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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햄스터 Feb 11. 2023

요즘 드는 생각

철학 에세이

 브런치 활동을 시작하면서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이 있는데, 집필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많은 정성과 시간을 필요로 하므로 이것을 일상과 병행하는 것은 절대 녹록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여기에 필자의 사색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제공된 것에 감사하며, 이러한 사색이 오직 한 명에게라도 읽히고 이해된다면 필자가 시간을 내어 완성시킨 이 공간은 그 기능을 충분히 다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철학적 사색이란 텍스트로 정제화 되지 않고는 사상의 주인의 의식 속에서 조차 사분오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필자의 이러한 작업은 사상을 고형화 하기 위해서라면 아무에게 읽히지조차 않더라도 전혀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사상의 고형화라는 맥락에서 고대부터 이어져 온 누계적인 사상들을 그 본류에 가까운 형태로 전달하기 위하여 사상가들은 텍스트의 형태를 취하였고, 이러한 형태로 고형화 된 형이상학은 성공적으로 계승되었기만 할 뿐 아니라 당대 인류가 언제든 간단히 꺼내어 취할 수 있는 인류 지성의 과실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러한 과실은 부분 비판적으로 섭취되어 여러 파생적 사상들을 낳고 이것들이 또 후대에 의해 섭취되는 순환을 통해 인류 지성의 누적이라는 거대한 고리를 완성한다.


고형화 된 사상은 언제나 고형물들이 침전되기 위한 바닥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사상의 고형화가 건축술과 같아서 사상이 그 자체로 강건하려면 언제나 모든 파생적 이론들을 지탱해 줄 제1 원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코기토를 철학의 제1원리로 선언했듯이 각자의 형이상학이 무난하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탱하는 기반이 최대한의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인류 문명의 발생 이래로 지금까지 절대 보편적인 명제가 증명된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절대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어떤 철학적 사상이건 간에 그것이 절대적으로 견고한 기반에 쌓아 올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견고하게 건축된 대가들의 형이상학조차 그것을 산산이 조각내고 굴복시키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 꽤나 부정적인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해체와 상대주의등 각종 기법을 통해 모더니즘의 안티테제를 표방하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 중 몇몇 스캐빈저 같이 졸렬한 (질들뢰즈라고 한 적 없다) 부류들은 그 방법과 명분에 분별이 없다. 필자는 모더니즘 철학의 신봉자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 선동적이고 사이비적인 철학자들이 그들의 명성을 쌓아 올린 방법들이 너무나 소모적이고 사상의 건강한 선순환에조차 악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지껄이면서도 모더니즘의 철학의 제1 원리를 공유하며 그것을 파괴할 때는 다시 철학의 제1 원리를 흔드는 기상천외하고 역겨운 방법으로 대가들의 사상을 선동적으로 굴복시키며 명성을 쌓은 질들뢰즈와 (이제 질들뢰즈라고 했다) 같은 사이비 철학자들의 사상을 살펴보면 모더니즘 사상에 팔다리를 몇 개씩 더 추가하고 머리통을 하나 더 달아놓고는 모더니즘을 초월한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불러왔다는 듯이 의기양양해하는 작태를 보여준다. 많은 수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명성을 쌓았고 이제 그 결과로써 현대철학은 절멸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조차 기괴하다. 몇몇 괴랄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아무 소리나 지껄이다가 합리성의 결여라는 비판 앞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이비 철학자들에 의해 거의 멸종해 버린 후기 구조주의의 합리성에 호소한다.


필자가 거칠게 비판하기는 했지만 현대 사상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배제해고 사상을 형성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매우 포괄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에 상대주의는 수많은 모더니즘 철학을 파괴해 온 강력한 공성병기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세계에 대한 월등히 선명한 통찰을 주는 사상이기도 하다. 진리의 상대성에서 주관적 진리는 주관 속에서 항상 참이고 주관적 진리의 확장적 구조에 의해 발견되는 창발적 파생 진리들 역시 우리가 새로 발견한 것이 아니라 주관적 진리에 내재되어 있던 것이다. 그러나 주관적 진리는 주관 속에서는 절대 진리이지만 주관적 준칙을 제정하는 이성의 껍데기 밖을 나오는 순간 권능을 잃고 추락한다. 그 말은 주관적 진리의 권위는 그것의 즉자태가 경험 속에서 항상 증명되고 있지 않으면 산산이 부서지며 주관의 진리는 주관의 본령 즉, 그 이성의 껍데기 속에서는 절대적 권위를 유지할 수 있지만 그것을 벗어나 확장적 방향으로는 폭풍 앞의 등불과도 같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형태의 진리적 준칙이건 인간의 이성에서 주관진리의 형태로 환원하여 인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절대 진리라는 것은 인지가능한 주관 진리의 기본 준칙들과 그것에서 창발 된 파생적 법칙들이 이성 껍데기 밖의 존재들과 완전하고 충만하며 즉자적인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주관 진리를 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형의 절대 진리가 주어졌다 하더라도 이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능력조차 없다. 그러므로 유사 이래 그 누구조차 범접할 수 없었던 이러한 절대 진리를 전달한다고 떠드는 존재들은 최소한 두 개 이상의 거짓을 전제로 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주관적 진리가 절대 진리가 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성의 껍데기 속으로 숨을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우리의 주관적 법칙으로만 구성된 세계를 창조하여 스스로 세계의 범위를 창조된 세계 속으로 축소시켜 버리는 것이다. 글쎄 이것이 인류의 기투라면 시뮬레이션 우주 이론에서 왜 그다지도 많은 우주들이 생성될 수 있는지, 우리는 왜 이리도 메타버스에 열광하는지가 어렴풋이 설명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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