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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현 Oct 05. 2020

맛집을 그려보고 싶은 이유

온고지신, 샤로수길

 맛없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만큼 화나는 일이 또 있을까?

 몇 년 전 홍대에서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나가사키 짬뽕이 당겨서 근처에 판매할만한 곳을 찾아보다가 24시간 국숫집을 발견했다. 주력 메뉴는 아니지만 나가사키 짬뽕을 판매하고 있었다. 주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음식이 나왔고, 첫 국물을 입에 떠 넣는 순간 깨달았다.

망했다. 진짜 맛없어!

 가격은 무려 구천 원이었고 배는 적당히 출출했다. '그래. 일단 먹어보자'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이제는 맛없던 짬뽕의 맛이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느꼈던 감정만은 생생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속으로 욕을 했고, 그날 처음으로 음식 때문에 나 자신에게 화를 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맛없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걸 가장 싫어한다.


 그림을 시작하면서 우선순위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맛집을 정하고 나서 그 주변에 볼만한 곳을 찾곤 했는데, 지금은 그림 그릴 포인트를 먼저 찾고 음식이란 건 그저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가끔은 배를 채우기 위해 들어간 곳이 맛집인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몇 달 전 새벽에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맛집을 그리면 어떨까?' 굉장히 간단하지만 놀라운 생각이었다. 만약 예쁜 맛집을 찾아가서 그림을 그리고 맛있는 음식도 먹는다면, 소재 고민과 행복한 한 끼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드로잉 맛집'이라는 카테고리가 탄생하게 되었다.

 더할 나위 없이 진행되는 것 같았는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예쁘고 그려보고 싶은 맛집들은 혼자 가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년간의 영업과 남을 신경 쓰지 않는 성격 덕에 혼밥 스킬은 만렙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리고 1인 메뉴가 없는 경우도 많고, 혼자서는 다양한 메뉴를 시킬 수가 없었다. 막상 맛집 리스트를 정리해 놓고도 몇 주째 가지를 못했다. 혼자 가긴 힘들었고 누군가와 같이 일정을 소화할 때면 자연스럽게 유도해보지만, 상대가 조금이라도 내켜하지 않으면 바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카테고리만 확장해놓고 자연스럽게 작심삼일이 되었다.


 얼마 전 '온고지신'이라는 카페에 다녀왔는데 두 가지 고민을 한 번에 해결해 주었다.

첫 번째 고민은 카페를 맛집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넣어야 할지 말지였고 , 두 번째는 리스트업 해둔 맛집을 찾아가지 않으면 진행이 되지 않던 점이다. '온고지신'은 맛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디저트 맛이 괜찮았고, 내 맛집 리스트 안에는 없었지만 외관도 내부도 꽤 예쁜 곳이었다. 다녀온 이후 조금 더 명쾌해졌다. 카페를 탐방하는 건 혼자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드로잉 맛집이라는 카테고리를 얼마나 자주 채울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다. 그림만 그리다가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글로 확장을 시켰고, 이번에는 영상에도 손을 대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굳게 먹었지만 아마 골고루 잘 해내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한 가지만 붙잡고 매달려도 잘 해내기 어려운 분야들이니. 그래도 긍정적인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림, 글, 영상은 서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림에도 이야기를 불어넣기 시작했고, 영상을 시작하면서 스토리의 중요성도 깨닫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온고지신' 카페를 다녀온 이후에 해결된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다.

다만 새벽에 갑자기 '온고 빵'이 당겼고, 브런치를 켠 후에 그림부터 올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한 건 사실이다.




온고지신. 샤로수길. 20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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