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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Jan 09. 2019

12. 무정부주의자가 보내온 초대장_빌뉴스, 리투아니아

가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거리에서 즉흥 잼을 하고 있는 보헤미안들, 구시가, 빌뉴스, 리투아니아




여행 휴일을 몽땅 들여 어렵게 회복한 기운을 두어 시간 만에 탕진했다. 밤에 열린 현지 카우치서핑 정기 모임에 참석했다가 그렇게 되었다. 심신도 이완할 겸, 여행자 간의 건전한 교류라는 카우치서핑 문화도 체험할 겸 기분 좋게 참석했으나 가서 보니 그냥 시끄러운 술자리였다. 참석 인원은 50~60명 정도. 적적한 상태에 있었거나 놀거리를 찾아다니다가 모임 공지를 발견하고 달려 나온 이들이었다. 진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겠다 싶은 친구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워낙 자리가 시끄럽고 산만해 제대로 소통을 하기가 어려웠다. 분위기가 사람을 이끄는 형국이어서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흥청망청하기에 바빴다. 


너무 많은 이들이 북적거리다 보니 시선 끌기 경쟁도 이어졌다. 조금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바로 낙오하는 분위기여서 저마다 언행을 과장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칫하면 무대 뒤로 밀릴 상황이라 서로가 서로를 압도하기 위해 온갖 기교를 동원했다. 어떻게든 대화에 틈입해야 소외를 면할 수 있었다. 살아남기 경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충 보면 더불어 화목한 풍경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날 선 심리가 좌석 곳곳에서 피 튀기며 부딪치는 처세술의 격전장이었다. 전 세계 조급증 환자들을 모두 모아 놓은 것처럼 어지러운 그곳에서 스스로를 더 이상 혹사시키고 싶지 않았다. 영생의 비밀이라도 엿들을 수 있었다면 더 참고 견뎠겠지만 영생의 비밀은 고사하고 유병언 사망의 비밀도 듣지 못할 듯했다. 숙소에서 만난 친구들 둘을 대동해 참석했다가 혼자서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군중 속에서 기운을 잔뜩 소진하고 나니 강력하게 연대할 친구가 간절해졌다. 그 무렵 카우치서핑 요청 메시지를 보냈던 현지인 커플에게서 연락이 왔다. 기다렸던 답장이었지만 두 사람의 성격이 만만치 않아 보였던 터라 막상 회신을 받고 나니 당황스러웠다. 한참 동안의 고민 끝에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숙박 요청 메시지를 보낸 상태였다. 그들이 프로필의 초입에 최근의 과제라며 적어 놓은 문구는 ‘정부 타도’였다. 그 아래로는 게스트를 향한 엄격한 요구 사항, 사회 현안에 대한 격한 비판 등을 적었다. 반면 문화 취향 항목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전위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괴팍한 성향의 사회 부적응자들이라기보다는 지배적 가치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히피들일 가능성이 컸지만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보내온 답장에는 "애완견 경연 대회 참가가 잡혀 있어서 하루만 잠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데 괜찮겠냐"는 물음이 담겨 있었다. 어떤 친구들인지 궁금하기도 해 짐을 챙겨서 그리로 가겠다고 대답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마중 나온 그들의 이름은 제이콥과 이에바. 프로필 사진상으로는 리투아니아 최고의 반항아들이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그보다 훨씬 인간적인 모습들이었다. 다소 긴장해 있던 마음이 제이콥의 얼굴에서 일어난 각질과 이에바의 떡진 머리를 마주하면서 많이 여유로워졌다. 두 사람이 사는 곳은 리투아니아식의 낡은 주공 아파트였다. 넉넉지 않은 살림임에도 소신 있게 살아가려는 의지가 공간 곳곳에서 피어났다. 두 사람은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를 옹호한다는데 와이파이의 패스워드마저 ‘칼 마르크스’였다. 이념을 추종한다기보다는 더불어 행복한 삶을 소망하는 듯 보였다. 세상의 모든 편견과 차별에 반대하며 그 같은 문제들을 조금이라도 해결하기 위해 사회악이 탄생하는 지점을 끊임없이 추적한다고 했다. 최근의 과제가 정부 타도인 이유는 고금을 막론한 모든 최고 권력 기관이 고상한 얼굴 뒤로 온갖 악행을 자행해 오고 있기 때문이란다.


대형 할인 마트 앞에서 벌어진 노천 재래시장, 빌뉴스, 리투아니아


대개의 아웃사이더들이 그렇듯 두 사람은 독립 예술과 철학을 사랑했다. 생명 존중도 그들에게는 중요한 일이어서 그 실천으로 고양이와 개를 키웠다. 발랄한 성향의 고양이와 미끈한 체형의 사냥개를 한 마리씩 키웠는데 가족처럼 소중히 대하는 모습에서 생명을 향한 두 사람의 진지한 태도를 읽었다. 소박한 일상을 사는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강인한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흔적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카우치서핑 정기 모임에서 만난 수십 명의 시끄러운 참석자들보다 훨씬 매력적인 친구들을 만난 듯했다. 맞닿을 만한 구석도 몇 배는 더 많아 보였다.


