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통증, 도망치지 않고 마주 보는 연습

두 번째 화살을 피하고, 삶의 자율주행에 몸을 맡기다

by 명리하는 영화

예순이 넘으니 몸은 참 솔직해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딘가 한 군데는 삐걱거리고, 불편한 곳이 생긴다.


돌이켜보면 내 몸을 참 많이도 썼다.

수십 년 마룻바닥에 꿇어앉아 기도했고, 글을 쓴다며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었다.

연골은 닳고, 디스크는 눌리고, 손가락 관절에는 세월의 마모가 켜켜이 쌓였다.


나는 겁쟁이다.

특히 육체적인 통증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진다.


좌탈입망을 이룬 선사들의 꼿꼿한 마지막을 말하면서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이런 질문이 남아 있다.


‘과연 나는 무너져 내리는 통증을 맨 정신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



1. 통증 위에 소설을 쓰지 않기


예전의 나는 통증보다 상상이 더 무서웠다.


무릎이 아프면 곧바로 미래로 달려갔다.

‘이러다 못 걷는 거 아니야?’

‘큰 병이면 어쩌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현재로 끌어와

작은 통증 위에 거대한 비극의 소설을 덧붙였다.


그러다 어느 날 분명히 알게 되었다.

통증과 괴로움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불교에는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말이 있다.


첫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없다. 살아 있는 몸이라면 통증은 온다.

그러나 두 번째 화살, 즉 “왜 하필 나야?”, “이제 끝이야”라는 생각은

내가 스스로 쏘는 것이다.


통증은 신경의 신호다.

몸이 보내는 정보다.


하지만 괴로움은 해석이다.

나는 그 신호 위에 두려움과 예측을 덧칠한다.


그래서 연습을 시작했다.

통증이 오면 거기까지만 본다.


“쑤신다.”

“찌릿하다.”

“뻐근하다.”

"쓰리다"

"저리다"


그 이상 이야기를 붙이지 않는다.


놀랍게도 감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저항하지 않으면 통증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잦아든다.

내가 붙잡고 늘어질 때만 그것은 오래 머문다.



2. 자율주행 차 안의 동승자


요즘 나는 인생을 자율주행 자동차에 비유한다.


심장이 뛰는 것도, 소화가 되는 것도, 세포가 분열하는 것도

내가 직접 조종하는 일은 거의 없다.


몸은 이미 우주의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저절로 굴러가고 있다.

나는 운전석의 지배자가 아니라

이 차에 탑승한 동승자에 가깝다.


길이 울퉁불퉁하면 차는 흔들린다.

그때마다 겁에 질려 핸들을 빼앗아 급하게 꺾으면 오히려 더 위험해진다.


통증이 올 때마다 나는 그동안 핸들을 과하게 붙들고 있었다.

‘멈춰야 해. 없애야 해. 도망가야 해.’


지금은 조금 다르다.

차가 흔들리면 그냥 흔들림을 느낀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 때 무릎이 저려오면

예전에는 적처럼 여겼다.

지금은 이렇게 말한다.


“아, 이런 감각이 올라오는구나.”


숨은 그대로 두고, 감각도 그대로 둔다.
아픔은 몸의 영역이지만, 괴로움은 저항의 영역이라는 것을
나는 천천히 배우는 중이다.



3. 총체적 고통을 미리 비워두기


임종의 고통은 단순히 육체의 통증만이 아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개척한 시슬리 손더스는 이를 ‘총체적 고통(Total Pain)’이라 불렀다.


신체적 고통.

두려움과 후회 같은 심리적 고통.

관계의 갈등이라는 사회적 고통.

의미 상실에서 오는 영적 고통.


이 네 가지가 한꺼번에 얽힐 때

우리는 통증을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경험한다.


그러나 마음의 빚을 미리 정리하고,

미움을 풀고,

삶의 의미를 스스로 납득하며 살아간다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오직 ‘몸의 통증’ 하나일지도 모른다.


좌탈입망을 보여준 이들의 고요함은

초인적인 인내심 때문이 아니라

이 세 가지 마음의 고통을 이미 오래전에 비워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4. 도망치지 않고 고통 마주 보기

나는 여전히 겁이 많다.

훗날 약간의 의료적 진통제에 의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통증의 정체를 알고,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으려 깨어 있으려는 태도다.


마지막 날이 오면

몸은 분명 거친 신호를 보낼 것이다.


그때 나는 소설을 쓰지 않고 싶다.


“이제 정말 끝이야” 대신

“아, 내 몸의 문이 닫히는 감각이구나.”


마지막 파도를 공포로 붙잡지 않고

그저 바라보고 싶다.


오늘 통증을 도망치지 않고

마주 보는 이 연습이

내일의 존엄을 만든다.


나는 통증과 싸우지 않는다.

나는 통증을 적으로 삼지 않는다.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그저,

마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