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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Nov 06. 2019

41. 군중 속에서 나로 존재한다는 것

치앙마이 14_나는 나로서 오롯이 존재할 수 있는가

타패 게이트, 치앙마이, 태국




자족적인 삶은 그냥 오지 않는다


세계 10대 축제 중의 하나라는 쏭크란 축제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태국의 새해맞이 행사인 쏭크란 축제는 현지인들이 새해로 여기는 4월을 기해 전국에서 펼쳐지는 물 축제다.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그 기간에 맞춰 태국으로 원정을 올 정도로 성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새해 첫날, 전국 각지의 사원들에서 한해의 복을 기원하는 행사를 벌이고 나면 본격적으로 물 축제가 펼쳐진다. 수많은 인파가 버킷과 물총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서로에게 물을 퍼붓기 시작한다. 화물차의 짐칸에 커다란 물통을 싣고 다니며 인도에 선 이들을 향해 물을 퍼붓는 출장 물놀이단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인도 쪽에서도 만만치 않은 반격을 퍼붓는다. 대치 국면이 자주 벌어지지만 모두가 즐겁고 유쾌하다. 만인의 만인을 향한 기분 좋은 물세례가 거대한 장관을 이룬다.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쏭크란 축제 중 가장 각광받는 행사를 벌이는 도시는 방콕, 치앙마이, 파타야, 수코타이, 아유타야 등이다. 중소도시들에 비해 행사의 규모가 상당히 압도적이다. 쿠알라룸푸르의 다음 체류지로 치앙마이를 결정한 이유 중 하나도 쏭크란 축제였다. 방콕의 쏭크란은 경험해 봤으니 이번에는 치앙마이의 쏭크란을 경험해 보기로 했다. 구시가를 에워싼 사방 6km 길이의 해자에서 펼쳐지는 물놀이가 굉장하다고 들었는데 그 열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방콕의 쏭크란 축제는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당시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던 여행자들과 함께 축제를 즐겼다. 성능 좋은 물총도 사고, 소지품을 보호하기 위해 아쿠아백도 샀다. 물놀이의 대열에 뛰어들어 생면부지의 행인들과 물폭탄을 주고받았고, 맥주를 들이켜며 사방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물세례로 온몸이 흠뻑 젖기를 반복했지만 그래서 더욱 유쾌했다. 세찬 물세례 속에서 영혼이 깨끗하게 세탁되는 기분도 느꼈다.  


이번에도 그런 식의 참여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쏭크란 축제가 임박하니 그때만큼 흥이 오르지 않았다. 축제에 참여하지 말고 그냥 작업이나 할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외부의 흐름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축제의 현장 속으로 뛰어드느냐 마느냐를 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고민할 일도 아니었는데 며칠이나 고민을 반복했다. 


마음이 계속 오락가락하는 상태에서 축제 첫 날을 맞이했다. 오후 햇살이 뒷걸음질을 시작할 무렵이 되어 스쿠터를 몰고 주유를 하러 갔는데 주유소 앞에서 가볍게 물벼락을 맞았다. 주유소 앞에 서 있던 행인 하나가 주유를 마치고 스쿠터에 가속을 붙이려는 나를 향해 버킷으로 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축제의 첫날에는 제의와 거리 퍼레이드 등 행사의 의미를 기리는 일정이 집중되기 때문에 물놀이는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첫날부터 물세례를 받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갑작스레 닥쳐온 물벼락이어서 당황스럽거나 짜증스러우리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기분이 유쾌했다. 몸을 적셔 온 물방울들이 감각 세포를 건드린 듯했다.  


본격적인 물놀이가 시작되는 둘째 날. 숙소 인근의 식당에서 점심을 들고 숙소로 다시 돌아오는데 이번에는 길 건너편에서 트랜스젠더들의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달리는 트럭의 짐칸에 타고 있던 트랜스젠더 십여 명이 일제히 차에서 내려 거리를 강타하고 있는 음악에 맞춰 춤판을 벌인 것이었다. 전날 느닷없이 쏟아진 물벼락으로 감각이 가볍게 일깨워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흥이 오르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눈 앞에서 벌어지는 트랜스젠더들의 쇼를 구경하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욕구가 올라온 김에 쉬엄쉬엄 축제를 돌아보기로 마음을 정하고는 곧바로 숙소로 돌아가서 카메라를 가지고 나와 트랜스젠더들의 퍼레이드를 사진 찍었다.  


