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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Jan 15. 2019

16. 이상한 나라의 이방인_스타리 송치, 폴란드

이 도시는 왜 나를 놓아주지 않는가

크라쿠프 현대미술관, 크라쿠프,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벌어진 이상한 일은 파베우와 벌인 한밤의 뜨거운 대화만이 아니었다. 묘한 현상들이 계속해서 꼬리를 물었다. 당초 파베우네 집에서 머물기로 한 기간은 3박 4일. 그 사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도 다녀왔고, 크라쿠프 내부의 볼거리도 대부분 돌아보았다. 계획을 완수했으니 다음 행선지로 떠나야 하는데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번번이 발이 묶였다.


그 시작은 이랬다. 예정한 체류 기간이 끝나갈 무렵, 파베우가 며칠 후 크라쿠프의 어느 교외에서 포크 뮤직 페스티벌이 개최된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매년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캠핑 축제로, 전통 음악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이었다. 한 해 전에도 다녀왔는데 만족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올해에도 참가할 예정이라며 동행을 청했다.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과는 반대로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머리로는 내용도 잘 모르는 행사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축제의 시공간을 배회했다. 그렇지만 예정에 없는 일이었고, 앞으로 남아있는 여행지도 잔뜩이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떠나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파베우에게 전했다. 그런데 크라쿠프를 떠나기로 한 당일, 예약해 둔 교통편이 느닷없이 취소돼 버렸다.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상황 파악조차 할 수가 없었다. 파베우도 처음 보는 일이라고 했다.


동료 예술가들이 매년 주최하는 사이키델릭 캠핑 축제가 한국에서 펼쳐질 무렵이었다. 사랑과 평화의 정신을 나누는 행사인 데다가 반가운 얼굴들도 잔뜩 만날 수 있어 부푼 기대감을 안고 축제장을 찾곤 했다. 가서는 아는 이 모르는 이 가리지 않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특설 무대에서 새벽까지 이어지는 인디 음악가들의 릴레이 공연을 즐겼다. 갑작스러운 교통편 취소로 황당해하는 나에게 파베우가 포크 뮤직 페스티벌 동행을 다시 권해 왔다. 사이키델릭 축제에 참여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정확히 공략한 것이었다. 결국 포크 뮤직 페스티벌에 다녀오기로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파베우가 캠핑 장비를 조달하고, 카풀 차량을 섭외했다. 


들판 위로 난 길을 가로질러 가는 세 대의 자전거, 스타리 송치, 폴란드


부푼 기대감을 싣고 달리던 카풀 차량이 바퀴를 멈춘 곳은 수려한 풍경이 흐드러지는 남부 폴란드의 전원 지대였다. 이리 보아도 그림, 저리 보아도 그림, 천혜의 장관이 사방으로 가득했다. 한 번도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축제였지만 자국 내에서는 꽤 알려져 있는지 참가자의 수가 수 천 명을 헤아렸다. 우리가 텐트를 치고 난 후, 파베우의 친구인 안나와 마리아가 도착했고, 곧이어 크라쿠프 도착 당일 유대인 지구를 함께 탐험했던 토멕도 합류했다. 이로써 진영 구축을 완료했다.


흥분으로 들뜬 그들과 함께 축제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먹거리 장터에 줄지어선 노점들을 돌며 폴란드식 잔치 음식을 체험했고, 현지의 전통 독주와 맥주를 번갈아 마셨다. 한국의 사이키델릭 축제에서도 분위기 때문에 취기가 빠르게 오르곤 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후에는 야외 특설 무대로 자리를 옮겨 콘서트를 관람했다. 무대 아래에서는 거대한 인파가 고삐 풀린 전통 리듬에 맞춰 상하좌우로 물결쳤다. 우리도 그 안으로 들어가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음악을 즐겼다. 


