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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겠지만,

여전히 나는 나의 어린 친구들을 사랑한다.

by 코코넛


어제 하루, 일정을 모두 미루고

아주 오래된 인연이면서 공백기도 길었던 친구와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다니면서 먹고 마시고 이야기했다.

영국에서 유학할 때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영역이 넓었으므로

자주, 다양한 이유로 만났지만,

귀국한 이후로는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면서도

성별이 다르고 연배가 다른 이유로 만남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건너 건너 서로의 소식은 듣고 살았던

공백 기간의 삶,


그 공백을 깨고 어린 친구가 연락했으므로 반가웠다.

서로 몰랐던 사연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헤어질 시간이 되었고, 그 몇 시간의 대화에서

몇 년이 녹아들었다는 일이 새삼 신비로웠다.

어찌하다 보니 나는 인연을 맺은 친구 중에 유독 연배가 어린 친구가 많았고,

선택지가 서로 다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남이 끊긴 친구도 많아졌다.

오늘은 유독 나의 어린 친구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이런저런 생각의 끝에 디테일이 사라진,

실루엣으로 남은 얼굴이 불쑥 떠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탓이다. 그때마다 창문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일기예보가 맞는다면 비가 내려야 했는데, 하늘빛이 무겁게 느껴졌을 뿐 비는 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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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 게르트 호베마 / 물레방앗간




기억이라는 것은 어떤 구원의 행위임을 함축하고 있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것으로부터 구제된 것이다.

잊히는 것은 버림을 받은 것이다.

만약 모든 사건이 그것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순간에 초자연적인 눈에 의해 시간을 벗어나 목격된다면,

기억되는 것과 잊힌 것 사이의 구분은, 즉 기억되는 일은 일종의 상처럼,

그리고 잊히는 사건은 벌과 가까운 것이 된다.

또한 비난을 받는 사건은 잊히는 것에 가까운 심판하는 행위로,

정의의 판결을 언도하는 것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인간이 시간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길고 고통스러운 경험으로부터 끌어낸 것인

그러한 예감은 거의 모든 종교와 문화에서, 그리고 아주 분명하게

그리스도교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존 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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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 게르트 호베마 / 수목이 우거진 풍경



오늘 내가 구제한 인연들은 마치 마인 게르트 호베마의 풍경화처럼

속내를 오롯이 드러내면서 어우러졌던

그 시간 속의 다채로웠던 사건과 감정들로 다가왔다.

다시 이어진 인연의 끈이

서로에게 기쁨과 성장의 시간으로 빼곡하게 채워지길

기대하면서도,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는 기회가 주어졌고,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때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르겠지만,

여전히 나는 나의 어린 친구들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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