 되어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팩맨이라는 게임은 2차원 그래픽 상에서 단순히 유령을 피해 쿠키를 먹는 것이 목표인 게임이다. 이 게임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 의해 창조된 세계이며 매우 단순하게 구현되고 있다. 이 팩맨이라는 게임 속의 쿠키 하나의 역할은 단순히 그 자리에 위치하며 팩맨에게 먹히길 기다리는 것이다. 팩맨을 창조한 인류는 AdS/CFT, 블랙홀, 소립자등을 연구하고 철학에서는 자유의지 따위를 증명하려 고군분투한다. 팩맨의 쿠키와 그것을 창조한 인류의 의지 간에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사상과 의지의 차이가 있다. 만약 오리지널 제1 우주가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 오리지널 우주에서 파생되어 나온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가 팩맨의 쿠키 한 점 보다 더 큰 의미와 역할을 가진다고 기대하는 것이 막연한 낙관주의이다. 심지어 팩맨과 우리 세상은 1차원의 차이만 가지지만 오리지널 우주가 5차원만 넘어도 2차원 이상의 차이로 인해 우리의 세상은 팩맨의 쿠키 한 점보다 더 단순하고 덧없는 존재가 될 뿐이다. 이러한 압도 속에서 인간의 윤리학과 신학이라던가 삼라만상을 깨우쳤다고 지껄이는 초월자의 존재조차 얼마나 덧없고 세상의 본질에 비해 미약한지를 통렬하게 체감할 수 있다. 어쨌거나 이러한 압도가 인간실존에 대한 막연한 낙관주의를 분쇄시킴으로써 실존에 대한 좀 더 객관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다.
백번 양보해서 우리가 이상향을 내재된 욕망으로부터 설정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의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생각하는 것이 간단해지지는 않는다. 여전히 우리 의식이 어떤 초월적 소여의 기능들을 내재하고 있는가는 중요한 물음이다. 엠마누엘 칸트는 이것에 대해 우리는 선험적 종합 판단을 통해 지식의 확장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칸트의 철학을 이용하여 간단하게 인간 의식의 초월적 기능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물론 필자는 칸트가 주장한 순수직관의 작동 원리나 몇몇 명제판단에 대해 선험적 종합 판단이라고 주장한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으니 먼저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겠다.
1. 선험적 종합 판단을 위한 순수직관이 시간과 공간의 연장적 규모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주장
* 선험적 종합 판단이란 창발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창발을 일으키는 국소적인 원칙들은 주관에 의해 제정되기 때문에 순수하게 선험적이며 순수하게 선험적인 원칙들에서 대역적으로 발생한 특성이 다시 선험적 원칙에 의해 검증되므로 이는 선험적인 종합 판단이다.
2. 자연과학의 기본 명제들이 선험적 종합 판단이라는 주장
* 자연과학의 명제들은 우리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일 수는 없는바, 선험적 준칙들이 종합적 경험에 의해 검증되므로 순수하게 선험적 종합 판단이라고 할 수 없다.
+ 기하명제는 ‘우리 경험 가능성의 조건은 선험론적 형식이다’와 같은 주장에 의해 부분적으로는 선험적 종합 판단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엄밀하게는 선험적 종합 판단이라고 하기 힘들다.
사실 필자의 주장대로라면 수학명제를 제외하면 선험적 종합 판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필자는 수학을 이루는 논리구조만이 유일하게 초월적인 인간 의식의 내재적 소여의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인간이 절대적으로 초월적이라 의지할만한 것은 내재적으로 부여받은 의식 자체를 구성하는 준칙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 의식의 과학적 환원을 암시한다. 인간 의식의 모든 기능을 초월적 준칙들로 환원한다면 이는 앞서 전제해 온 모든 논의들을 물거품으로 만든다. 이는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이며 모든 실존주의 철학 이전에 먼저 논의되어야 했던 문제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체액과 근육, 뼈와 신경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신체를 자연법칙에 따라 상호 작용하는 시스템으로만 보았다. 의식을 제외한 인간의 신체가 초월적인 권능을 부여받은 기능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불가능에 가까워져 갔으며 우리의 신체가 인간 의지의 착실한 종으로써 의지의 객관화를 매개하는 생물학적 도구로 전락해 버린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의식, 그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의지의 형태로 존재하는, 의지의 객관화 그 이전 순수한 인간의 의지를 모든 신체 현상의 원인율로 보았다. 이 생각은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인간이 의지의 발생 주체임을 천명하는, 인간의 자아가 물질로 환원되지 않도록 하는 권능을 부여하는 사상이었다.
그러나 정의조차 모호한 자유의지는 그 자연발생적 특성으로 인하여 물리학에서의 패러독스를 불러일으킨다. 인간 의식에 막연한 권능을 부여하는 것을 배제하고 자유의지를 정의하고자 하면 그것이 과연 자유의지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냐가 의심받는다. 따라서 자유의지의 권능적 지위는 과학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으며 그 지위가 매우 위태롭다. 자유의지를 제외한 인간 의식의 기능들 역시 벼랑 끝에 매달려 끊임없이 정신분석학에서 신경과학, 뇌과학으로부터 과학적 환원의 낭떠러지로 빨려 들어간다. 무엇보다도 최근 인공지능의 발달은 현재 인간 의식의 본령을 샅샅이 환원하여 단순한 논리 구조로의 분해 후 재정렬하는 것을 목전에 두고 있다. 만약 인간이 구현한 인공적 의식이 자유의지를 제외한 인간 의식의 내재적 기능들을 재현할 수 있다면, 우리 스스로조차 더 이상 무엇으로 인간성을, 그리고 천부적 존귀함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