특설 무대 위에서 공연 중인 밴드, 스타리 송치, 폴란드


콘서트 연주의 리듬에 몸을 맡긴 축제 참가자들, 스타리 송치, 폴란드


콘서트가 끝난 뒤에는 축제객들끼리 벌이는 즉흥 잼 파티에 끼어들었다. 카혼(목재로 만든 사각 상자 모양의 타악기)을 멋지게 연주하는 파베우가 가장 기다린 시간이기도 했다. 콘서트 관람과 음주로 얼큰해진 축제객들은 각자의 악기를 들고 축제장 여기저기에서 원 모양으로 무리를 지어 즉흥 잼을 벌였다. 파베우도 자신의 카혼을 가져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나 역시 크로매틱 하모니카를 들고 여행길에 올랐지만 다수가 벌이는 즉흥 잼 판에 끼어들기에는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음계의 곡이나 살짝 불어볼 정도의 서툰 솜씨. 그런데 파베우가 내 손목을 잡아챘다. 그 바람에 즉흥 잼판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말았다. 


현란한 연주들로도 모자라 음계마저 수시로 바뀌는 잼의 흐름에 대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유일한 하모니카 연주자라는 이유로 나에게 시선이 자주 몰리는 바람에 진땀을 흘리며 다른 연주자들과 합을 맞춰야 했다. 죽도록 괴로웠지만 또한 죽도록 짜릿했다. 잦은 실수를 반복하며 근근이 흐름을 따라가는 나와 달리 파벨은 능숙한 솜씨로 카혼을 두드리며 잼을 이끌어 갔다. 리듬 악기 주자들 중에서는 단연 발군이었다. 최전방에서 풍악을 이끄는 상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꺾은 채 격정적으로 카혼을 두드리는 파베우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물 만난 고기 한 마리가 음악의 바다 위로 힘차게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구경하는 즐거움이 아주 컸다. 잼이 파하면 다른 잼 판으로 이동해 연주에 참여하길 여러 차례. 이성을 땅바닥에 눕혀 둔 채 오로지 감성만으로 직립해 예측 불허의 국면을 향해 달렸다. 심장이 터질 듯한 순간이 자주 영혼을 덮쳤다.


다음날에도 무위의 시간은 계속 이어졌다. 할 일 없이 축제장을 어슬렁거리던 일행들과 함께 점심 무렵 강변으로 물놀이를 갔다가 개울가에서 축제 현장을 스케치하고 있던 영상 취재팀에게 인터뷰를 요청받았다. 수 천 명의 축제객 중 유일한 동양인인 나를 그들이 그냥 놔둘 리 없었다. 두말 않고 인터뷰에 응했다. 파베우에게 들은 바로는 외국인 자체가 몇 명 안 되는 데다가 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서양인 여행자여서 나에 대한 관심들이 대단했다고 한다. 인터뷰는 후에 축제를 소개하는 영상에 담겨 인터넷에 유포되었다. 곳곳에서 마주치는 환영의 인사가 축제 내내 나를 고양시켰다. 먼지처럼 흩날렸던 대한민국의 그 바깥에서 나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귀한 존재였다. 콘서트 구경에, 먹거리 기행에, 음주 파티에, 한밤의 즉흥 잼까지 엉망진창으로 행복한 순간들이 나를 계속해서 고양시켰다.


기분 좋은 신호를 보내오던 축제 참가자, 스타리 송치, 폴란드


축제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하고 크라쿠프로 돌아오는 길. 축제 원정대 오인방의 무게에 짓눌린 아나의 승용차가 폴란드 남부의 국도를 헐떡거리며 달리는 동안 예상치 않게 내 입에서 유머가 빵빵 터졌다. 내뱉는 말마다 홈런이었다. 위트로는 어디에 내놓아도 밀리지 않는 파베우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툭툭 내뱉었을 뿐인데 승용차 안에서 폭소가 만발했다. 심지어는 내가 숨만 쉬어도 차량이 배꼽을 잡고 떼굴떼굴 굴렀다. 몸을 던져 축제를 즐기는 사이 영혼이 활짝 열린 것이었다. 크라쿠프로 돌아오는 길의 나는 만물이 저항받지 않고 지나다니는 투명한 다리이자 세계와 조화를 이룬 자연의 한 부분이었다.


