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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Jan 08. 2019

11. 주간 휴일제 여행의 시작_빌뉴스, 리투아니아

여행과 삶의 밸런스를 찾아라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 인근의 당일 여행 명소 트라카이성, 트라카이,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머문 지 이틀째. 여행의 출발점이었던 핀란드에서 찬란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해 주었던 백야가 어느덧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위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으로 내려온 까닭이었다. 여행을 시작한 지 한 달이 흘렀다지만 아직까지는 여름의 중턱이었다. 나로서는 꽤 진귀한 경험이었기에 밤 9시 무렵이면 꼬리를 감추기 시작하는 백야의 뒷모습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헬싱키에서 시작해 발트해 3국을 분주히 돌아다니다 보니 심신에 피로가 잔뜩 쌓였는데 백야의 뒷걸음질이 내 감성을 더욱 가라앉히고 있었다. 휴식을 중간중간 취해 왔으나 그것만으로는 지친 몸을 회복시키기에 부족한 듯했다. 재정비가 필요한 상황. 최종 목적지까지 완주하려면 지속 가능한 여행 방식을 찾아내야 했다.


한 해 전 여행했던 남미에서 여행 중의 휴식과 관련해 내 여행의 문제점을 각성한 적이 있었다. 아침에 나가서 한나절 지역 탐방을 한 후 저녁 무렵이 되어 숙소로 들어오는 일과의 반복이 직장인의 숨 가쁜 생활상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후 휴식 시간을 좀 더 안배하며 여행했지만 오래된 습성을 단번에 바로잡기는 쉽지 않았다. 여행 방식의 문제점 하나를 자각하고 약간이나마 보완을 시도했다는 점 정도가 성과라면 성과였다.


이번 여행에서도 비슷한 일과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남미 여행에 이어 이번에도 쇄도하는 방식의 여행을 하다 보니 내 여행이 인간의 근원적인 생리에 반하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자각하게 되었다. 대다수가 그렇듯 나 역시 가정과 학교와 직장을 차례대로 거치면서 사회의 부속품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로 훈련받았다. 자기실현은 허구적인 구호일 뿐 내 앞에 던져진 삶은 자연인으로 생애를 시작해 일개미로 변신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생산에 대한 강박을 동력으로 삼아 일상을 전개하는 행태를 이번 여행에서도 반복하고 있었다. 


남미에서의 자각 이후 여행에 임하는 마음이 전보다는 여유로워졌지만 아침마다 경쟁하듯 숙소를 빠져나가는 다른 여행자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여전히 불안감이 엄습했다. 남들은 바리바리 외출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세수도 제대로 못했으니 생산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한심해도 보통 한심한 모습이 아니었다. 비싼 돈과 귀중한 시간을 들여 떠나 온 여행에서 숙소 최고의 나태가 웬일인가 싶어 정신이 번쩍 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스리기를 반복했다. 피로가 누적되었다는 판단이 들면 다른 여행자들이 부산을 떨든 말든 예정했던 대로 휴식을 취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만사가 내 맘대로 되지는 않았다. 더러는 휴식 계획을 취소하고 부랴부랴 짐을 챙겨 밖으로 나서기도 했고, 예정대로 휴식을 취할 때는 예기치 못한 조바심에 시달리기도 했다. 다른 여행자들이 부지런을 떠는 모습에 자극받아 뒤늦게 숙소를 나선 날에는 다른 때보다 심신을 더 많이 혹사하며 하루를 보냈다.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인생의 한 때를 의미 없이 날리게 될 것 같았다. 돌아보면 효율의 논리에 잠식당하고 생산성의 압력에 짓눌린 모습과 다름없었다. 다른 여행자들의 부산스러운 모습은 현대인이 지닌 강박의 다른 얼굴이기도 할 텐데 그럼에도 주류의 거대한 물줄기를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가지 오브제를 부착해 꾸민 뒷골목 예술벽, 구시가, 빌뉴스, 리투아니아


혼란이 계속되고 있기는 했지만 휴식을 취할 때마다 그 효과는 분명하게 드러났다. 심신을 혹사하면 만사가 귀찮았고, 사람을 상대하기도 꺼려졌다. 반면 충분한 휴식 후에는 새로운 경험, 새로운 인연을 맞이하는 마음이 여유로웠다. 감각의 움직임도 활발했고, 유머도 산뜻한 리듬으로 톡톡 튀었다. 웃음도 많아졌으며, 나를 따라 다른 사람이 웃는 일도 생겼다. 스스로의 욕구와 필요를 세심하게 파악하고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한 덕분이었다. 타성에서 벗어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해 보였다.


