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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Nov 02. 2019

38. 창조적인 삶을 향해 나아갈 것

치앙마이 11_자기다움의 성취로 창조성을 끌어올려라

새터데이 나이트 마켓, 치앙마이, 태국




자신의 피를 담은 것만이 진짜다


불안감이 다시 엄습했다. 아침잠을 깬 직후의 침대맡이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드는 불안감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무게가 꽤 육중했다. 몸을 일으켜 불안감의 경로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맴도는 단서들을 거슬러 올라간 끝에 불안감의 진앙지에 도달했다. 그 한가운데에는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미래에 대한 공포였다. 


무난한 흐름을 보이고 있던 글 작업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바닥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붕 뜬 느낌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며 작업을 하는 듯한 형국이었으나 무엇이 그러한 현상을 조장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아침 불안감이 엄습하기에 이르렀다. 경력 단절의 두려움에 등 떠밀려 작업에 달려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작업의 양상이 다분히 수동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시원스럽게 뱉어내는 게 아니라 그림이 되겠다 싶은 글감을 선택해 그 그림 속에 생각을 끼워 맞추는 방식. 내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수면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말들을 낚아 올리려 했지만 작업의 흐름은 마음과 달랐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연료로 삼아 끼적인 글이 멀쩡한 모습을 보일 리 없었다. 불안에 쫓길수록 내 안의 진실은 점점 더 멀어져 갈 뿐이었다.  


나름대로는 작업에 시간 안배도 충분히 하고, 마음의 상태도 편안하게 만들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헛발질만 하고 있는 상태. 그때그때 내 안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옮길 때 말은 생명을 얻는데 반대 방향을 향해 생각 없이 걷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이번만 그런 게 아니었다. 글 앞에서 솔직하지 않은 순간이 그동안 너무 많았다. 마음속의 울림에는 귀 기울이지 않은 채 남들에게 듣기 좋고 보기 좋을 만한 얘기들을 그럴싸하게 포장해 진심인 양 선보인 적이 숱했다. 자신을 감동시킬 수 없는 말로 남들을 감동시킬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멍한 기분으로 과거를 반성하고 있을 무렵, 니체의 이야기가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우붓 생활 초기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다가 명치를 강타당한 말이었다. 


“나는 글로 쓰인 모든 것들 가운데서 오로지 피로 쓰인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인 것을 알게 되리라.” 


통렬한 일갈의 목소리. 굳어있던 인식에 금이 쩍 가는 소리가 내 안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나는 과연 '나'로 글을 썼는가? 그렇지 않았다. 사진 작업은 또 어떠한가? 영혼을 잠재워 둔 채 작업을 할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직업을 물어보면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는 얘기를 해왔다. 아득했다. 좌절의 경험을 핑계로 수년 간 내 글 쓰기를 피해 왔으니 노력마저 부족한 셈이었다. 그런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 이 시점에서 니체가 나에게 묻고 있었다. “너는 과연 너의 피로 글을 썼는가? 네 자신 전체로 부르짖었는가?”  


마음을 다잡았다. 그동안 쓰고 싶어 하던 글감이 있었다. 길 위에서 느끼고 깨달아 온 것들을 다른 여행자들과 나눌 목적으로 구상해 둔 글감이었다. 직업인으로서 꼭 해 내고 싶은 작업이기도 했다. 쉽지 않은 작업이라 오랜 시간이 걸릴 테지만 빠른 시간 내에 첫 발은 뗐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글감과 관련해 그동안 적어둔 메모의 양도 꽤 많았다. 그럼에도 주저하길 반복하느라 첫 운도 떼지 못한 채 여기까지 왔다. 재료를 잔뜩 모아 두고도 선뜻 시작하지 못하고 시간만 하염없이 흘려보냈기에 이번 기회를 빌려 포문을 열어 보기로 했다. 