3박 4일을 계획했던 파벨과의 동거는 10박 11일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폴란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시가와 독립 예술이 융성하는 유태인 지구가 지역의 앞뒤를 떠받치고 있는 크라쿠프는 충분히 근사한 곳이었지만 남은 여행지가 첩첩이 쌓인 나에게 10박은 과다한 일정이었다. 최초의 3박 4일 일정을 마무리했을 때 파베우의 은근한 유혹을 뿌리치고 떠나려고 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교통편의 취소로 발이 묶였고, 곧이어 포크 뮤직 페스티벌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행사에 다녀왔다. 돌아보면 묘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파베우는 나와 겪게 될 일을 예지했고, 그의 예견대로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교감을 서로 나눴다. 그동안 길 위에서 만나 깊이 소통한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파베우와의 소통은 차원 자체가 달랐다.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크라쿠프를 빠져나가야 할 터였다. 교통편이 한 차례 취소된 경험을 떠올리며 차량 예약에 만전을 기했다. 그러고도 모자란 듯해 출발 당일 터미널에 한 시간쯤 먼저 도착해 플랫폼에 몸을 붙박은 채로 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버스를 탈 수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리 묻고 저리 물었지만 버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중교통의 운행 스케줄이 꽤 정확하게 엄수되는 폴란드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크라쿠프를 떠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영령들이 당시의 일들에 관심을 보이는 나를 떠나지 못하게 막은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나를 잡아 끈 것일까? 적시에 떠나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실패를 거듭했을까? 크라쿠프의 자기장에서 벗어나기가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현지에서는 몰랐는데 다음 목적지에 도착해서 보니 온몸이 뜨겁게 끓고 있었다. 뇌 과학 이전의 언어로 묘사하자면 영혼이 잔뜩 달궈진 상태였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이 무렵이 가장 난관이 될 거라 예상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아무 근거 없는 막연한 예측이었는데 그게 현실이 되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카지미에시(유태인 지구), 크라쿠프, 폴란드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49th 퍼포머

: Anna Predka

안나는 예전에 파베우와 한 공간에서 거주했던 플랫 메이트다. 플랫은 복층 건물 안에 자리한 생활공간으로, 몇 개의 방과 함께 주방, 거실 등의 공용 시설을 갖추고 있다. 유럽 현지에서는 플랫 셰어가 아주 흔한 일이다. 일상을 공유했던 사이여서인지 파베우는 우리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안나를 꽤 반가운 표정으로 맞이했다. 우리 텐트의 바로 옆 자리에 자신의 텐트를 설치한 안나와 함께 2박 3일 간 축제 현장을 신나게 누볐다. 낮에는 같이 마을 탐방도 하고, 저녁에는 술도 나눠 마시며 막역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기분이 그윽해지면 콘서트 무대 앞 스탠딩석으로 달려가 춤을 추었다. 크라쿠프로 돌아오는 길에 탑승한 그녀의 승용차는 현대차였다. 성능도 좋고 내구성도 뛰어나다며 한국 승용차에 대한 신뢰감을 크게 표하던 아나였다.


50th 퍼포머

: Maria Pajor


포크 뮤직 페스티벌에서 막역하게 지냈던 또 한 명의 친구는 마리아다. 안나의 텐트 메이트였던 그녀는 성격이 무척 소탈했다. 웃음도 많은 편이어서 함께 있으면 늘 즐거웠다. 성격 좋은 그녀 덕분에 '응답하라' 시리즈의 등장인물들처럼 성별을 뛰어넘는 우정을 나눌 수 있었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에 마리아는 텐트 옆에 펼쳐 둔 돗자리 위에서 더위 먹은 소마냥 낮잠을 잤는데 그 역시 털털해 보여서 좋았다. 한 동네에서 자란 친구처럼 느껴지는 마리아여서 먹거리 장터를 돌아다니다가 군침이 도는 음식이라도 발견할라치면 그녀를 향해 지갑을 열라고 채근했던 기억이 난다. 각별한 친절과 우정을 선사해 준 안나와 마리아 덕분에 더없이 충만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오래도록 잊지 못할 2박 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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