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물구나무서서 죽은 사람을 아시나요?

자세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

by 명리하는 영화

“나는 누워서 죽지 않기로 했다.”


이 말을 하면 열에 아홉은 코웃음을 친다.

“아니, 사람이 힘 빠지면 눕는 거지. 용을 쓴다고 꼿꼿이 앉아서 죽나? 그게 말이 돼?”


맞는 말이다.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죽음은 ‘쓰러짐’이고, 중력에 굴복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인류의 기록을 더듬다 보면, 그 뻔한 상식을 보란 듯이 비껴간 ‘괴짜’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죽음에 멱살 잡혀 끌려가지 않았다.

마치 소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처럼,

자신의 마지막 자세를 스스로 정하고 “나 갈게!” 하며 생을 마쳤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신비한 전설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짓궂게 묻는다.


“도대체 얼마나 잘 놀았길래, 갈 때도 그렇게 멋지게 갔을까?”



1. 죽음을 농담처럼 던진 남자, 등은봉


당나라의 등은봉 선사.


입적이 가까워지자 제자들에게 묻는다.


“누워서 죽은 사람은 보았느냐?” “네.”

“앉아서 죽은 사람은?” “가끔 있습니다.”

“서서 죽은 사람은?” “드물지만 들었습니다.”


그러자 선사가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그럼, 거꾸로 물구나무서서 죽은 놈은 봤느냐?”


제자들이 기함하자, 선사는 그 자리에서 휙 하고 물구나무를 서더니 숨을 거뒀다.

심지어 옷자락 하나 흘러내리지 않았다.


상상해 보라. 시신이 거꾸로 서 있으니 관에 어떻게 넣는단 말인가?

결국 달려온 여동생이 “살아서도 남을 골탕 먹이더니, 죽어서까지 이리 구느냐”며

툭 치자 그제야 털썩 쓰러졌다고 한다.


기행(奇行)이 아니다.

죽음이라는 공포 앞에서 심각해지지 않을 수 있는 ‘완벽한 자유’다.

세상에 던지는 마지막 통쾌한 농담이었다.




2. 창틀을 거머쥔 서양의 야생마, 조르바


동양에만 이런 기백이 있었던 건 아니다.

서양 문학 속에도 누워 죽기를 거부한 위대한 영혼이 있다.

바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이었던 『그리스인 조르바』.


엄숙한 교리를 비웃으며 춤과 웃음 속에서 신성을 찾았던 야생마.

죽음이 턱밑까지 온 마지막 순간, 조르바는 침대에 눕기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비틀비틀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창틀에 손톱이 박히도록 꽉 거머쥐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먼 산을 바라보며 말처럼 힝 힝 거리고 웃다가, 꼿꼿이 선 채로 숨을 거두었다.


눕지 않겠다는 야성.

삶을 향한 마지막 통쾌한 웃음.

그는 끝까지 생명의 주인이었다.



3. 지게를 진 수월 스님과 내 일상 속의 나옹선사


조르바의 죽음이 펄떡이는 ‘자유’라면, 한국 스님들의 죽음은 묵직한 ‘책임’과 ‘기개’다.


수월 스님은 입적하기 며칠 전,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지게를 졌다.

산에 올라 땔나무를 해다 차곡차곡 쌓았다.

며칠 뒤 자신의 시신을 태울 다비식 장작이었다.


남에게 내 죽음의 뒷수습조차 지우지 않겠다는 무서운 책임감.

스님은 나무를 다 쌓아둔 뒤,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열반에 들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내가 숨 쉬고 걷는 여주에도 그 서늘한 기백이 있다.


남한강이 굽이치는 신륵사.

나는 산책길에 고려 말 나옹선사의 흔적을 더듬는다.


스님 역시 그곳에서 고요히 가부좌를 틀고 좌탈입망하셨다.


다비식이 치러졌다는 강월헌 앞 탑에 서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세상 풍파를 뒤로하고, 스스로 호흡을 정돈하며 문을 닫았을 고요한 뒷모습.

나는 강바람을 맞으며 그 묵직함을 마음에 새긴다.


삶이 엉망진창이었다면,

죽음이 그렇게 정돈될 리 없다.


삶의 주인으로 명쾌하게 살았기에, 떠나는 길도 군더더기가 없었으리라.



4. 물구나무는 못 서도, 내 발로 걷고 싶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등은봉 선사처럼 물구나무서서 죽을 생각은 없다.

아니, 지금 당장 물구나무를 서보려다가는 목뼈가 먼저 부러져 죽을지도 모른다.


좌탈입망은 곡예가 아니다.

근력(筋力)의 문제 보다도, 심력(心力)의 문제다.


그 핵심은 단 하나다.

마지막 순간까지 정신의 주인이 ‘나’였는가.


병원 기계음 소리에 묻혀 허둥지둥 떠나는 것이 아니라,


조르바처럼 당당하게 일어서서,

수월 스님처럼 내 몫의 책임을 다하며,

나옹선사처럼 고요하게 문을 닫을 수 있는가.


나는 물구나무 대신, 오늘 아침에도 스쾃을 하고 가부좌를 튼다.


등은봉처럼 유쾌하게,

조르바처럼 호탕하게,

나옹선사처럼 묵직하게.


비명이 아니라, 한 문장으로 마침표를 찍고 싶어서다.


“잘 놀다 갑니다.
더 이상 미련은 없습니다.”


전설은 멀리 있지 않다.

오늘 내가 짓는 표정, 내가 앉은 자세가 모여 나의 마지막 모습을 조각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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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등은봉 선사: 중국 송나라 도원(道原)의 『전등록(傳燈錄)』 중

*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장편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 수월 스님, 한암 스님, 나옹선사 일화: 근현대 및 고려 불교 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