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이 주는 행동, 인정욕구.
누군가 하늘에 암막커튼을 쳐 놓은 게 분명하다.
도대체 해를 어디로 가져갔단 말인가. 벌써 네 번 째 맞이하는 베를린의 가을이지만 내 마음은 절대 타협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화창한 여름 햇살을 맞으며 바이에른 산 필스너를 마셨던 일이 꿈만 같다. 회색빛 하늘 아래 유일한 원색을 자랑하는 단풍만이 채색감을 보여준다. 그나마도 10월 말, 윈터차이트(Winter Zeit)가 시작되면 가을은 끝. 겨울이 시작된다. 갑자기 미드 ‘왕좌의 게임’에서 나오는 대사가 생각난다. “Winter is coming” 뭔가 끝이 없을 것 같은 어둠과 공포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의미하는 이 대사가 베를린의 가을을 묘사하기 딱 좋은 말인 것 같다. 성급한 상점 주인들은 벌써 부터 크리스마스 상품들을 진열했다. 추위에 약한 베를리너들은 두꺼운 패딩과 털모자로 무장했다. 완전 한 겨울이다. 가늘 하늘이 높으니 말이 살찐다는 한국의 가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곡식을 추수하고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할 것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학기가 시작됐다. 독일 대학의 새 학년, 새 학기는 일반적으로 10월 중순에 시작한다. 새싹이 움트고 활기를 되찾는 봄이 아니라 늦가을에 새 학기를 시작하는 탓에 시작부터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우중충한 날씨에 몸은 천근만근. 머리는 대기권을 배회하고 있는 듯 띵하다. 카페인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도통 힘이 나지 않는다. 내일 모레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를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화창한 봄날, 파릇한 신입생들과 시작하는 한국의 캠퍼스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아직 회사원이었다면 과장급 이상의 직급을 감당해야 할 나이에 스스로 자처한 일이다. 오롯이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독일 유학을 떠난다고 했을 때, 가족과 친구들은 나의 도전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 응원을 등에 업고 베를린에 발을 내디뎠을 때만 해도 몸이 가벼웠다. 미세 먼지 가득한 공간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숨 쉬고 사는 게 훨씬 수월했다. 유럽의 감각 있는 젊은 예술가들이 몰려드는 핫플레이스, 베를린. 이곳에서 예술 공부를 한다는 것은 좀 자랑할만한 일이다. 그것도 국립예술대학에서. 허...허세가 꿈틀꿈틀 기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눌렀다. 여하튼 나도 유럽의 멋진 예술, 지식인들처럼 폼 좀 잡으면서 살고 싶었다. 서양 친구들과 영어, 독일어로 말하면서 과도한 제스처와 미간 사이를 좁혔다 넓히기를 반복하는 조지 클루니 같은 표정을 지어보고 싶었다.
나의 호기 있는 바람은 어디로 가고 현실은 구슬펐다.
수업 첫날부터 나의 진지한 학업 계획은 동료들의 웃음거리가 됐다. 내 독일어를 못 알아 들었나? 지금 생각해도 내 이야기엔 웃음 포인트가 전혀 없었는데 말이다. 시간이 갈수록 언어의 장벽은 점점 더 높아져 갔다. 학생식당에서 혼자 밥 먹는 날이 많아졌다. 아시아에서 온 내일모레 마흔 아저씨는 갈수록 쭈구리가 되었다. (사실 얘들은 내 나이를 모른다. 아마 알면 더 안 놀아줄 것이다. 더욱이 교수 줄리아보다 내가 세 살이나 많다는 것을 알면... 끔찍하다!) 두 학기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빨리 지나갔다. '파솔리니의 시선'도, '칼 맑스의 노동 시간'도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 머릿속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진다. 채우고자 시작했는데 하면 할수록 결핍만 커진다.
어쩌면 유학을 마칠 때, 내 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 있다. 만족과 결핍의 반복, 그 주기(period)의 간격이 좁아지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은 더욱 견고해졌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W. 아들러는 모든 문제는 '인간관계'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우리가 느끼는 '만족'과 '결핍'도 결국 내면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에게서 오는 것이다. 우리는 남의 시선과 사회적 통념에 지배를 지속해서 받으면서 '나를 위한 삶'이 아닌 '타인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 누구나 한번 쯤 경험해 봤을 것이다. 타인의 생각이 신경 쓰여 잠 못 이루던 밤을. 유학 초기, 짧은 만족 후 찾아온 결핍은 내 또래의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객관적이지 않고 모호한 잣대를 기준으로 나를 비교함으로써 자신을 '인간관계' 굴레 속에 집어넣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넌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니?"
이런 생각이 들자, 내면 곳곳에서 결핍이 발생했다. 결핍은 열등콤플렉스를 생산해냈다. 이내 후회와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들러는 말한다. '진정한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용기이다.'
즉, 타인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라야 진정한 자유라는 것이다. 인정욕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다. 사실 마흔 살에 반드시 해야 할 과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과제가 타인과 다르다고 틀린 것은 아니다. 남의 시선과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타인과 나의 과제 분리가 필요하다. 어디까지가 나의 과제이고, 타인의 과제인지 구분하고 선을 그을 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실천된다면 '인간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고민이 상당 부분 해소될 것이다.
에필로그
사실, 열흘 전 이글의 2/3를 써놓고 프랑크푸르트로 출장을 왔다. (필자는 모 언론사의 프리랜서 카메라 기자로 일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느낀 '만족'과 '결핍'에 대해 심리학적인 해결방안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 싶었다. 출장 중에 잠을 줄여가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마지막 단락을 쓰면서 '과제 분리'라는 말에 생각이 멈췄다. 대통령과 비선 실세 게이트 현재 그 비선 실세를 취재하고 있다.
그들에게 아니, 국가를 이 지경으로 만든 정부 관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어디까지가 나의 과제이고, 타인의 과제인지 구분하고 선을 그을 줄 아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