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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Jan 16. 2019

17. 관계가 우려낸 홍차의 맛_리비우, 우크라이나

새로운 인연이 마음의 깍지를 껴오면

구시가, 리비우, 우크라이나




세 번째 시도만에 가까스로 리비우에 입성했다. 크라쿠프에서 연거푸 일어난 묘한 일들로 홧홧해진 몸은 한참이 지나도록 식지 않았다. 바르샤바의 야콥과 크라쿠프의 파베우를 잇따라 만나며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우정을 나누는 행운을 누렸지만 교감이 깊었던 만큼 기운의 소진도 많았다. 하여 리비우에서는 카우치서핑을 건너뛰고 여행자 숙소에서 머물기로 했다. 휴식부터 취해야 했다. 청탁받은 원고의 마감 기간이 닥쳐온 터라 작업에 집중할 필요도 있었다.


뜨거워진 몸을 식히며 원고 작업을 해 나갔다. 마침 숙소 앞에 공원이 조성돼 있어 작업이 막히면 공원으로 나가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구경하며 활자의 난동으로 복잡해진 머릿속을 가라앉혔다. 모든 작업을 마무리하고 원고와 사진을 청탁처에 전송할 무렵, 뜨거웠던 몸이 제자리를 찾았다. 사물이 좀 더 정확한 형태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리비우의 매력도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라는 리비우는 고풍스러운 광경으로 가득했다. 내 시선을 가장 먼저 압도한 장면 역시 도처를 가득 채운 전통 건물들이었다. 그 우아한 행렬 사이로는 세월 묵은 자갈길이 반들반들 빛났다. 육중한 풍채로 서 있는 중세 건축물들의 격조 높은 모습과는 달리 도시에는 낡고 녹슨 흔적이 가득했는데 그게 오히려 풍경에 운치를 더했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잔흔도 자주 눈에 띄었다. 덜컹거리며 도로를 가르는 낡은 트램부터 손 글씨로 적은 가격표를 잔뜩 붙인 노점에 이르기까지 거리 곳곳에서 마주치는 풍경 뒤로 공산주의 시절의 광경이 습자지처럼 비쳤다. 신용카드 결제 시스템이 미처 도입되지 못한 숱한 상점들이며, 1회 탑승 요금이 우리 돈으로 100원도 안 되는 트램이며, 훌륭한 신선도에 비해 가격이 지나치게 저렴한 식재료에 이르기까지 공유 경제 체제의 잔영이 길목 곳곳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도시 자체가 살아 있는 사회과학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구시가, 리비우, 우크라이나


하이캐슬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시가지, 리비우, 우크라이나


숙소에는 다양한 이들이 들고 났다. 그들의 틈에서 음식을 자주 만들어 먹었다. 요리 횟수가 늘면서 맛과 모양새가 점점 나아지는 중이었다. 솜씨가 부족함에도 요리를 계속 시도하는 이유는 자립의 기본 능력 중 하나가 요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급자족을 위해 반드시 익혀 두어야 할 기능이면서 카우치서핑 호스트의 호의에 보답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인터넷으로 조리법을 찾아 그대로 따라 하면 좀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재료의 특성을 감각적으로 파악하고 요령껏 조합하는 연습을 했다. 그러다 보니 정체불명의 음식이 탄생하기 일쑤였는데 그럼에도 색감을 비롯한 전체적인 모양새는 꽤 좋은 편이었다. 리비우에 머무는 동안에도 여러 명의 여행자가 내가 만든 음식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특히 미식가 성향의 여성 여행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원고 작업 때문에 숙소에 온종일 머물다 보니 숙소 스탭들과 친분이 생기기 시작했다. 영업 관리상 스탭들은 지역을 불문하고 친절한 태도를 보이지만 날마다 숙박객과 부대껴야 하는 만큼 속내까지 진솔하게 드러내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진상 숙박객에게 시달리거나 까다로운 손님들로 인해 마음고생을 하는 일이 잦을 테니 숙박객들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는 편이 현명할 것이었다. 리비우에서 머문 숙소의 환경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형식적으로만 잘 지내도 고마운 일일 터였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친분이 돈독해지기 시작하더니만 급기야는 친구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이집트인 남편이 한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이십 대 초반의 스탭 마리는 퇴근길에 예정된 친구들과의 산책에 나를 데리고 나갔다. 한국인을 처음 만나본다는 그녀의 친구들이 한국에 대한 질문을 잔뜩 해 와 각각의 물음들에 분주히 호응해야 했지만 그만큼 정답고 유쾌한 시간이었다. 또 다른 스탭인 디마 역시 예기치 못한 친절을 자주 베풀었다. 예쁜 엽서에 메시지를 적어 선물로 주었고, 다음에 혹시 리비우에서 장기 체류할 계획이 생기면 괜찮은 방을 수소문해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디저리두를 연주 중인 거리 예술가, 구시가, 리비우, 우크라이나


