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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Oct 11. 2022

수치심이 모멸감이 되지 않도록

셋, 책일기: 모멸감 

 친구들, 안녕한가요? 책일기 마감인 화요일이 여러분과 함께 하는 날이 된 것 같아서 좋아요. 아침부터 문자를 읽으며 하루를 시작했고, 자경님의 이야기에 마음이 철렁하다가, 또 서로를 응원하면서 가슴 따듯했어요. 게다가 지금까지는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며 꼭 읽어야만 하는 책을 읽었는데, 책일기를 위해서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 거 있죠? 책장에서 지금의 마음 밭에 꼭 뿌려주어야 하는 이야기를 집어 들었습니다. 김찬호 교수님의 <<모멸감>>이라는 책입니다.




 지난주 여러분의 책일기 주제는 “계속 쓰자”였죠? 고백할게요.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사실 저는 은근히 우쭐해졌었답니다. 왜냐면 저는 어쨌든 생업을 위해서 써야만 하는 사람이고, 계속 쓰는 것만큼은 꾸준히 해왔으니까요. 그래서일까요? 아주 잠깐의 우쭐함이 지나간 뒤로는 괴로움의 연속이었어요. 정말 계속 쓴다고 발전하게 되는 게 맞아?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거든요.      


타인(들)이 나에 대해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알고 있는데, 그것과 실제 자신과의 괴리에서 오는 긴장이 수치심인 것이다. (...) 자신의 처신이나 상황에서 불명예스럽거나 우스꽝스럽거나 불미스러운 것을 의식할 때, 혹은 자신의 품위나 체통을 훼손시키는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라고 정의 내린다.
-52     


 갑자기, 제가 지금까지 세상에 내보낸 모든 글이 떠오르며 부끄러워졌어요. 어설픈 실력이야 감출 수 없겠지만, 적어도 소설가였다면 사상이나 생각 따위만이라도 등장인물을 탓하며 그 뒤에 숨을 수 있었겠죠? 번역가라고, 편집장이라고, 스스로를 드러내며 글을 써온 탓에 숨을 방법조차 사라지고 만 거예요. 


 요즘 마크 트웨인의 글을 번역하고 있거든요. 미국 문학의 아버지. 미국의 셰익스피어. 수식어도 화려한 분이죠. 오랫동안 본인 자서전을 작업하셨는데요? 몇 번이나 갈아엎으셨어요. 어떤 글은 너무 감상적이거나 문학적이고, 어떤 글은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성이 없고, 또 어떤 글은 진부해서 여느 글과 다를 바가 없다면서요. 거장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써내기가 그토록 어려웠던 모양이에요. 


 언젠가 들었는데요. 삶은 마치 역행하는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 탄 것과도 같아서, 천천히 라도 걷지 않으면 제 자리에 조차 머무를 수 없다고 해요. 퇴보하는 거죠. 앞으로 나아가길 원한다면 조금씩 걷는 걸로는 부족하대요. 전력질주를 해야만 하는 거예요. 저는 과연,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을까요? 아니, 제가 뭐라고, 천천히 걸으며 교만한 마음을 가졌을까요?     


조롱으로 인한 모멸감은 자살에 이르게도 하지만, 정반대로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터져 나오기도 한다. 분노와 치욕감을 억누를 수 없을 때 선택하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해와 남을 해치는 것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둘 다 타인과 세상에 대해 앙갚음하는 것이다. (...) 다른 사람을 조롱하고 망신을 주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가장 잔인한 학대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굴욕을 강요하거나 부끄러운 부분을 까발리는 행위는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존엄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 178~179     

 언제나 발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우리는 언어와 글을 다루는 사람이죠. 언어도 글도 언제나 변화하잖아요. 그러니까 나아지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마음이 이토록 움츠러든 때면, 제가 쓴 글을 다시 돌아보기가 두려워져요. 조금의 비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한없이 공격적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건설적인 비판에는 원색적 비난으로 받아치고, 호의적인 칭찬은 빈말로 치부하며 자학적인 비난을 쏟아 내버리는 거죠. 나아지기 위해서는 현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잖아요?




 수치심은 느끼지만 모멸감은 느끼지 않는 사람이고 싶어요. 스스로에게 한껏 기대를 걸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올곧은 사람이고 싶어요. 그러나 수치심이 모멸감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지혜를 발휘하는 사람이고 싶어요.      


그것이 바로 도덕이다. 구성원들 사이에 명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공유되는 규범이 도덕이다. (...) 징계가 효과를 거두려면, 지탄의 대상이 된 사람이 주변 반응을 눈치 채고 사과하거나 행동을 수정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자신의 모습을 객관화 하면서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 매개 고리가 바로 수치심이고, 이는 사회가 원만하게 유지되기 위해서 구성원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감정이다.
-53     


 오늘 일기 내용과 책소개가 조금 동떨어지게 느껴지시나요? <<모멸감>>을 마지막으로 읽었을 때에는 사회 속에 남겨진 ‘나’에 관해서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제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해서 생각하게 되었어요. 수치심을 느끼는 이유는 제가 기대하는 저의 모습과 제가 깨닫게 된 저의 모습이 커다란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었어요. 가시가 돋는 이유는 저도 모르는 무의식 속에서 끝없는 자기 조롱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어요. 마음이라는 게 한결같지가 않아서, 마치 그 안에 작은 사회가 들어있는 것 같아요. 조금 이상한 말인가요? 


 깨달음의 종착지는 결국 여러분의 지난주 글과 같네요. 저는 어쨌든 계속 써볼 예정입니다. 쓰는 것뿐만 아니라 제가 쓴 글을 돌아보기를 멈추지 않을 거예요. 칭찬은 물론이고 비난이나 비평에도 계속해서 귀를 기울일 겁니다. 모든 피드백 속에 들어있는 씨앗을 찾아서, 발전하고야 말 테니까요. 고된 과정이겠지만, 여러분이 함께 해주시겠죠? 함께 쓰고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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