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 당신이 일인출판을 하면좋겠습니다.

당신이 책을 내면 좋겠습니다.

by 영지

언젠가는 책이 정보를 얻는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지식을 얻게 죄면 정돈하고 또 정제하여 책으로 엮었을 것입니다. 그런 종이의 집합을 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테지요. 대중이 통합적으로 합의한 진실을 정리하여 묶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사람들은 틀릴 가능성이 가장 적은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찾을 것입니다.


요즘 세상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는 무료 정보가 넘쳐나죠.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정보를 즉각적으로 얻기 위해 책보다는 인터넷 창을 엽니다. 책을 정보 전달의 수단만으로 보기는 어렵고, 또 책의 제작 비용이 저렴해지면서 대중이 합의한 사항 이외의 아주 개인적이고 편파적인 이야기들도 책으로 엮어지기 시작했지요. 더는 책에 적힌 정보라고 하여 대중적으로 합의된 정보라고 볼 수 없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렇다면 21세기 책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전자 기술을 빌리고 가상현실을 취하며 책의 형태는 종이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바람을 구체화하기에 가장 쉬운 방법은 언어를 빌리는 것이고, 그 바람을 형태화하기에 가장 빠른 방법은 문장화하여 책으로 엮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책’이라는 아이디어는 절대 사라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만.... 바라는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종이책이 명맥을 이어 가기를 바랍니다. 기술이 좋아지면서 종이책의 기능을 완벽히 대체할 새 시대의 ‘책’들이 많이 나온 줄로 압니다. 하지만 종이책에 애착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러한 변화가 쉽게 편리해지지만은 않습니다. 옛것에 대한 집착일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제가 만드는 책들의 전자화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것도 아마 그러한 이기적 바람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종이책 판매를 이어가고자 하는 지극히 개인적 바람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구매자의 감성에 호소하는 일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손가락을 비비며 종이를 한장 한장 넘기는 촉감과 마음에 맞는 문구를 찾았을 때 표시하기 위해서 쭉쭉 그어놓는 색연필의 질감. 언젠가 다시 찾으리라 마음으로 다짐하며 작게 접는 삼각형부터, 모호하게 떠오르는 그 구절을 찾기 위해 촉감에 의존하여 책장을 펼쳐보는 그 불확실성까지.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눈을 감고 이러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책장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게 되리라 생각합니다만.... 줄어드는 책 판매량과 줄줄이 문을 닫는 대형/독립 서점의 숫자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소리치는 것 같습니다.


출판이 쉬워지고 저렴해지는 것을 보면, ‘책’이라는 존재 자체에 생명력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어쩌다 손에 넣은 종이책은 하나의 현상으로 스쳐 갈 뿐이지만, 우리의 이름을 담은 종이책은 함부로 폐기하기 쉽지 않으니까요. 더 많은 사람이 쉽게 책을 내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은, ‘종이책’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어지기 위해서 선택한 그만의 생존 수단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문학을 통해 여러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고는 합니다. 주인공의 시점에서만 쓰여진 양산형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던 깊은 공감과 폭넓은 이해를, 찌질하고 비굴하고 비극적인 삶의 주인과 문자를 통해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걸으며 세상의 부조리와 불합리에 치여 쓰러진 이들에게 공감하게 되고는 합니다. 살상자 오천 명 이라는 통계보다도 한 사람이 스러지는 삶을 집중 조명한 소설에 더욱 통감하며 공감하게 되는 게 바로 우리들이니까요.


책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별 과제가 있다면, 21세기 우리가 해내야 하는 것은 삶을 담은 책 한 권쯤 엮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의 삶을 평면적으로 드러내는 수필집이라도, 비유와 은유로 점철된 시집이나 소설집이라도, 그 어떤 거짓을 곁들여 자신을 포장하더라도, 자신의 삶으로 수집한 단어를 이용하여 책 한 권쯤은 적어봐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렇게 모인 문장들을 통하여 우리는 당신의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될 것이고, 조금 더 공감하게 될 것이니까요.


편파적인 신념이 얼마든 강화될 수 있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보와 문장을 흡수하는 것만으로는 단단한 땅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삶을 돌아보고 수집한 단어를 확인하고 다시 정의하여 자신만의 이야기를 정제하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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