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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Jan 07. 2019

10. 사랑한다면 이들처럼_시굴다, 라트비아

시간마저도 숨죽이며 바라보던 풍경

시굴다성 입구에 조성된 정원, 시굴다, 라트비아




부부가 단 둘이 사는 가정으로부터 메시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잠자리를 제공할 테니 오라는 것. 시굴다에 사는 이에바와 마리스 부부였다. 현지의 가정생활이 궁금했던 터라 오감을 점등하며 열차에 몸을 실었다. 한 시간 이상을 헐떡이며 달려온 열차가 발뒤꿈치를 앞으로 내밀며 지면과의 마찰로 제 몸을 정지시켰다. 짐을 메고 플랫폼으로 나서자 맑은 공기가 폐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현지인들이 자국의 스위스로 여긴다는 가우야 국립공원의 관문 시굴다다운 환영 의전. 이제 그들의 집을 찾아 나설 차례였다. 앞뒤로 멘 배낭과 카메라 가방은 무거웠지만 마을이 선사하는 호젓한 정취에 취해 힘든 줄 모르고 걸었다. 높은 건물이라고는 하나 없는 하늘 넓은 마을을 거니는 기분이 아주 흡족했다.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는 전원주택들을 하나하나 헤아리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그들의 집 앞. 현관문을 열고 나온 이에바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나를 반겼다.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이에바가 마리스에게 수영을 하러 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마리스가 장난기를 머금은 눈빛으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바가 함께 가겠느냐고 나에게도 묻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지역민의 삶을 경험하게 해 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차량이 도착한 곳은 시굴다의 북단을 가로지르는 가우야강의 한쪽 어귀였다. 잔뜩 들떠 있던 이에바는 강변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겉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강으로 뛰어들었다. 자상한 눈빛으로 이에바의 행동을 주시하던 마리스도 천천히 강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정경이 더없이 평화로웠다.


두 사람의 직업은 엔지니어와 화가. 아내인 이에바는 직장에서 빅데이터를 분석했고, 남편인 마리스는 집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림 외에 가정에 필요한 가구와 소품도 만든다고 했다. 두 사람이 사는 집은 우리식으로 말하면 빌라였는데 그들은 아파트라고 불렀다. 얼마 전, 두 사람은 마을 반대쪽의 커다란 목재 가옥을 매입했다는데 이에바가 직장 생활을 하는 낮 시간에 마리스는 새로 산 집을 수리했다.


이에바와 마리스가 장만한 새 집, 시굴다, 라트비아


이튿날 오후, 마리스를 따라 새 집으로 향했다. 보수 작업을 도우려는 것이었다. 새 집에 도착해서 보니 청소가 한창인 건물 내부는 물론 대대적인 정리 작업을 요하는 넓은 마당에 이르기까지 할 일이 많아 보였다. 전체 상태를 쭉 훑어본 마리스가 대형 전지가위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오늘은 사내가 둘이니 힘을 쓰는 작업을 하자는 것. 곧바로 마당 한쪽에 어지럽게 쌓인 나무 더미를 전지가위로 해체하기 시작했다. 내가 나무를 운반하기 좋은 크기로 자르면 마리스는 그걸 마당 바깥쪽으로 옮겨 가지런히 쌓았다. 절단 작업을 끝낸 후에는 남은 나무더미를 마리스와 함께 운반했다. 한참을 낑낑거린 끝에 잡목 정리 작업을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저녁에는 한국 요리를 만들어 그들에게 대접했다. 이에바는 계란 흰자를 못 먹고, 마리스는 채식을 한다기에 부침개를 만들었다. 레몬 과즙, 간장, 설탕 등을 버무린 소스와 함께 중형 피자 크기로 부친 부침개를 사람당 1장씩 접시에 담아 내놓았는데 두 사람은 꽤 맛있게 먹었다. 한국에서는 부침개를 사람당 1장씩 끼니 삼아 먹는 일이 없지만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부침개는 한국에서 아주 대중적인 요리라는 점만 그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에바와 마리스는 내가 그동안 만난 부부 중 나이 차이가 가장 컸다. 마리스가 오십 대 중반이고 이에바가 서른 언저리였으니 25세가량 차이가 났다. 카우치서핑 사이트에서는 이에바가 자신의 계정을 이용해 활동했는데 프로필에 두 사람의 이름을 모두 적고 나이 항목에 두 사람의 평균 연령을 기재해 두었다. 부부이니 평균 연령을 적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힘주어 말하는 이에바를 마리스는 귀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한 은행이 자산을 무기 제조에 투자한 데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지방법원 앞 마당에 모민 마을 주민들, 시굴다, 라트비아


