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은 하체 근육에서 나온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죽음 자체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다.
기저귀를 차는 일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아랫도리가 축축해지는 순간.
그 서늘한 상상은 십오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애인 활동지원사로 일하며,
그리고 요양 돌봄 현장에서 수많은 어르신 곁을 지키며
나는 똑똑히 보았다.
어르신들이 가장 수치스럽게 여기는 순간이 언제인지 아는가.
자식이 면회를 오지 않을 때가 아니다.
남의 손에 의해 기저귀가 갈아지는 순간.
그때 눈빛에서 생기가 툭, 하고 꺼진다.
밥을 떠먹여 주는 일은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배설을 타인의 손에 맡겨야 하는 일은,
인간으로서 마지막 남은 경계가 허물어지는 체험과도 같다.
나는 상상해 본다.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대소변이 나오는지도 모른 채 시간을 보내는 노년.
“어머니, 쌌어요?”
그 말 한마디에 움츠러드는 자존심.
이것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나는 그렇게 떠나고 싶지 않다고.
적어도 내 배설만큼은 내 손으로 정리하고 가겠다고.
내가 좌탈입망(坐脫立亡)을 말하는 이유는
거창한 도력을 꿈꾸어서가 아니다.
죽는 날 아침까지 내 발로 화장실에 가고,
내 손으로 뒤처리를 하고,
정갈한 모습으로 돌아와 앉고 싶은 마지막 자존심 때문이다.
그러나 존엄은 의지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그것은 철저히 근육의 문제다.
나이가 들수록 가장 먼저 약해지는 것이 다리다.
허벅지는 내게 단순한 신체 부위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을 꼿꼿하게 떠받치는 기둥이다.
변기에 앉았다가 남의 도움 없이 일어나는 힘.
그 힘이 사라지는 순간,
내 자존도 함께 무너져 내린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신발을 벗는다.
매주 황학산 산책로와 여주 신륵사 강변의 흙길을 맨발로 걷기 시작한 지 어느덧 10여 년이 되었다.
맨발 걷기는 푹신한 운동화를 신고 걸을 때보다 다리 근육을 단련하는 데 두 배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 이 시간은 단순한 건강 비결이나 운동이 아니다.
신발이라는 보호막을 벗어던지고 날것의 흙과 돌을 온전히 맨살로 받아내는 일.
발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대지를 단단히 움켜쥐듯 걷다 보면, 후들거리던 두 다리에 묵직한 생명력이 차오른다.
거울 앞의 미용 체조가 아니라,
끝까지 내 두 다리로 서 있겠다는 맹렬한 다짐이다.
나는 오래 사는 것보다 스스로 설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무병장수(無病長壽)보다 유병자립(有病自立).
병이 있어도 좋다. 내 일은 내가 처리하는 삶.
오늘도 나는 남한강의 바람을 맞으며 발뒤꿈치로 바닥을 꾹 누르며 걷는다.
이 걸음은 여유로운 산책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문턱을 내 발로 당당히 넘기 위한 거룩한 생존 수행이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나는 이렇게 떠나고 싶다.
가부좌를 틀고 고요히 앉아 있다가
몸이 마지막 신호를 보내면,
누구의 부축도 없이
10년간 대지를 딛고 단련한 두 다리로 화장실에 걸어가
속을 비우고, 물을 내리고, 손을 씻고 돌아오는 것.
그리고 가장 개운한 얼굴로 다시 앉아
조용히 눈을 감는 것.
그것이 내가 꿈꾸는 마지막 장면이다.
내 삶을 스스로 정리하고 고요히 문을 닫는 일.
나에게 해우소는 단순히 근심을 푸는 곳이 아니라,
내 삶의 마지막 존엄을 완성하는
가장 거룩한 성소(聖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