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책일기
친구들! 할레드 호세이니 작가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잊지 않으셨죠? 제가 우리 독서모임 지정도서로 선정했다가 다 같이 뜨악했던 그 벽돌책이요. 우리 독서모임이 ‘혼자서는 절대 읽지 않을 것 같은 책을 선정하고, 함께 읽어보자!’는 취지였지만... 차마 570쪽에 달하는 두께는 너무 놀라워서 ‘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으로 남겨두고 각자의 역량에 맞게 야금야금 숙제하기로 했었죠. 저도 몇 번에 쪼개어 읽다가 이제야 완독 했어요!
저는 이전에 호세이니 작가의 책 두 권을 읽었었고, 이번이 세 번째예요. 세 작품 모두 아프가니스탄이 배경이고, 벽돌 두께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리고 또 하나. 읽을 때마다 아프가니스탄의 실정에 놀라고 저의 무지에 실망했다는 거예요.
가끔 뉴스에서 내전, 탈레반, 빈 라덴 같은 단어들이 귀에 들렸고, 회색의 낮은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있는 마을을 무장 군이 점령하고 있는 몇 초간의 영상이 기억이 나요. 몇 번을 봤던 것 같은데 매번 비슷한 풍경이라서 일부러 같은 영상을 계속 보여주는 건가 했어요. 그게 다예요.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프가니스탄이 왜 매번 그런 풍경인 건지, 그곳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건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어요. 아니 이마저도 잘못된 질문이네요. 살아있다는 가정하에 질문을 하면 안 되네요. 도대체 사람들이 살아 있긴 한 건지, 모조리 죽은 건 아닌지 그걸 궁금해해야 맞는 것 같아요.
그들에게 전쟁이 들이닥쳤을 때 저는 7살이었어요. 갓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학교에 다녀오자마자 가방을 던지고 놀이터에서 놀고 온 대가로 오밤중에 꾸역꾸역 숙제를 했어요. 제가 고작 숙제 안 한 걸로 혼날까 봐 동동대던 그때, 같은 지구 다른 땅의 동갑내기 아이는 갑자기 떨어진 포탄에 공중으로 날아올랐던 아버지의 몸이 산산이 부서져서 몸통만 자기 눈앞에 떨어지는 광경을 목격했어요. 제가 날마다 배부른 투정을 부리며 중학생이 되는 동안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가족을 잃고, 삶의 터전을 잃고, 자신까지 잃어버린 채, 감히 산다고 말할 수도 없는 생지옥을 살아가고 있었어요. 죽지 않아 살아 있고, 껍데기만 움직이고 있었어요.
그녀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아남아 계속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 (...)
그리고 살아남았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벽돌 두께에 촘촘하게 담겨있는 문장들 중 저는 유독 이 문장을 몇 번 곱씹어 읽었어요. ‘살아남았다는 게’라니. 우리에게 ‘살아가는 것’은 유별나지 않은 것인데, 우리가 맞이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내일이라는 순간이 그들에겐 행운이 따르는 소수의 누군가에게만 주어지는 순간이라는 것이 충격이고 서글펐어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장편소설로 출간됐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설정일까요? 실제로 전쟁의 시련이 닥쳤고, 감히 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고통과 슬픔 속에서, 가족을 잃었을 거예요. 주인공의 이름과 관계 정도가 설정일까요? 주인공 마리암과 라일라가 이름만 가명일 뿐 실존하는 아프가니스탄 대다수 여성들의 모습을 확인한 것 같아서, 굳이 헤아리지 않아도 이 소설의 대부분이 ‘사실일 것 같다’가 아니라 ‘사실이다’라는 확신이 들어서 마음이 먹먹해요.
소설 속의 마리암과 라일라, 그녀의 가족들, 그녀의 자식들은 왜 전쟁을 겪어야 했을까요? 그들은 민간인이잖아요. 정치에 관여하지도 않았고, 무장군인이 총과 포탄을 들이대도 같이 맞설 무기도 없잖아요. 그들은 그냥 소소하게 벌어서 소소하게 먹고사는 평범한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왜 그들이 살육전에 고스란히 노출돼야 하죠? 누가 그들이 그런 참상을 겪도록 허락한 거죠? 그들의 생명인데 그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누가 자기들 마음대로 그들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거죠?
라일라는 옛날 무자히딘 로켓의 빈 탄환에 꽃이 심겨져 창턱에 놓여 있는 것을 본다. 사람들은 그걸 로켓꽃이라고 부른다. p556-557
어떤 말이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전쟁은 본 적도, 겪은 적도 없어 감히 추측 조차도 해볼 수 없는 그들의 깊은 상처. 그 상처를 안고 ‘살아남은’ 그들이 부디 찬란하게 ‘살아가길’ 바라요.
-유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