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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전 준비로 그동안 소식 전하지 못했습니다

디지털문인화전

by 코코넛
엽서.jpg

오늘은 우선 엽서로 제작한 것과 작업 노트 올릴게요~~^^


작가 노트

전씨 영애

즉흥 바이올린 연주자이면서 작곡가, 시인, 교사 등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창조적인 삶을 사는 스티븐 나흐마노비치는 <놀이>를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이라면서 놀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작업하는 과정이 놀이처럼 즐겁고, 즐거워하는 만큼의 새로움이 나타나는 현상을 경험한 나는 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조하므로 나는 초대전 제목을 <주파수 맞추기 놀이터>로 정했다. 또한 무늬와 공간 갤러리에서 첫선을 보이는 내 작업은 이미지의 기호학적 주파수와 텍스트의 기호학적 주파수를 한 화면에서 맞추었을 때 관객과의 소통이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또한 서로 잘 맞지 않으면 관객이 이미지와 텍스트가 지시하는 의미의 주파수를 주관적으로 맞추는 놀이가 시작할 수 있으므로 전시장을 <기호와 기호가 건네는 주파수 맞추기 놀이터>로 생각했다.

이 작업을 구상한 이후 조선 시대의 문인화를 어떤 방식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을까? 질문했고 제자리 맴돌기처럼 오랜 시간 답을 찾지 못하고 고민했다. 그리고 방향을 잡은 이후부터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에 몰두했다. 특히 이미지가 가진 추상성과 텍스트가 가진 추상성의 차이 중에서 상호보완적인 면에 집중했다. 재밌었다. 드넓은 벌판이 아닌 작은 방안에서 열어놓은 문으로 밖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이미지와 텍스트의 추상성을 좁혀주는 지점을 발견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미지의 공간에서 떠도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선택한 이후에도 이미지를 텍스트보다 큰 비율로 했다가 이미지를 바꾸거나 텍스트를 바꾸는 번복도 반복했었다.


텍스트를 정하고 그 텍스트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사진첩에서 선택한 후 이미지와 텍스트의 비율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의 문인화에서는 시조가 함께라서 텍스트와 이미지가 70대 30 정도로 볼 수 있으나 내 작업에서는 이미지 90% 이상에 텍스트는 10%로 이하로 줄였다. 활자의 비율이 낮다 보니 문인화라는 느낌이 약하게 느껴져서 낙관의 형식을 빌려와 표현했다. 왜냐하면, 낙관의 빨간색이 강렬해서 비율이 적어도 텍스트에 시선이 머무는 이유와 낙관이 아닌 낙관처럼 보이는 텍스트를 9자로 응축한 내 생각이 시조나 하이쿠보다 짧은 시어가 될 수도 있고 화두가 될 수도 있다.

한국화의 낙관을 새롭게 해석한 낙관의 텍스트는 낙관이 아닌 낙관의 차용이다. 이와 비슷한 선례는 벨기에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에서 텍스트와 이미지가 기호학적으로 서로 다른 지점을 지시했으며 이미지와 텍스트의 비율은 50대 50이었다. 또 다른 선례로는 바바라 쿠르거의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나 <너의 몸은 전쟁터다> 등을 들 수 있다. 바바라 쿠르거 역시 이미지와 텍스트의 비율이 정확히 반반이었다. 물론 작품 안에서 텍스트를 이미지로 사용한 작가는 그 외에도 다수 있으므로 텍스트를 이미지로 보이게 하는 방식은 새롭지 않을 수 있으나 내가 시도한 방식은 한국화에서 낙관을 현대화했으므로 완전히 다르다.


그러므로 내 작품은 포토콜라주로 보기 어렵기에 <디지털 문인화>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시각디자이너의 자연스러운 행보일 수 있다. 디지털 이미지의 영역은 사진과 그래픽의 호환이나 AI 이미지까지 넓다. 이러한 시대에서 물감으로 그려야 하고 물성의 강조가 작가의 필수조건이라는 생각은 편견일 것이다. 물성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영향을 준 작가는 리처드 프린스다. 의 <카우보이>, <펭귄 북 시리즈>와 같은 작업 방식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리처드 프린스가 많은 논란을 낳았었지만, 작가들의 편견을 와해시키면서 예술의 영역을 확장했듯이 디지털 문인화도 어쩌면 이미지가 범람하는 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표현행위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무늬와 공간 갤러리에서 선보이는 작품은 모두 일상에서 느낀 성장통과 같은 경험에서 얻는 견해들이다. 시각 소통 전문가로 나를 소개했던 시간 속을 헤집어보면, 간송미술관을 방문했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곳에서 만났던 조선 시대의 작품 앞에서 명명하기 어려운 긴장과 설렘으로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었었다. 내가 지닌 시각적 지각은 반쪽짜리가 아닐까? 자문하면서 익숙한 듯 새롭게 와 닿아서 과거에 인지하지 못했던 강렬한 감동이었다. 아마도 잠재의식에 묻어두었던 미의식과 감성이 풀려난 시간이었던 듯하다. 경험을 통해 확장된 시선과 작업의 방식에 대한 고민은 아주 길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작품을 꺼내 놓는다. 이 놀이터를 제공해주신 임창준 관장님과 초대된 당신이 당신의 시선으로 내가 제공한 이미지와 텍스트로 주파수 맞추는 놀이를 즐길 시간이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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