이후 일대의 뒷골목들을 돌며 어떤 방식으로 축제에 참여할지를 생각했다. 한참을 골똘히 고민한 끝에 이번에는 군중의 무리에 섞이지 않고 내 감정과 욕망을 따라 자족적으로 축제를 즐겨 보기로 결정했다. 축제의 한 복판에서 자유를 부르짖는 경험은 방콕에서 했으니 이번에는 그때와 다른 경험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느긋한 걸음으로 축제장을 돌아다니면서 축제의 본질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기로 했다. 축제의 바람직한 역할이 무언지도 추론해 보고 싶었고, 그동안 경험했던 세계적인 축제들과 쏭크란 축제의 차이점도 가늠해 보고 싶었다.  


축제의 현장을 며칠간 돌아다녀야 하니 물총이라도 하나 사서 들고 다녀야 할 것이었다. 수압 좋은 물총으로 사방을 휘젓고 다니던 방콕에서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물세례에 맞불을 놓으려면 물총 정도는 갖춰야 할 터였다. 그런데 물총 좌판 앞에서 발걸음이 멈칫거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혼자서 맨손으로 돌아다니는 모양새가 처량해 보일 것 같아서 떠올린 발상이었다. 피식 웃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에는 타인의 시선에 위축되지 말고 당당하게 축제장을 누벼 보기로 했다.  


둘째 날 오후. 물세례를 맞으며 길을 걷다가 현지에서 사귄 친구인 제이가 저 앞으로 보였다. 자신이 일하는 상점 앞에서 동료 직원들과 함께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시내 어딘가의 스포츠 의류 매장에서 일한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숙소 바로 근처인지는 몰랐다. 혼자 축제를 즐기고 있는 나를 본 제이가 자신의 무리에 합류하라고 권해 왔다. 지인들과 짝을 지어 다니는 대다수의 축제객들과 달리 혼자서 허랑하게 거리를 지나고 있던 내 모습이 안돼 보였나 보다. 마음은 고마웠지만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전했다. 순간은 즐겁겠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끼어들 수 있는 무리는 이미 곳곳에 넘쳐났다. 그중 하나를 택해 합류하거나 이 무리에서 저 무리로 자리를 옮기며 축제를 즐겨도 됐다.  


각오는 다부졌지만 독자적으로 축제를 즐기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축제 기간 내내 내적인 갈등을 겪어야 했다. 집단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안전한 기분을 누리고자 하는 욕구와 자족적 참여를 통해 좀 더 단단해지고자 하는 욕구가 내면에서 팽팽하게 대치했다. 계획한 방향을 고수해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떼 지어 다니며 행복에 겨워하는 무리들 앞에서 이따금 부러움이 이는가 하면, 다음 목적지를 정하지 못해 헤매는 현상이 이어졌다. 국가 전체가 들썩이는 세계적 축제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며 나만의 방식으로 행사를 즐기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자족적인 태도로 축제를 즐기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삼삼오오 떼 지어 다니는 축제객들의 표정 위로는 희열이 사정없이 번져나갔다. 




# 군중 속에서 자기 돌아보기

자족적으로 축제에 참여하려는 시도는 여가에 대한 사색이 깊어지는 과정(앞선 연재글 ‘여가가 대관절 무엇이기에’ 참고)에서 이루어졌다. 국가적인 문화행사이면서 태국 최고의 연휴인 쏭크란이기에 그 한복판으로 뛰어들어가 군중이 뿜어내는 열기를 직접 겪으며 여가와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를 고민해 보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대열에 휩쓸리지 않고 내 욕망에 근거해 행동하는 연습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립적인 여가 운용의 단초도 발견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절반은 성공했고, 절반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이때의 시도는 몸에 깊은 경험을 각인시켰다. 세계적인 축제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고수해 보려는 발상이 엉뚱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군중 속에서 나 자신으로 오롯이 존재하려는 시도는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날지라도 값진 경험이 된다. 더욱이 인간 삶의 원형적 상징들이 넘쳐나는 축제는 경험의 강도도 높다. 자극이 큰 만큼 같은 현상을 두고도 더욱 격렬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세계 문화 체험의 귀중한 기회인 쏭크란 축제를 굳이 선택할 필요는 없겠다. 무엇이 되었든 거대한 군중의 틈바구니에서 고요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도를 한 번쯤 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40. 여가가 대관절 무엇이기에

https://brunch.co.kr/@youngjincha/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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