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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Jan 06. 2019

9. 느끼고 뛰어들고 헌신하는 남자_리가, 라트비아

동시성의 작용으로 시작된 신묘한 인연

리가발 유르말라행 열차 안, 라트비아




기묘한 아침이었다. ‘호프 포 칠드런’의 간사 율리아나의 소개로 현지 카우치서퍼의 집에서 며칠간 머물게 되었는데 어느 날 아침 담배를 피우러 뒷마당으로 내려갔다가 같은 건물 1층에 사는 사내를 마주쳤다. 그 역시 담배를 피우러 뒷마당으로 나온 참이었다. 우리 둘 사이에 접점은 전혀 없었다. 그는 그대로 저쪽에서 담배를 피웠고, 나는 나대로 이쪽에서 담배를 피웠다. 양쪽 다 상대에게 말을 건넬 이유가 없었고, 그럴 만한 빌미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담배를 피우다가 각자의 거주 공간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몇 미터 거리를 두고 잠시 눈길이 마주친 순간 대화가 움텄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의 이름은 야니스. 오케스트라 지휘를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다. 차분한 말투와 부드러운 표정이 편안한 느낌을 선사했지만 그만큼 예민한 인상이었다. 이따금 짓는 웃음이 아름다웠는데 미소를 머금은 그 표정 너머로는 깊은 고요가 흘렀다. 가볍게 시작한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이 나도 모르게 ‘I am a forest’ 프로젝트를 그에게 설명했다. 일정한 소통이 이루어진 후라야 프로젝트를 언급하겠다는 방침을 유지해 오고 있었는데 뒷마당을 에워싼 묘한 기류가 내 입을 움직였다. 대화는 흡연의 종료와 함께 끝났다. 둘 다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한 시간 후 야니스는 멋진 그림이 프린팅 된 종이 한 장을 들고 뒷마당으로 나왔다. 그 뒷면에 ‘I am a forest’라는 글귀와 자신의 이름을 자필로 적은 상태였다. 스치듯 대화를 나눈 이의 사진 프로젝트에 선뜻 참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깊이 소통했던 이들보다 훨씬 훌륭한 준비 상태로 등장했다. 메시지를 적을 종이를 세심하게 고르고, 상상력을 가미해 글씨를 적어 온 데에서 그가 얼마나 섬세한 감각의 소유자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고감도의 더듬이로 상황의 본질을 읽어낸 듯했다. 야니스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온 덕분에 작업은 순조로웠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첫 번째 사례여서 작업이 더욱 뜻깊었다.


야니스가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작업을 마무리한 후에야 들었다. 나를 만나기 직전까지 야니스는 잠을 자고 있었는데 눈을 뜨기 직전 이상한 꿈을 꾸었다. 스스로를 “나는 자연이다”라고 대외적으로 공표하면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격정적으로 애를 쓰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몸부림을 치다가 잠에서 깼고, 곧이어 담배를 피우러 뒷마당으로 나왔다가 나를 만났다. 예지몽이었다. 스스로도 신기한 경험이라고 했다. 자석에 이끌린 듯 흘러간 과정을 떠올리자니 기분이 묘했다. 꿈, 직감, 환상 등의 내적 현상이 외부에서 동시적으로 현실화된다는,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동시성이 작용한 듯했다.


야니스와 마주쳤던 숙소 뒷 마당, 리가, 라트비아


이튿날 오전, 야니스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리가 인근의 휴양지인 유르말라에 동행하기로 약속을 잡아 놓았다. 야니스는 동이 터올 무렵에야 잠을 청해 점심 언저리에 일어나는 생활을 했다. 중요한 일들은 대부분 심야에 한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자정 이후에 창조성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듯했다. 잠이 들면 심연으로 깊이 잠긴다기에 그가 잠에서 깨어 메시지를 보내올 때까지 기다렸다. 감각이 고도화된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을 고스란히 지닌 야니스였다. 이제껏 만난 이들 중에서 섬세함으로는 단연 발군이었다. 정오가 가까워 올 무렵, 그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방금 일어났는데 컨디션이 좋다는 전갈. 한 시간 후, 뒷마당에서 만나 유르말라로 향하기로 했다.