저녁 식사는 내가 준비하기로 했다. 함께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았는데 재료가 마땅치 않아 즉흥 요리를 선보이기로 마음먹었다. 메뉴는 쌀밥과 버섯볶음과 오이냉국. 버섯볶음은 요리에 필요한 재료를 대부분 구할 수 있었으나 오이냉국은 그렇지 않았다. 해서 과일을 썰어 넣어 시큼한 맛을 더하고 그들이 구비한 양념을 뒤섞어 달콤한 맛을 냈다. 간이 맞나 싶어서 한 숟가락 떠 마셔 보니 이제껏 살면서 처음 경험하는 이상야릇한 맛. 간이 맞는 것도 아니고 안 맞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먹을 수 없는 맛도 아니면서 좋게 생각하면 맛있다고 여길 수도 있는 맛이었다. 식사가 한창일 무렵 제이콥이 오이냉국을 품평했다. “맛이 이상한데 맛은 또 있네. 그게 또 이상한 식으로 맛이 있어서 뭐라고 맛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술잔이 식탁 위에 놓였다. 두 사람 모두 흡연자이기에 혹시 실내에서 담배를 피워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그렇게 하라고 입을 모아 대답했다. 내가 담뱃불을 붙이자 두 사람은 내가 자신들의 카우치서핑 게스트 중 최초의 실내 흡연자라는 사실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의 게스트 중 흡연자가 없지 않았지만 태도들이 너무 조심스러웠다는 설명이었다. 자신들도 덩달아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일상적으로 실내에서 흡연을 함에도 호스팅 기간에는 그럴 수가 없었단다. 내가 괜한 예의 차리지 않고 먼저 담뱃불을 붙여 주어 속이 다 후련하다고 했다.


허울 하나를 파기하고 나니 동지 의식이 두터워졌다. 술과 담배가 서로를 끌어안은 식탁 위에 동질감까지 얹히면서 우정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오고 가는 대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화두는 히피 축제인 우드스탁이었다. 두 사람은 근래에 다녀왔다는 폴란드 우드스탁의 이모저모를 나에게 설명했고, 나는 동료 예술가들이 매년 여름 개최하는 한국식의 작은 우드스탁을 그들에게 언급했다. 축제의 가치를 두고 자웅도 겨뤘다. “너희가 만드는 축제는 소규모지만 우리가 참석한 축제는 엄청 대규모야. 세계 각국의 히피들이 다 모여든다고.” “어허, 이것들 보게. 너희는 남이 만든 축제에 참여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직접 축제를 만들어. 게다가 일체의 상업주의를 배격하고 알만한 사람들만 비밀리에 초대하지.”


연대의 필요성에 대해 합의를 이룬 대화가 어느새 ‘I am a forest’ 프로젝트를 식탁 위로 끌어올렸다. 연대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두 사람이기에 프로젝트의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연대의 중요성과 관련해 발트해 3국의 독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간띠 잇기라는 역사적 사건을 나에게 설명해 주기도 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부속 국가들 사이에서 독립의 열망이 술렁이던 1989년 당시 발트해 3국 국민 200만 명이 독립을 요구하며 각 국 수도인 탈린, 리가, 빌뉴스를 수직으로 잇는 거대한 인간띠를 만들었다는 것. 후에 확인해 보니 3국 국토를 종단한 600km 길이의 인간띠는 사상 최장의 기록이었다. 당시 3국의 총인구가 800만 명이었으니 1/4이 참여한 셈이었다. 두 사람은 3국 독립의 결정적인 사건이었던 인간띠 잇기의 사연을 나에게 들려준 후 바로 자필 메시지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예술 애호가답게 메시지 옆에 그림도 그렸다. 거기에 더해 영문학을 전공한 이에바가 즉석에서 영문으로 자작시를 지어 프로젝트에 헌정했다. 자필 메시지와 자작시 모두 잘 보관했다가 이듬해에 개최할 숲 축제에서 보기 좋은 곳에 전시하겠다고 약속했다. 


대화가 뜨거워지는 만큼 술병도 계속 나가떨어졌다. 와인에 이어 35도짜리 독주까지 마셨더니 정신이 어질어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취한 건지, 저들이 취한 건지, 아니면 밤이 취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시뻘게진 얼굴로 열변을 토하는 그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개성만점의 친구들과 가슴을 열고 맞닿은 새벽. 카우치서핑 정기 모임에서의 결핍을 보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발트해 3국 독립을 이끈 인간띠 잇기의 시작점이었던 대성당 광장, 구시가, 빌뉴스, 라트비아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36th 퍼포머

: Jacob


- 국적: 리투아니아

- 촬영지: 빌뉴스, 리투아니아


야콥과 이에바는 폴란드에서 열린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다녀온 사연을 아주 자랑스럽게 나에게 이야기했다. 가고 오는 길이 멀고 험했지만 아름다운 여정이었다고 했다. 자연인의 자격으로 수많은 이들과 연대한 그 기억이 그들의 삶에 힘을 불어넣는 듯했다. 두 사람은 동물 사랑도 남달랐다. 카우치서핑을 하면서 보니 집집마다 거실 벽에 예술품을 한두 개씩은 걸어 놓았던데 두 사람이 걸어 놓은 작품은 컨템퍼러리 스타일의 닭 그림이었다. 해서 닭을 야콥의 머리에 얹어 촬영했다. 놀이로써의 사진 작업이자 엄숙주의와 허위의식을 마뜩지 않아하는 우리식의 진지한 창작 행위였다.



37th 퍼포머

: Ieva St James


- 국적: 리투아니아

- 촬영지: 빌뉴스, 리투아니아


술자리를 시작하고 얼마 후 이에바가 친구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자살 기도를 암시하는 메시지. 이에바가 발을 동동 구르며 친구와 통화를 시도했지만 신호음만 길게 이어졌다. 비슷한 소동을 이미 몇 차례 일으킨 친구라니 해프닝으로 그칠 가능성이 커 보였고, 야콥의 의견도 나와 같았지만, 이에바는 한참 동안 불안감을 거두지 못했다. 그 모습에서 생명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읽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사람을 대하는 이에바였다. 두 사람은 개와 고양이를 각각 한 마리씩 키웠는데 그중 고양이가 자주 재롱을 부려왔다. 촬영을 하는 동안에도 고양이의 재롱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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