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남편과 함께 죽음을 계약하던 날

빈소 없는 장례, 그리고 ‘죽음의 산업화’를 거부하며

by 명리하는 영화


“여보, 안 무서워?”


운전대를 잡은 남편이 툭 던졌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무섭긴. 짐 덜어내는 건데. 오히려 시원하지.”


우리는 두 가지 문서를 정리했다.


첫 번째는 오래전부터 꼭 실천하려 했던,

사전연명의료의향서(DNR).

회생 가능성이 없을 때 기계에 의존해 생명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법적 선언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아이들을 위한 사전장례의향서를 준비했다.


사전장례의향서 원본


우리는 3일장, 밤샘 조문, 북적이는 접대와 술자리.

그 모든 형식을 내려놓기로 했다.


대신 빈소 없는 장례, 직장(直葬)을 택했다.

병원 안치실에서 24시간 머문 뒤 입관하고 곧바로 화장장으로 향하는 가장 간소한 이별 방식.


직장은 미리 계약하는 상품이 아니다.

우리가 눈을 감은 뒤, 남은 아이들이 장례식장에 직접 말해야 한다.


“빈소는 차리지 않겠습니다.”

슬픔 속에서 그 한마디를 단호하게 꺼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명분과 면죄부를 남기기로 했다.


혹시라도 부모의 장례를 간소하게 치렀다는 이유로

“우리가 불효한 건 아닐까”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도록.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우리가 미리 정해준 숙제다.


아이들이 물을지도 모른다.

“엄마, 진짜 이렇게 해도 돼요? 남들 보기에 좀 그렇잖아요.”


나는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지영화의 마지막 당부]

1. 무의미한 연명 치료 거부 (DNR 등록 완료)

2. 빈소 없는 장례, 직장으로 진행

3. 부고를 알리지 말 것

가까운 직계 가족에게만 알리고

지인이나 친척들에게는 모든 절차가 끝난 후에

가족끼리 조용히 보낸다고 알리기만 할 것

4. 수의와 관

가장 저렴하고 잘 타는 것으로 할 것

5. 유골은 납골당이 아닌 자연으로 (산골)


누군가는 또 묻는다.

“그래도 영정 사진은 있어야죠. 국화꽃 한 송이라도…”


나는 웃는다.


“장례식장 제단 위의 근엄한 사진 말고,

너희 핸드폰 속에 저장된 엄마의 활짝 웃는 사진을 봐라.

그거면 충분하다.”


그리고 덧붙인다.


“장례비 아낀 돈으로 맛있는 밥 사 먹고 엄마 이야기하며 깔깔 웃어라. 그게 진짜 추모다.”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지금 대한민국의 죽음이 너무 멀리 흘러갔기 때문이다.


1997년, 이른바 ‘보라매병원 사건’은 한국 사회의 임종 문화를 뒤흔들었다.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던 환자를 가족 요청으로 퇴원시켰다가 의사와 보호자가 처벌받은 사건.


그 이후 병원은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해 회생 가능성이 거의 없는 환자도 끝까지 붙들기 시작했다.

가족 역시 ‘살인자’라는 낙인을 두려워해 무의미한 연명 치료에 쉽게 반대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죽음은 집에서 병원으로 옮겨갔다.


이제 가족의 손을 잡고 숨을 거두는 임종은 드물다.

대부분은 중환자실의 기계음 속에서 ‘치료의 연장’이라는 이름으로 시간을 버틴다.


나는 이것을 ‘죽음의 산업화’라고 부른다.


많은 노인들이 평생 모은 재산의 상당 부분을 생의 마지막 1~2년에 쏟아붓는다.

그 돈은 고통을 줄이는 데 쓰이는가, 아니면 튜브에 의존한 채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시간을 유지하는 데 쓰이는가.


병원 지하에는 호텔 로비처럼 화려한 장례식장이 있다.

이미 죽은 뒤의 육신을 위해서는 수천만 원을 지출한다.


그러나 정작 숨이 넘어가기 직전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임종실’은 찾기 어렵다.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은 넘치는데, 죽어가는 자를 위한 공간은 부족한 사회.

이 모순 앞에서 나는 질문하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나는 사주명리를 공부하며 ‘비움’을 배웠다.

잘 산다는 것은 잘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잘 비우고 가는 일이라는 것을.


내 마지막 재산이 차가운 기계와 병원비로 사라지길 원치 않는다.

그 돈은 남은 이들의 삶을 따뜻하게 데우는 데 쓰이길 바란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서류를 정리하고 도장을 찍었다.

죽음의 담론을 병원 회의실이 아니라 우리 집 저녁 밥상 위로 끌어올렸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말하는 일은 불길한 예언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종이 한 장을 남기고 나니 마음이 깃털처럼 가볍다.

숙제를 미리 끝낸 사람처럼.


이제 남은 일은 단 하나.

그날이 오기 전까지, 오늘을 아낌없이 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