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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Apr 26. 2021

[영지] 어떤 책을 만들 것인가

출판하는 방법 - 방향성

얼마 전 정기간행물 등록을 위해 구청에 갔습니다. 출판사 등록을 위해 오신 분이 계시더군요. 원하시는 출판사 이름을 적으라는 직원의 말에 깜짝 놀라시며, “어떤 거로 해야 할까요?”라고 물어보셨습니다. 구청 직원분께서도 당황하시며, “생각해 오신 이름이 있으시면 적으세요. 사용 가능하신지 확인해드릴게요.”라고 답하셨습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힘겹게 적은 세 글자는, 신청인의 이름과 같았습니다.      


이상하게도 많은 분이 잠깐의 인터넷 검색 후 구청으로 달려가 출판사 등록을 하시면서 1인 출판사를 준비하십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하지만 엄연한 사업으로 생각했을 때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취급할 상품이 무엇인지 정해지기도 전에 회사부터 차리다니요. 카페인지 국밥집인지 주점인지 정하기도 전에 가게부터 얻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방향성을 정해야 합니다.     

 

일 년이면 9만 권이 넘는 신간이 쏟아져 나옵니다. 집계되지 않는 독립출판물까지 더한다면 그 숫자는 훨씬 커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꼭 책을 내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요? 출판의 물결에서 헤엄치려면 방향성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저희 출판사의 경우에는 ‘책으로 문화를 만들고 싶다.’라는 방향성으로 시작했습니다. 독서는 흔히 혼자 하는 취미생활이라고 생각하시는데, 함께하는 독서문화를 선도하는 책을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출판회사 내로라
 내로라하는 책을 냅니다. 
 내로라가 사람을 잇습니다. 
 내로라하는 문화를 만듭니다.    


이름과 방향성을 정하기가 어렵다면, 자신이 내고자 하는 책을 쭉 나열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첫해에는 적어도 10권의 책 출간을 목표로 하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합니다. 그렇다면 1인 출판사의 가장 첫 업무는 10권 분량의 원고 확보 혹은 출간 계획서 작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희 출판사는 ‘월간 내로라’라는 프로젝트로 12권을 기획했기 때문에 하나의 출간 계획서를 작성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단행본이 될 때는 여러 장의 계획서가 필요하겠지요. 제출의 용도가 아니니 스스로 생각을 정리할 정도만 되어도 충분할 것입니다.      

 

프로젝트명: 월간 내로라
분야: 소설, 고전소설, 외국어, 외국소설, 문학, 전집, 단편소설  
예상 판형: 128*188 (작은 책) ~120pg(얇은 책), 메모해도 뒷면에 비치지 않는 도톰한 내지 사용, 가방에 막 넣어 다녀도 표지가 낡지 않도록 약간 도톰한 표지와 날개.
기획 의도: 바쁜 현대인들을 위해 막간을 이용해 단숨에 읽을 수 있는 단편 소설을 선정한다. 깊이 있는 성찰을 위해 다양한 해설과 정보를 제공하고 원서와 나란히 영한대역으로 진행한다.
예상 원고: 2021년도에는 1900년대 초반 영미권의 고전 단편소설 12편. 
예상 독자층: 독서와 나눔을 활발히 하는 20-40대 (주로) 여성
경쟁 도서: 독립 출판계의 단편소설들. 대형 서점에서는 팔지 않기에 대형서점 쪽으로 얇은 소설임을 어필하면 좋을 듯. 10권 이상 모였을 땐 매대 광고를 생각해보자.
마케팅 전략: ‘월간’을 어필하여 체험단을 최대한 많이 모집. 책을 읽고 나누자는 취지에 맞게 문화 소외계층을 향한 무상제공을 아까워하지 말자. 독서 모임 활성화 – 화상채팅 독서 모임 & 독서 토론 카페 & 영어 공부 등.      


물론, 머릿속에 떠오른 모든 책을 출간할 수는 없습니다. 자본금과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우리 회사의 구성원은 딱 1인이니까요. 상대적으로 넉넉한 자본금으로 시작하여, 제작 부분에서 최대한 외주를 준다고 해도, 최종 결정을 포함한 판매와 마케팅은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니 출간 계획서를 훑으며 세 가지를 질문해봅시다.     


1. 내가 출판할 수 있는 책인가? (인력과 자본금이 충분한가)
2. 세상에 나와야 하는 책인가? 
3. 사람들이 살만한 책인가?      


작성한 출간 계획서 중에서 이 세 가지 모두를 충족하는 것은 몇 권이나 되나요?    

  

서점에서 여러 책을 들여다보면, 분야별로 책의 형태나 구성이 다른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문학과 실용서는 크기에서부터 다르고, 내지에도 색감이 생생하게 전달되어야 하는 책들은 내지로 사용된 종이의 종류부터가 다릅니다. 분야별로, 독자들이 편하게 느끼는 책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실수를 최소화하고, 과정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첫해에 같은 분야의 책으로 기획하는 것이 좋습니다. 출간 이후의 배본과 판매를 위한 홍보 & 이벤트 진행 등도 분야별로 상이하기 때문이지요. 서점의 담당 MD 분이 분야별로 다른 것은 당연히 아시겠지요. 매월 새로운 MD 분과 얼굴을 터야 하는 것보다는, 같은 분께 매월 찾아가 새 책을 소개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 될 겁니다.      


출판사 창업에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사업계획서도 좋지만, 출간 계획서로 기반을 다진다면 출판사의 방향성과 정체성을 다잡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인 출판인의 삶은 혼란과 갈등의 연속입니다. 어떤 출판사가 될 것인지, 출판사로서 무엇을 해낼 것인지, 그 방향성마저 흔들리게 된다면, 사업 전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방향성을 잡기 위해서는 출간 계획서로 시작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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