호의의 견인차는 ‘I am a forest’ 프로젝트였다. 숲의 마음을 헤아리는 가운데 내 안에서 훼손된 자연성을 조금씩 되살리며 걸어온 길이었다. 스스로와 다투는 일이 적어지면서, 전보다 부드러운 흐름 속에서 사람과 맞닿고 있었다. 친분이 다져지는 과정에서 내가 사진 프로젝트를 들고 여행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자 숙소 스탭들은 그 의미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면서 프로젝트의 호스트인 나에게 신뢰를 표했다. 그러고는 한층 친밀해진 표정으로 마음의 깍지를 껴오기 시작했다. ‘숲’을 테마로 한 프로젝트가 그 실행의 주체인 나를 변화시키면서 새로운 인연들과의 관계를 숲처럼 엮어준 셈이었다. 각자도생하던 존재들이 프로젝트를 통해 서로 손을 맞잡는 가운데 인간 숲의 크기가 계속 커져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참여자의 수가 50명을 넘었다. 나란히 서면 꽤 그럴듯하게 숲의 모양을 구현할 수 있는 규모에 이르렀다.


숙박객 중 일부와도 친분이 생겼다. 가장 가깝게 지냈던 이들은 이집트 출신의 유학생 이브라힘과 카자흐스탄에서 왔다는 드미트로였다. 투박하고 시끄럽기로 소문난 이집트인답게 이브라힘의 첫인상은 거칠었다. 그러나 잠자리에 들기 전 침대맡에 앉아 구멍 난 양말을 바느질하는 모습이 처음의 느낌을 뒤집었다. 이브라힘의 인간미가 가장 크게 드러난 대목은 종교를 주제로 두 명의 여성 게스트와 장시간 벌인 토론이었다. 이슬람교도인 그를 향해 비종교인인 두 명의 여성 게스트가 거세게 맞불을 놓았는데 이브라힘은 시종일관 유쾌한 태도로 토론에 임했다. 머릿수에서 밀리다 보니 위기가 많았지만 두 여성 게스트의 공세에 함께 웃어가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 나갔다. 아주 평화롭고 사이좋아 보이는 광경이었다. 그의 눈웃음이 선량하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드미트로 역시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말을 중단하고 상대를 빤히 쳐다보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I am a forest’ 프로젝트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도 그랬다. 프로젝트의 내용을 대강 설명해 주었더니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실질적인 효과가 있는 프로젝트인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참여할 것도 아니면서 너무 집요하게 질문한다 싶었지만 관심이라도 보여주는 게 어딘가 싶어서 물음마다 차분하게 대답을 들려 주었다.


그러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드미트로가 다시 다가왔다. 자신도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안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의외였다. 투박한 태도 너머로 사회 현안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엿보기는 했는데 이렇게 능동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히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심도 깊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듯해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촬영을 마무리한 직후, 의미 있는 일에 동참하게 돼 기분이 좋다는 소감을 피력한 드미트로는 이후부터 나에게 악수를 계속 청해왔다. 이유는 없었다. 숙소 라운지에서 만나도 악수, 대화를 나누다가도 악수, 내가 외출을 나서면 나를 다시 불러들여 악수, 역대 최고의 악수 세례였다.