열차로 30분을 달려 도착한 유르말라는 아기자기하면서도 호젓했다. 상점과 카페가 자리한 중심가를 구경하다가 해변으로 자리를 옮겨 여유를 즐기기 시작했다. 보라카이풍의 황홀한 바다는 없었지만 아득한 수평선과 한가로운 표정의 피서객들이 마음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내가 여행 수첩을 기록하고 주변 경치를 감상하는 동안 야니스는 낮잠을 잤다. 쉽게 잠에 빠져들어 고요하게 수면을 즐기는 모습으로 미루어 무의식의 작용이 왕성한 듯했다. 야니스가 잠에서 깨어난 후에는 분위기 좋은 해변 바에서 생맥주를 마셨다. 동양 사상에 관심이 많다기에 한때 탐독했던 경험을 더듬으며 생각나는 것들을 그에게 이야기해 주었는데 과학적인 사고관을 지닌 서양인임에도 낱낱의 내용을 상당히 정교하게 감지하는 모습이었다. 열린 영혼을 만난 듯했다.


해변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현지 시민들, 유르말라, 라트비아


저녁에는 야니스의 집에서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식사를 시작하려던 찰나, 야니스의 옆 방에 사는 마르틴스라는 친구가 주방을 지나치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냐고 묻기에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해 주었더니 흥미로운 표정으로 질문을 이어왔다. 내가 합류를 권하자 마르틴스는 기다렸다는 듯 식탁에 앉았다. 야니스와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묻기에 ‘I am a forest’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더니 상당한 관심을 보여 왔다. 저녁 식사 후에는 자리를 마르틴스의 방으로 옮겼다. 무대 감독이자 즉흥 기타 연주자인 마르틴스가 자신의 연주를 제대로 들려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서너 곡을 연달아 이어간 그의 연주는 무척 역동적이었다. 또한 실험적이기도 했다. 내가 좋은 느낌을 받았다고 얘기하자 마르틴스가 조만간 ‘숲’을 주제로 곡을 만들고 연주해 프로젝트에 헌정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리가를 떠나기 전날에는 마르틴스의 방에서 하룻밤을 났다. 원래는 야니스의 방에서 자기로 했는데 손해 보는 걸 끔찍이 싫어한다는 야니스의 룸메이트가 딴지를 걸어 긴급히 잠자리를 옮겨야 했다. 야니스의 룸메이트는 야니스와 한 공간을 공유하지만 침실은 따로 사용했다.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자정이 넘어서 잠자리에 들 계획인 나와 부딪힐 일은 없었다. 게다가 그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사랑을 제일의 가치로 삼는다는 크리스천이었다. 소문을 듣자 하니 아주 독실하다는 것 같았다. 그의 딴지를 접한 야니스가 불편할 일 없는 상황에서조차 저럴 줄은 몰랐다면서 혀를 내둘렀다. 급작스럽게 잠자리를 마르틴스의 방으로 옮긴 대신 야니스가 푹신한 매트리스를 공급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야니스는 작업 중인 악보를 보여 주었다. 야니스도 ‘숲’을 주제로 기악곡을 작곡해 프로젝트에 헌정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이미 작업을 시작했단다. 마저 작업한 후 부분적으로 수정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얼굴 위로 풍부한 표정이 감돌았다. 세간에서 얘기하는 완성도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마음이 전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작업했으면 좋겠다는 내 이야기에 야니스의 표정이 환해졌다. 야니스의 성향으로 미루어, 내면의 조화를 잘 유지하면 어떤 작품이 튀어나오든 훌륭할 듯했다.


 

기타로 즉흥 연주를 하는 마르틴스와 드로잉을 하는 야니스, 공용 부엌, 리가, 라트비아


다음날 점심이 되어 리가를 떠나기 위해 짐을 정리하는데 야니스가 식사를 준비했다며 나를 불렀다. 식탁 위에는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요리가 놓여 있었다. 음식 하나를 두고도 창의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역시 예술가다웠다. 답례로 젓가락과 포크를 음식 주변에 얹어 만세를 부르는 사람의 모습으로 둔갑시켰다. 훌륭한 응답이라며 야니스가 활짝 웃었다. 