이에바가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면 두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아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공학도 출신인 이에바가 마리스의 이야기를 꼬치꼬치 파고들면서 논리적으로 반박을 하면 예술가인 마리스는 느긋하지만 재치 있는 언변으로 이에바의 도발을 뒤엎었다. 성인 간의 부부 생활이라지만 소년, 소녀의 소꿉장난 같아 보일 때가 많았다. 다시 이에바가 꼬투리를 잡고, 마리스가 그것을 무화시키기를 반복하다가 어떤 접점에 이르러 두 사람은 동시에 폭소를 터트리며 서로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눈맞춤은 한참 동안 이어졌는데 그럴 때마다 시간이 영원처럼 아득하게 흘렀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따금 나이의 무게에 짓눌리곤 했다. 그럴수록 형식만 두터워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이 개념을 떨치기가 쉽지 않았다. 커다란 나이 차에 대한 오래된 선입견도 더러 기승을 부렸다. 두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25세 차이의 사랑은 텔레비전에서나 나오는 이색적인 일일 뿐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다정한 부부 생활이 내 고정관념을 부침개 뒤집듯 시원스럽게 뒤집었다. 아무리 보아도 이상할 게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또래가 결합한 커플 중에서 이들 두 사람만큼 안정적이고 애틋하게 사랑을 이어가는 커플은 내 주변에 많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특성을 존중하며 전 존재로써 삶을 공유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저녁 담소에 끼어들어 인생의 사연을 서로 뒤섞던 어느 날이었다. 여행의 이유를 설명하다가 ‘I am a forest’ 프로젝트를 언급하게 되었다. 프로젝트가 한국에 있는 동료 예술가와의 협의를 거쳐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평창 동계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 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하는 사태에 가늠좌를 맞춰 이듬해 여름에 예술 캠핑 축제를 가리왕산에서 벌이기로 한 것이다. 프로젝트의 결과물 역시 가리왕산의 숲 지대에서 전시하기로 했다. 전 세계가 참여하는 올림픽인 만큼, 또 세계인의 축제라는 가면 뒤에서 자연 파괴가 숱하게 이루어지는 만큼 세계인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촉구하려는 것이었다. 호기심을 보이는 두 사람에게 그러한 사실을 설명했다.


마을 주변에 울창하게 우거진 산림, 시굴다, 라트비아


마리스는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금세 이해한 듯했다. 취지에도 손쉽게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에바는 뭔가 개운치가 않은지 프로젝트의 내용과 행위의 당위성, 파급 효과에 대해 꼼꼼하고 정확한 설명을 요구했다. 논리 중심 사고를 하는 엔지니어다운 반응. 마리스가 자상한 말투로 프로젝트의 의미를 풀어서 설명하며 참여를 유도했지만 이에바는 충분히 납득하기 전에는 참여할 생각이 없다며 나에게 확실한 논리적 근거를 따져 물었다. 범 지구적인 규모로 벌어지는 거대 행사인 올림픽을 개인 몇 명이 움직이게 할 가능성은 있는지, 변화를 만들어 낸다면 그 내용인지 무엇인지, 그게 분명한 가치를 지닌 변화인지, 동유럽의 시골에 사는 일개 부부가 참여해 거대 행사의 발끝이라도 건드릴 수 있는지 등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해 보라는 것이었다.


저돌적인 기세로 의문을 제기해 온 이에바를 향해 대답했다. "이 프로젝트 덕분에 우리가 숲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잖니? 우리 안에서부터 벌써 변화가 일고 있잖니?" 내 대답을 듣고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이에바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알았어. 참여할게." 촬영은 이튿날 저녁에 했다. 분위기는 오손도손 좋았다. 부부라서 종이는 한 장만 사용할 거라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다. 숲이 도처에 가득한 동네여서 밖으로 나가서 촬영할까 하다가 그냥 실내에서 촬영을 했다. 일상이 한가득 펼쳐지는 공간이 그들에게는 숲이겠구나 싶었다.


시굴다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시간이 왔다. 고맙게도 마리스가 새 집 정리를 하다 말고 자신의 승용차로 나를 기차역까지 태워다 주었다. 이제 작별 인사를 나눠야 할 시간. 복작거리는 부부 생활도 구경하고, 그들이 내 준 독방 침대 위에서 날마다 숙면도 취하고, 풍요로운 자연이 가득한 지역의 속살도 실컷 감상하고, 훌륭한 고성이 자리한 인근 마을도 다녀오고, 여러모로 흡족한 시간이었다.


승용차 안에서 배낭을 매만지며 마리스를 향해 감사 인사를 건넸다. 눈썹을 한 차례 찡긋거리며 내 인사에 화답한 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우물거렸다. 무언가 말을 뱉으려는 듯 보였으나 생각을 고르려는지 앞 유리를 한참 동안 조용히 응시했다. 이윽고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그가 입을 열었다. “너에게 좋은 기운이 흐른다는 사실을 잊지 마. 가끔 소식이 궁금해질 듯하니까 이에바 편으로 종종 안부 전해 주고.” 습기가 서린 눈동자, 먹먹한 목소리. 수많은 말들 중에서 고르고 고른 작별 인사가 가슴 어딘가를 깊이 건드려왔다. 배낭을 짊어지고 기차역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흔들렸다. 마리스의 마지막 표정이 내 안의 울퉁불퉁한 바윗덩어리 하나를 자꾸만 쓰다듬었다.


시굴다의 인근 마을에 자리한 체시스성, 체시스, 라트비아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32nd~33rd 퍼포머

: Ieva & Maris


- 국적: 라트비아

- 촬영지: 시굴다, 라트비아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소는 지역에서 개최된 한 문화 행사. 정확히는 지역민들이 교류하는 파티였다. 파티 분위기가 절정에 달할 무렵 커플 춤을 추다가 서로 감정이 오고 갔다는 것 같다. 두 사람의 일상을 가까이서 지켜본 바로 두 사람의 관계는 상당히 보완적이다. 엔지니어인 이에바가 이성적인 태도로 일상의 사건들을 분석해 의견을 제시하고, 화가인 마리스가 감성적인 방식으로 이에바의 의견을 부부생활에 흡수한다. 부부는 한몸이기 때문에 같이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이에바의 강경한 주장을 고려해 개인별 사진은 찍지 않았다. 자필 메시지도 한 장만 적었음은 물론이다. 사진 속의 고양이는 두 사람이 키우는 반려묘다. 녀석과 한 방을 써야 했는데 서로 꽤 잘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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