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영진 Jan 05. 2019

8. 거리 예술가가 되기로 했다_리가, 라트비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 줄 그땐 몰랐지

거리 연주 중인 소녀 예술가, 구시가, 리가, 라트비아




그동안 찍은 여행 사진들 중 일부를 복수 인화해 여행길에 올랐다. 바쁜 와중에 급히 고르느라 최고의 사진들로 엄선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아끼는 사진들 중에서 간추린 것들이었다. 그중 일부는 전시회에도 내건 작품들이었다. 사진을 들고 여행길에 오르기는 처음이었는데 일부는 거리에서 판매를 시도해 보고, 나머지는 뜻깊은 인연이나 고마운 이들에게 선물로 주기로 했다. 사진 판매는 경제적 자립의 문제를 고민하다가 떠올린 아이디어였다. 잘 팔리면 좋겠지만 안 팔려도 그 자체로 유익한 경험이 될 듯했다. 


첫 시도를 감행한 곳은 여행의 시작점인 헬싱키였다. 한국에서 사진을 인화할 당시만 해도 흥미로운 체험이 될 듯해 신이 났는데 막상 거리에 좌판을 깔려니 긴장이 몰려왔다. 타향만리에서 홀홀 단신으로 일을 벌여야 한다는 자각이 자신감을 한껏 위축시키고 있었다. 방구석에 앉아서 생각할 때는 까짓것 싶었던 거리 판매가 생각보다 훨씬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현장에 와서야 깨닫는 기분이 아찔했다. 저질러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지만 막상 시도하려니 도저히 엄두가 안 나 도심을 몇 바퀴 돌며 숨을 골랐다. 물색해 둔 자리로 돌아와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한 후 용기를 쥐어짜며 좌판을 깔았다. 수많은 시민들이 오가는 에스프라나디 공원의 나무 그늘 아래였다. 


복지의 요람이라는 핀란드여서 기대가 컸다. 생활이 안정되면 물심양면으로 여유가 생기는 법이니까 말이다. 의식 수준이 높은 사회는 예술을 독려하는 풍조가 자리잡혀 있다고 들었다. 세계 최고의 시민 의식을 자랑하는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니 사진들을 향해 은근한 쇄도가 있으리라는 기대였다. 지성과 교양으로 가득한 핀란드에서조차 예술이 충분히 대접받지 못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너무 절망적일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아끼는 사진들에 더해 전시회에 내건 작품들까지 들고 왔으니 이제 환한 표정으로 핀란드 시민들을 맞이하는 일만 남았다. 당일 숙박비 이상은 팔리겠지 싶어 남은 돈으로 뭘 할지를 고민하며 사진들을 좌판 위에 진열했다.


에스프라나디 공원, 헬싱키, 핀란드


용기를 내 좌판을 깔았으니 이제 시민들이 다가와 줄 일만 남았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 완전히 달랐다.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하며 지나가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부푼 가슴을 안고 일을 벌였다지만 막상 사진을 진열한 후에는 마음을 깨끗이 비웠더랬다. 성황리의 판매는 개인적인 바람일 뿐, 그보다는 경험 자체에 의미를 둘 생각이었다. 힐끔거리는 시선으로 저쪽에서부터 다가오던 행인들은 좌판 근처에 이르면 고개를 재빨리 돌렸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인상이 역력했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시선을 던지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얼결에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그 눈동자 위로 경계심이 번득거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들 역시 마케팅이라는 이름으로 고급스럽게 포장한 낚시질부터 도발적인 영업 행위에 이르기까지 영악한 장사질에 오래도록 시달려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모종의 술책이 그 뒤에 숨어있음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눈빛들이었다. 혹여 좌판에 다가섰다가 판매자의 상술에 휩쓸려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되지 않을까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라도 와서 기분 좋게 감상하기만 하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별 욕심 없이 편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은 다가오지 않았다. 노년 여성 한 명이 잠시 관심을 보이다가 떠나간 게 다였다.


씁쓸한 표정으로 시대의 환부를 헤아리고 있는 와중에 갈매기 한 마리가 머리 위에서 똥을 휘갈기고 지나갔다. 사진 3점에 똥 덩어리가 크게 퍼졌고, 나머지 사진들에도 똥 조각이 잔뜩 튀었다. 추레하게 앉아 있다 보니 안 그래도 위축된 상태인데 예상치도 못한 각도에서 카운터 펀치가 날아들었다. 갈매기가 항문으로 날린 듣도 보도 못한 따귀 한방에 애써 다진 의지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힐끔거리는 시선의 포화를 받으며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한 장도 팔지 못했다. 


좌판을 정리하면서 행위의 방향을 전환하기로 마음먹었다. '판매'에서 '공유'로 말이다. 상품을 파는 노점상에서 여행하면서 사진전을 여는 예술가로 변신하기로 한 것이다. 행인들의 반응을 지켜본 바, 전략적으로 접근하면 판매 성과를 높일 수 있겠다 싶었지만 소비 심리를 자극하는 상품보다는 마음을 위로하고 정화시켜 주는 예술 그 자체가 이 세계에 더욱 필요해 보였다. 이국 시민들의 주머니를 위협해 긴장감을 부추기기보다는 그간의 여행들에서 마주친 아름다운 장면들을 조건 없이 공유하는 편이 더 의미 있는 일일 듯했다. 


