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 내가 글을 옮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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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글을 옮기게 된 이유


글을 쓰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글쟁이가 되는 것을 피하라는 릴케의 조언을 언제나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쓰지 않아도 살 수 있는가,라고 상당히 자주 자문하는 편입니다. 매우 안타깝게도, 매번, 살 수 없다, 라는 답을 얻고 맙니다. 변하지 않는 마음에 뿌듯한 자부심을 느낄 때가 많지만, 아주 가끔은 발밑의 현실이 무너져 내려는 위기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위기감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는 것뿐입니다. 꼭 써야만 한다면 무엇을 쓰겠는가. 다행히도 마음은 상당히 관대한 답변을 주었습니다. 무엇이든 쓰기만 하면 살 수 있겠다,라고 말입니다.



눈을 감으면 어둠이 보입니다. 그 어둠 속에는 생각이 있고 감정이 있고 기억이 있습니다. 나의 생각이고 감정이고 기억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의 온갖 것들이 얽히고설켜 있는 그 어둠을 꼭꼭 뭉치고 언어로 바꿔서 세상에 내보이는 행위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쓰는 글은, 작은 나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이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인지, 제 안에서 나온 글감 중 그 어떤 것도 세상에 차마 내보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전력을 다해 시행착오를 겪어도 생계형 글쟁이가 될 수 있을지 미지수인데, 자신을 숨기려는 글쟁이라니. 살기 위해 다른 직업이 필요했지만, 써야만 살 수 있다는 욕망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즈음, 은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번역가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다. 같은 악보를 쓰더라도 지휘에 따라 아름다운 연주가 되기도 하고, 듣기 거북한 소음이 되기도 한다. 그 말이 너무 멋져서 가만히 생각하다 보니 깨닫게 되었습니다. 번역이란 나를 숨기면서도 글을 써낼 수 있는 수단이 되겠구나.


오늘도 글을 옮깁니다.


저자가 그려낸 아름다운 세계를 옮겨옵니다. 그 세계는 도착어의 세상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도착어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오직 저를 통해서만 그 세계의 아름다움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제가 비춰낸 작은 세계들은 '역자 차영지'라는 이름표를 달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그 수가 늘어 갈수록 저라는 거울이 어떤 빛깔인지 더욱 명확하게 알게 되겠지요.


이 일의 시작은 저 자신을 숨기면서 글을 써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을 내보일 용기가 생긴 뒤에도 번역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유가 없네요. 그냥 즐거워서요. 번역하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제 모습이라서요.


번역이라는 행위에서 느껴지는 행복감이 지속되는 한, 저는 계속 글을 옮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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