집 앞에서 작별을 해도 충분하건만 야니스는 터미널까지 배웅을 나왔다. 작별 포옹을 하고 버스에 오르려는데 야니스가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긴 여행 잘하라면서 밤새 준비한 물품들이었다. 차가 곧 출발할 예정이라 내용물을 제대로 확인할 새 없이 감사 인사만 전하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리가 시내를 벗어날 무렵, 쇼핑백을 열었다. 그런데 내용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수많은 물품들이 저마다의 의미를 간직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니스가 직접 싼 도시락, 프링글스, 찐 계란 2개, 간이 접시 2개, 숟가락, 젓가락, 포크, 두 가지 종류의 비닐봉투, 몇 종류의 의료 밴드, 반팔 티셔츠, 긴팔 셔츠, 작별 인사를 적은 꽃 디자인 카드, 빨간 양초에 이르기까지 10인용 선물 세트로도 손색없는 물품들이 들어 있었다. 어느 하나 고맙지 않은 게 없었다. 


그중에서도 긴팔 셔츠는 충격이었다. 전날 야니스가 입고 있던 옷이었기 때문이다. 잘 어울린다는 의미로 “그 옷 마음에 든다”고 얘기했는데 그걸 기억해 두었다가 긴팔 셔츠마저 쇼핑백에 집어넣었다.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충분히 알 텐데 긴팔 셔츠까지 집어넣었다. 반팔 티셔츠 한 장 정도야 서로에게 기분 좋은 선물일 수 있지만 살림 빠듯한 젊은 예술가의 몇 벌 안 되는 애장복이라니. 낯선 도시를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골이 띵해졌다.


건반 악기가 중앙에 배치된 야니스의 방, 리가, 라트비아


시가지에 예술의 기운을 불어넣고 있는 거리의 악사들, 자유 기념탑 광장, 리가, 구시가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19th 퍼포머

: Rozkalnu Janis


- 국적: 라트비아

- 촬영지: 리가, 라트비아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대자연'이라고 공표하며 안간힘을 쓰는 꿈을 꾼 직후 자신이 사는 건물의 뒷마당으로 나왔다가 나를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로부터 1시간 후 프로젝트 촬영을 한 야니스. 동시성의 작용으로 이루어진 인연인 만큼 리가를 떠나온 후에도 야니스와의 연대는 끈끈했다. 연락을 주고받지 않을 때에도 야니스와 닿아 있는 기분을 자주 느꼈다. 그러다가 연락을 닿으면 그 기분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실감케 하는 대화가 오고 갔다. 야니스와는 지금도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야니스가 보내오는 메시지들 속에서 그의 섬세한 결을 낱낱이 느끼곤 한다.



30th 퍼포머

: Valerie


- 국적: 라트비아

- 촬영지: 유르말라, 라트비아


야니스와 함께 리가 인근의 해변 도시인 유르말라에 갔다가 기차역 앞 작은 노점의 아가씨에게 길을 물었다. 응대하는 태도가 무척 상냥하기에 보답 차원에서 아이스크림 두 개를 샀다. 대가 없는 호의가 또 다른 호의를 유도한 것이다. 저런 친구가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얘기를 야니스에게 했다. 좋은 생각이라며 맞장구를 친 야니스가 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섭외를 시도했다.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을 전해 들은 그녀가 신선한 프로젝트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숲을 만드는 프로젝트에서 도미노 현상이 벌어지는 장면을 구경하는 기분이 묘했다.



31st 퍼포머

: Martins Zarins


- 국적: 라트비아

- 촬영지: 리가, 라트비아


무대 음악 작곡가이자 즉흥 기타 연주자인 마르틴스는 프로젝트 촬영을 마무리한 직후, 방에서 기타를 꺼내 왔다. 자신의 즉흥 연주를 들려주겠다는 것이었다. 공용 주방을 아늑하게 채웠던 연주는 그의 방에서도 한참 동안 이어졌다. 역동적인 감성을 실험적으로 풀어낸 연주가 듣기에 좋았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곡을 만들어 녹음해 주고 싶다고 이야기한 마르틴스는 며칠 후 숲으로 가서 즉흥 연주를 펼치고 그 내용을 녹음해 인터넷에 올렸다. 소개글에는 한국인 여행자 차영진이 숲 보호를 위해 펼치고 있는 'I am a forest' 프로젝트에 헌정한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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