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보이는 것만 믿는다고 해도 그 믿음은 몇 분의 일에 불과할 듯
한파 예보로 더욱 몸을 움츠렸다고 표현해도 될 만큼
오늘은 추위를 실제보다 더 춥게 인지했다.
어렸을 때 오늘보다 더 기온이 내려가서
한강이 꽁꽁 얼어붙었을 때
한강에서 스케이트를 타곤 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오늘처럼 춥다는 이유로 방콕 하는 이유를
나이 탓으로, 문명 탓으로 돌린다.
어느 순간, 추위나 더위로부터 취약해졌음을 느낀다.
스케이트를 신었던 기억도 가물가물,
이런저런 핑계로 놀이문화로부터 한발 두발
멀어져서 자극이 없는 밋밋한 시간이 대부분이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풍경화
이런 책 저런 책 뒤적이다가
문소영 기자의 <혼종의 나라>를 펼쳤다.
읽다가 SF의 창시자이자
아직까지도 SF 장르에서 최고의 작가로 손에 꼽히는,
낙관적 과학 정신의 대변자 허버트 조지 웰스의
눈먼 자들의 나라의 일부분이 있어서
옮겨본다.
눈먼 남자가 말했다.
"왜 내가 불렀을 때 안 왔어요?
어린애처럼 손 잡아끌어줘야 해요?
걸을 때 길 밟히는 소리로 잘 따라 걷는 거 못해요?"
누네스는 웃었다.
"난 길을 봅니다."
잠시 가만있다가 눈먼 남자가 말했다.
"봅니다라는 단어는 없어요. 바보 같은 소리 그만두고 내 발자국 소리 따라와요."
.......
그들은 계곡을 둘러싼 절벽 바위가 세상의 끝이고
그 위로 동굴 천장 같은 우주의 지붕이 솟아있다고 믿었다.
누네스가 그들의 생각과 달리
이 세상은 끝도 없고 지붕도 없다고 고집스럽게 말하자
그들은 그 생각이 요사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하늘과 구름과 별을 최대한 멋지게 묘사하려고 애썼지만
사람들은 지붕이 없다면 끔찍한 허공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도리스 살세도
혼종의 나라에 삽입된 텍스트는 이 부분만 있지만
단편소설인 <눈먼 자들의 나라>
뒷이야기는 조난으로 당도했던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
누네스는 탈출한다.
그 나라에 산사태가 일어날 것이라는 말을 해도
아무도 누네스의 말을 듣지 않아서
누네스는 자신이 사랑하게 된 여자와 둘이서 탈출했고
남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믿음이 산을 옮긴다는 말도 있듯이
사람은 믿음으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믿음과 내 믿음의 차이가 크면
서로를 적대시하거나 멸시하거나
비하하거나 하는 현상은 과연 옳은 길일까?
옳고 그르다로 나눌 수 없는 문제겠지만
서로 다른 환경과 다른 상황에서,
그리고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걸
인정하면서도
가끔 납득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