도움 받을 곳 하나 없는 대륙이니 전시할 공간이라고 해 봐야 거리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여건이 허락할 때마다 전시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근로 비자 없이 현지에서 돈벌이를 하려니 찜찜한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마음의 부담 하나를 덜었다. 법으로 거리 예술가의 활동을 가로막는 일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된 듯했다. 혹시나 몰라서 귀국 전까지의 판매 목표는 1점으로 정했다. 행인이 먼저 구입 의사를 밝혀올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성공하면 좋고, 실패하더라도 상관없는, 사실상 장난 삼아 내건 목표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를 걷었다. 똥 덩어리에 직격 당한 사진과 똥 조각이 눌어붙은 사진까지 재활용이 불가능해 보이는 사진들을 한데 모으니 양이 적지 않았다. 몽땅 쓰레기통에 버린 후 걸음을 옮겼다. 보이지도 않는 내 뒷모습이 한껏 측은해 보였다.


그다음 여행지였던 에스토니아의 탈린에서도 거리 전시를 시도했다. 인력거 기사 다닐과 함께 도심을 구경하고 다니다가 좌판을 펼쳤다. 행인들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거리 사진전'이라는 글자를 종이에 크게 써서 내걸었다.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편히 구경하라는 얘기만 했다. 재기발랄하고 거침없는 다닐이 곁에서 활기찬 움직임으로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접근해 오는 사람에게만 응대를 하는 나와 달리 다닐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행인들에게 감상을 권했다. 역시나 탈린에서도 눈이라도 마주칠라 치면 부리나케 시선을 회피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판매의 욕심을 비우고 나니 오히려 그러한 반응 하나하나가 흥미로운 느낌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인간의 심리와 현대 사회의 단면을 탐구한 좋은 시간이었다.


핑거스타일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효도르, 구시가, 리가, 라트비아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도 거리 사진전을 열었다. 이번에는 우연히 만난 벨라루스 출신의 핑거스타일 기타리스트 효도르와 함께였다. 시각 예술이자 전시 장르인 사진과 음향 예술이자 공연 장르인 음악을 하나로 묶어 종합적인 형식으로 거리 예술을 펼쳐보기로 뜻을 모은 것이었다. 장소는 자유 기념탑 광장으로 정했다. 돗자리 위에 사진을 전시한 내 옆에서 효도르가 음향 세팅을 마쳤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곧이어 그의 손가락 위에서 음표들이 뛰놀기 시작했다. 콜라보레이션 파트너인 나를 위해 신청곡을 연주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함께하는 동안 나는 그의 연주를 응원했고, 그는 나에게 음악으로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연주에 관심을 보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내 사진에 관심을 보였다. 연주로 쏠렸던 관심이 사진으로 몰리는가 하면, 사진을 구경하다가 연주로 시선을 돌리는 현상도 생겼다. 돗자리 앞에 쪼그리고 앉아 사진을 구경하다가 나를 향해 진지하게 대화를 걸어온 이도 있었다. 


그러던 중 젊은 청년 한 무리가 내 사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여 왔다. 판매도 하느냐고 묻기에 판매보다는 전시에 주력하고 있다고 대답했더니 그들이 간절한 눈빛으로 판매를 청했다. 원하면 그렇게 하겠다는 의사를 표하며 대신 정해진 가격이 없으니 알아서 달라고 얘기하자 그들이 분주하게 동전을 모으기 시작했다. 곧이어 자신들이 물망에 올린 사진들 중 최종 선택을 두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주변에 있던 이들도 시민 논객의 자격으로 끼어들어 저마다의 의견을 개진했다. 집단 지성을 활용해 합의를 마친 그들이 동전을 내밀며 나에게 물었다. "여러 개가 마음에 드는데 한 장만 더 주면 안 될까?" 아까보다 더 간절한 표정. 그렇게 하라고 했다. 다시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패널들보다 시민 논객들의 목소리가 더 컸다.


신중하게 고른 두 컷을 손에 쥔 그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내 사진이 그렇게까지 훌륭한지는 의문이었지만 흥분하는 그들을 향해 내 작품을 험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기념 촬영을 청하기에 저스틴 비버가 팬들에게 휩싸인 모습을 떠올리며 카메라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들이 준 동전의 합계는 1유로 50센트였다. 한화로 약 2000원. 거기서 인화 비용을 제외하니 시내버스 1회 탑승권 반 조각을 살 수 있는 돈이 순수익으로 남았다. 각각의 사진들을 담아내기 위해 들인 비용과 노력에 비하자면 하잘 것 없는 성과였으나 그래도 그들 덕분에 시내버스에 다리 한쪽을 실을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귀국 전까지 1점 판매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수치상으로는 큰 손해였지만 사진을 곱게 챙겨 넣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속에서 뜻밖의 성취감이 스물스물거렸다. 뭔가 더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내면 어딘가에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거리 전시회를 구경 중인 행인들, 구시가, 리가, 라트비아


돔 광장, 구시가, 리가, 라트비아


성 베드로 성당(St. Peter's Church)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구시가, 리가, 라트비아






매거진의 이전글 7. 주체성을 배우는 나날들_리가, 라트비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