더욱이 사진 프로젝트까지 동반한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 정도쯤이야 하면서 시작했지만 막상 실행해 보니 만만치가 않았다. 사람을 만나고, 우정을 키우고, 감성의 결을 맞추고, 촬영을 제안하기에 올바른 상황인지 감별하고, 상대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프로젝트의 취지를 설명하고, 촬영을 하고, 사진을 고르고, 보정하고, 그 배경 사연까지 글로 적어 인터넷에 올리고 나면 진이 빠졌다. 사진이야 현장에서 순발력을 발휘해 요령껏 찍었다 쳐도 그걸 컨텐츠로 가공하고 나면 서너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다음날 일정을 위해 휴식을 취해야 하는 밤에도 작업을 해야 했다. 여행만 하기에도 바쁜데 그 시간을 다시 쪼개가며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으니 몸이 배겨 날 리 만무했다. 비싼 돈과 귀중한 시간을 들였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함부로 굴리고 있었다. 


계속된 고민 끝에 주간 휴일제 여행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일주일 중 하루는 무조건 쉬기로 한 것이다. 이른바 주 6일 여행제였다. 마음 같아서는 주 5일 여행제를 시행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조건도 적절히 고려해야 할 일. 상황을 봐서 반나절 정도의 휴식을 탄력적으로 추가하기로 했다. 이제껏 그랬듯 여정이 계획대로만 펼쳐지지는 않을 테니 날씨, 심신의 상태, 현지 환경 등을 두루 살펴 휴일을 융통성 있게 적용하기로 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하루를 온종일 쉬고, 분주한 구간에서는 하루에 몇 시간씩 여러 날을 쉬면 피로 누적을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을 듯했다. 강박이 느껴지지 않는 선에서 두루뭉술하게 덧셈, 뺄셈을 하면서 주간 휴일제 여행을 연착륙시켜 보기로 했다. 주 5일 여행제를 채택하지는 못했지만 정기 휴일을 공식적으로도 지정했다는 점만으로도 그동안의 여행 인생에서 눈에 띄는 파격이었다. 


한 달에 걸친 강행군으로 심신에 피로가 잔뜩 쌓인 데다가 요 며칠 잠도 부족하던 차였다. 고풍스러운 바로크 건물들, 화려한 외양의 교회들, 하천변에 자리 잡은 운치 있는 음식점들, 뒷골목 여기저기에 포진한 상점들, 방문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푸드트럭 야시장까지 도시 곳곳에서 펼쳐지는 풍경들은 충분히 매혹적이었지만 그것들과 기분 좋게 마주하려면 나 자신부터 돌봐야 했다. 마침 비가 거리를 휩쓸기에 숙소에서 하루 종일 푹 쉬기로 결정했다. 


열정과 의욕을 가지런히 포개 배낭 속에 수납한 후 본격적인 휴식에 돌입했다. 낮잠을 두 번이나 잤고, 한국 음식을 만들어 다른 여행자들과 나눠먹었다. 저녁에는 이탈리아 여행자가 한국식 점심 식사에 대한 보답으로 만들어 준 스파게티를 들며 다른 여행자들과 한담을 나눴다. 이후에는 밀린 여행 노트를 기록했고, 남은 시간을 이용해 잡문도 썼다. 마음을 다진 후의 휴식이어서인지 남들 다 외출하고 혼자 숙소에서 쉬고 있어도 별로 불안하지 않았다. 여행이 쫄깃쫄깃해지는 소리가 생기 있는 음색으로 침대맡을 흘렀다.


하천변 나무 그네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여행자들, 빌뉴스,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꼽히는 성 안나 성당, 구시가, 빌뉴스, 리투아니아


신시가와 구시가가 동시에 내려다 보이는 게디미나스 언덕, 구시가, 빌뉴스, 리투아니아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34th 퍼포머

: Riccardo Ferrara


- 국적: 이탈리아

- 촬영지: 빌뉴스, 리투아니아


밀라노에 사는 리카르도는 여름휴가를 이용해 빌뉴스로 여행을 왔다. 구시가 일대를 같이 돌아다녔고, 번갈아 음식도 만들어 먹었다. 나는 점심으로 버섯볶음과 계란말이를, 리카르도는 저녁으로 파스타를 만들었다. 파스타는 오일이 가장 중요하다며 한끼 요리를 위해 고급 올리브유를 구입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리카르도가 만든 오일 파스타는 당연히 맛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남은 올리브유는 다음 여행자들을 위해 숙소에 기증했다. 촬영은 귀국길에 오르는 리카르도를 구시가 성문 밖까지 배웅하는 도중에 했다. 재기 발랄하고 씩씩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리카르도다.



35th 퍼포머

: Theo Galy-Fajou


- 국적: 프랑스

- 촬영지: 빌뉴스, 리투아니아


느긋하면서 유쾌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테오. 온종일 비가 내리던 날에는 숙소 라운지에서 편당 러닝 타임이 4시간에 육박하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 3부작을 내리 시청하는 느긋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모습이 휴식의 문제를 고민하는 나에게 얼마간의 영감을 안겨 주었다. 토론의 나라 프랑스 출신답게 테오는 대화 중 궁금하거나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꼼꼼히 되묻곤 했다. 답변에 애를 먹을 때도 있었지만 오히려 깊이 소통할 수 있어서 좋았다. 프로젝트 참여도 그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 이루어졌다. 건강한 에너지를 지닌 테오를 마주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곤 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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