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매일 같은 농담에 웃는 할머니들

치매, 내 영혼을 지우개로 지우는 시간

by 명리하는 영화

8년 전, 나는 잠시 요양원 주간보호센터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곳은 거동이 아주 불편한 분들보다는,

혼자 화장실을 다닐 수 있는 경증 치매 어르신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겉보기엔 평화로웠다.

햇빛은 따뜻했고, 웃음소리도 자주 들렸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늙음이 가져올 수 있는 또 다른 상실을 보았다.


어느 날, 휴게실에서 세 분의 할머니가

배꼽을 잡고 웃고 계셨다.


“아이고, 형님도 참! 우리 시어머니가 그랬다니까!”


나는 그 틈에 끼어 함께 웃었다.

그날은 정말 즐거웠다.


그런데 다음 날이었다.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자리.

세 분은 어제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같은 순서, 같은 타이밍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와 똑같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마치 누군가 비디오테이프를 되감기 한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웃음.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이 다시 어제가 되는 기묘한 반복.


몸은 분명 현재에 있는데,

기억은 특정 지점에 단단히 멈춰버린 상태.


그 장면은 내게 아주 깊고 서늘한 질문을 남겼다.


기억이 흐려질 때,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센터의 엘리베이터는 항상 굳게 잠겨 있었다.

해 질 무렵이 되면

센터가 갑자기 술렁이기 때문이다.


“나 집에 가야 해! 영감 저녁밥 차려줘야지!”

“우리 애들 학교에서 올 시간이야!”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남편,

이미 중년이 된 자식들.


그러나 그분들의 시계는

30~40년 전, 누군가의 바쁜 엄마와 아내로 살던 그 치열했던 시간에 멈춰 있었다.


굳게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두드리며 울부짖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육체가 아무리 건강하다 하더라도,

기억이 사라지면,

삶의 존엄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는가.


나는 좌탈입망을 말한다.

누워서 죽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정신이 텅 빈 채 그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맞이하는 죽음이라면,

그 꼿꼿한 자세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 배설을 내 손으로 처리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내 마지막 숨이 멎는 순간까지 ‘나’를 정확히 알아보는 일이다.


나는 치매를

내 삶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영역으로 두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움에 떨며 기다리기보다는,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싸움을 하기로 했다.



1. 뇌를 낯설게 하기


익숙함은 편안하지만,

지나치면 뇌를 둔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불편을 선택한다.

오른손잡이지만 양치질은 왼손으로 해보고,

늘 걷던 길 대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골목으로 꺾어 들어간다.


흰 화면 앞에 앉아 이렇게 글을 쥐어짜 내는 일 역시,

내 뇌를 깨우는 가장 강력한 스트레칭이다.


2. 배우는 삶을 멈추지 않기


나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복잡한 한자가 가득한 사주명리를 공부하고,

난해한 고전을 읽는다.


머리를 쓰면 피곤하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근육을 쓰지 않으면 퇴화하듯,

뇌도 사용하지 않으면 녹슨다.


공부는 젊은 학생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노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생존전략'이다.


3. 새로운 대화 속으로 들어가기


과거의 이야기만 반복하는 순간,

시간은 뒤로 고정된다.


그래서 나는 젊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요즘 세상 이야기를 따라가려 애쓴다.


"나 때에 말이야"라며 과거의 ‘왕년’에 머무르는 꼰대짓 하지 않기.

현재의 언어를 잃어버리지 않기.

타인과의 건강한 대화는,

뇌를 춤추게 하는 가장 인간적인 운동이다.


4. 멍이 아닌 ‘깨어 있음’


가부좌를 틀고 명상할 때

나는 절대 멍해지지 않으려 애쓴다.


호흡의 길이,

심장의 박동,

몸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감각들을 예민하게 관찰한다.


깨어 있다는 것은

그럴싸한 영적인 수사가 아니라

지독한 의식의 훈련이다.


정신의 끈이 느슨해질수록

망각의 지우개는 더 빠르게 내 영혼을 지워나간다.


나는 두렵다.

남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날,

아들의 이름이 내 입술에서 사라지는 날,

그리고 내가 치열하게 쓴 글을 읽고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날이 올까 봐.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읽고, 쓰고, 걷는다.


육체의 쇠퇴는 자연의 섭리라 피할 수 없을지라도,

내 정신의 날카로운 칼날만큼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날 세워 두고 싶다.


내 마지막 말이

“영감 밥 차려야 해”라는 시간에 갇힌 혼잣말이 아니라,


“고마웠다. 사랑한다. 잘 놀다 간다.”

는 또렷한 작별 인사이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