리비우 여행을 끝내고 다음 행선지로 떠나는 날 오후. 분주하게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드미트로가 다가왔다. 차를 대접하고 싶단다. 시간이 빠듯했지만 진심이 느껴져 숙소 휴게실로 나섰다. 내 대답에 표정이 밝아진 드미트로는 곧바로 부엌으로 달려가 홍차를 잔에 담아 들고 왔다. 아무데서나 구할 수 있는 인스턴트 홍차였지만 드미트로의 정성이 느껴져 고마운 마음으로 차를 들었다. 그걸로는 아쉽다고 생각했는지 드미트로는 나에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고는 슈퍼마켓으로 달려가 쿠키를 사 왔다. 역시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염가의 쿠키. 그렇지만 나에게는 산해진미보다 귀하게 느껴지는 음식이었다. 열차 출발 시각이 임박해 오고 있었으나 초조한 내색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히 차를 들었다. 쿠키도 이따금씩 입에 넣었다. 목을 타 넘는 홍차가 좌심방우심실을 촉촉하게 적셨다.


라틴성당, 구시가, 리비우, 우크라이나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51st 퍼포머

: Dmytro


- 국적: 카자흐스탄

- 촬영지: 리비우, 우크라이나


드미트로는 리비우에서 직업을 구하는 중이었다. 숙소에서 함께 있는 동안 틈틈이 일자리를 알아보기도 했고, 장기간 머물 수 있는 방을 물색하기도 했다. 의미가 담긴 배경을 선정해 그 앞에서 촬영을 하고 싶다는 그의 요청으로 현지인들이 존경하는 문학가인 이반 프랑코의 동상과 그 바로 곁에 자리 잡은 커다란 나무를 드미트로의 양 어깨에 걸쳐 촬영했다. 겉모습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진지한 숙고 끝에 자연 사랑의 마음을 실천하겠다고 스스로 나서는 모습에서 영웅적인 면모를 엿보기도 했고, 자극에 길들여지지 않은 담백한 태도에서 나무의 기운을 느끼기도 했기 때문이다.



52nd 퍼포머

: Mary Vyshnevska


- 국적: 우크라이나

- 촬영지: 리비우, 우크라이나


마리는 내가 묵었던 숙소의 스탭 중 한 명이다. 리비우에서 머문 며칠 동안 그녀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신경 써 주어서 꽤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마리는 다정하고 포근한 태도로 상대를 대하곤 했는데 그 모습에서 치유자로서의 능력을 언뜻언뜻 느꼈다. 함께 있으면 덩달아 부드러워지곤 했던 것도 마리에게서 흘러나오는 해독력 때문이었다. 사랑의 기운이 풍부한 마리였다. 학업을 위해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이집트인 남편을 만나기 위해 내한할 계획이 있다기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 아주 잘해 줄 계획이다.



53rd 퍼포머

: Ibrahim Sabry


- 국적: 이집트

- 촬영지: 리비우,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유학 중인 이집트 청년 이브라힘은 애틋한 일상의 풍경을 자주 만들어 냈다. 그 중 하나는 바느질. 침대 위에 쪼그리고 앉아 이쑤시개보다 얇은 바늘과 끙끙거리며 씨름하는 모습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바느질의 결과는 늘 엉성했지만 그게 오히려 그다워 보였다. 내가 숙소 라운지에서 원고 작업을 하는 동안 이브라힘은 옆 좌석에서 학교 숙제를 했다. 내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나면 그 뒤를 이브라힘이 이었다. 스타일리시한 차림으로 외출하는 이브라힘의 진짜 모습을 날마다 가감없이 경험했다. 그가 꽤 진솔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내가 간파할 수 있었던 이유다.



54th 퍼포머
: Dima Savinov


디마 역시 리비우에서 묵었던 숙소의 스탭이다. 52번째 참여자인 마리와 교대로 근무를 했다. 재기 발랄하면서 애교 넘치는 디마는 예술적인 감각이 남달랐다. 자필 메시지를 작성하면서도 문구의 시각적 스타일까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글자 옆에 그림을 그리고 색상까지 입히는 모습이 무척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디마는 문구를 한글로도 적고 싶다며 정확한 표기를 나에게 물어왔다. 내가 한글을 알려주자 악필의 한국인보다 훨씬 예쁜 손글씨로 '나는 숲이다'라는 다섯 글자를 자필 메시지 위에 적었다. 그러고도 부족하다 싶었는지 나를 잠시 대기시킨 후 프런트 데스크의 한쪽에 예비로 준비해 둔 녹색 스니커즈로 신발을 바꿔 신고 나왔다. 숲에 가까운 빛깔이라는 게 그가 설명하는 신발 교체의 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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