첫 발을 내디뎠다. 예상했던 대로 작업의 흐름은 순탄치 않았다. 높은 완성도를 기대하지 않았음에도 자잘한 돌부리 앞에서 걸음이 주춤거리기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막힌다 싶으면 감각의 물꼬를 터 줄 만한 일들을 하며 감성을 자극하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다시 썼다. 니체의 말도 자주 떠올렸다. 나는 과연 나의 피로 글을 쓰고 있는가? 


욕구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글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 당장 어딘가에 기고할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완성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았기에 완벽한 형태로 마무리하기보다는 토대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행위 자체가 중요했기에 형태나 완성도에 구애받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휘갈겼다. 그러는 가운데 글이 하나둘씩 탄생했다. 대부분 몸통만 완성한 정도로 끝냈지만 필요한 시기가 오면 내용을 다듬어 꺼내 놓으면 될 것이었다. 


쓰면 쓸수록 글 작업에 점점 더 탄력이 붙었다. 처음에는 낱말과 문맥 앞에서 꼬이길 반복했던 걸음이 어느새 저 스스로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급기야는 진행 속도가 스스로도 놀랄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작업량이 내 생애를 통틀어 일일 최고 집필량에 육박하는 날이 이어졌다. 여행을 준비할 때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인지라 사이사이에 얼떨떨한 감정을 느끼길 반복했으나 그럼에도 기분은 좋았다. 아직 피로 쓰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글의 빛깔은 그 전보다 빨개진 듯했다.  


생활 속에서 벌이고 있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이 같은 흐름을 이끌어 주었다는 사실은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주변 환경을 안정시키려는 노력, 신체에 능동성을 불어넣기 위한 알람 사용 중단 결정, 솔직한 자기표현을 통해 묵은 감정을 뱉어내면서 그날 벌어진 일들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다음 국면을 차분히 준비하도록 도와주는 자동기술법 글쓰기, 무의식이 보내는 신호를 빌려 내면에서 벌어지는 작용들을 가늠해 보려는 꿈 기록, 자기 성찰을 통해 타율적 행위나 상투적인 발상을 삼가려는 노력, 부조리 앞에서 발동하는 저항심을 자유 의지로 전환하려는 시도, 생활에 생기를 불어넣을 목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일상 활동의 변주 등이 종합적으로 작동하면서 내 안에서 창조성이 가동되고 있었다. 이 순간을 마주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았다. 걸음을 뗐으니 계속 나아가야 할 것이었다.




# 창조성의 원리에 대하여

창조성의 원천은 자기다움이다. 자기다움의 실현을 통해 창조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얘기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태도, 스스로를 불신하는 마음, 자기에 대해 무지한 상태가 창조적인 삶을 유도해 줄리 만무하다. 생산성 향상의 원리가 넘쳐나는 시대지만 자기다움의 시도는 배제한 채 세간에서 유통되는 기술만을 활용해서는 창조성을 높일 수 없다. 자신의 책무 수행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 결과는 창조적이라 할 수 없다. 기계를 대신한 기능공으로서 조직이 원하는 성과를 창출했다거나 타인의 요구에 부응했을 뿐이다. 앞선 글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자기다움은 융 심리학이 제시하는 인간 성장의 최종 결실이다. 학계에서는 ‘개성화’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동일한 의미다. 자기다움 혹은 개성화는 무의식의 의식화를 통해 성취할 수 있다. 내 안에서 벌어지는 무의식의 움직임을 포착해 의식으로 동화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무의식은 꿈과 상상을 통해 수시로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온다. 타율에 맞춰져 있던 삶을 나 자신의 본성에 맞춰 바로잡을 수 있도록 돕는 신호들이다. 이를 예민하게 감지해 일상에 적용함으로써 창조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예술 작업, 일기 쓰기, 명상, 대자연 여행 등은 무의식의 활성화를 돕는 좋은 활동이다. 그 자체로 창조적이면서 무의식의 감지 능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의식적인 실천, 지속적인 실행이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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