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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Jan 14. 2019

15. 깊은 밤 영혼의 대화는 흐르고_크라쿠프, 폴란드

두 번째 동시성, 그 끝에서 맺어진 필생의 인연

구시가 언덕 위에 나란히 자리한 바벨성과 바벨대성당, 크라쿠프, 폴란드




왜 그렇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모르겠다. 수 년째 그랬다. 무언가가 나를 강력하게 잡아당기는 듯했다. 전쟁사에 관심이 많다지만, 인류가 저지른 비극적인 참상들도 마음 아팠다지만 왜 하필이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을까? 현대사 최고의 비극이 서린 장소라는 상징성 때문일까? 이전의 폴란드 여행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게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죽기 전에 한 번은 가봐야 한다고 생각하며 기회를 계속 살폈다.


무거운 마음을 어깨에 짊어지고 버스에서 내린 나를 늦저녁의 어둠이 묵지근한 기운으로 에워쌌다. 시계를 보니 밤 9시. 드디어 아우슈비츠 여행의 거점 도시인 크라쿠프에 도착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차량으로 1시간가량 떨어져 있는 크라쿠프는 여행자들을 아우슈비츠로 실어 나르는 교두보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쟁의 상흔이 얼룩진 유태인 지구, 한 재력가가 수많은 유태인들을 구한 사연을 영화화하면서 유명해진 쉰들러의 공장 등도 시가지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전쟁 박물관이나 다름없는 도시가 바로 크라쿠프였다. 그러나 이제 막 그 안으로 발끝을 들이민 나로서는 모든 풍경이 생소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오시비엥침, 폴란드


크라쿠프에서는 지질학 연구원으로 일한다는 파베우가 숙박을 제공해 주기로 했다. 프로필에 ‘게스트를 친절하게 대할 예정이지만 그게 잘 안 되면 최소한 그런 척이라도 하겠다’고 솔직하게 적어놓은 글귀가 마음에 들어 숙박 요청 메시지를 보냈다. 카우치서핑을 몇 차례 하면서 상호 간의 기대와 달리 호스트와 게스트가 서로 불편하게 지내는 사례도 속속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지라 파베우의 기탄없는 글귀가 더더욱 마음에 와 닿았다. 그 밖의 프로필 내용은 평이한 편이어서 특별한 만남이 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위트 있는 현지 친구와 이따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하며 파베우의 집을 향해서 걸었다. 역대급의 교감을 그와 나누게 되리라는 사실은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였다.


파베우가 사는 건물 앞에 이르자 그가 자신의 방 발코니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배낭을 앞뒤로 짊어지고 방으로 들어선 나를 그의 친구인 아렉과 토멕이 반겼다.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며 위스키를 웰컴 드링크 삼아 내밀기에 넙죽 받아 마셨다. 크라쿠프에서 가장 구경하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묻는 그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참상을 돌아보기 위해 크라쿠프에 왔다는 사실을 전했다. 의외라는 반응들. 지구촌의 일원으로서 애도의 마음을 표하려고 선택한 여행지였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크라쿠프에 와서도 놀거리를 찾아다니기에 바쁜데, 더욱이 현지에 거주하는 자신들도 그때의 비극은 신경 쓰지 않고 사는데 과거의 일에 이렇게까지 관심을 기울여 주어 뜻밖이라는 것이었다. 역사가 교차한 흔적도 거의 없는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여행자가 자신들보다 그때의 일에 더 깊게 관심을 품고 있는 데 대해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그들이 옷을 고쳐 입었다. 말이 나온 김에 같이 한 번 돌아보자는 것. 마침 일대가 전쟁의 역사가 잔뜩 서린 유태인 지구이니 원하는 장소들을 구경시켜 줄 수 있단다. 자정이 가까워 올 무렵이어서 이 늦은 시간에 뭘 구경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내 의문을 잠재우고도 남을 만큼 기운찼다. 그들의 뒤를 따라 유태인 지구를 탐방하기 시작했다. 유태인들의 예배당인 시나고그,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유태인 주택, 그 언젠가 피비린내가 진동했을 뒷골목, 유태인들의 친교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마당 넓은 식당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곳을 방문했다. 내부를 구경할 수 있다는 유태인 주택은 문이 닫혀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우회 공간으로 나를 끌고 갔다. 그들의 인솔로 내부에 잠입하노라니 전쟁 당시 독일군의 눈을 피해 빈 건물로 숨어드는 유태인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어렴풋이 그려졌다. 불꺼진 복도 한켠에서 그때의 상황을 헤아리는 마음이 그리 좋지 않았다.


올드 시나고그(유대교회당)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 중인 거리 예술가, 카지미에시(유태인 지구), 크라쿠프, 폴란드


예상했던 대로 파베우는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특히 유머 감각이 탁월했다. 한 번은 인근 식당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한 후 계산을 치르려는데 그가 내 몫까지 내겠다고 나섰다. 자립을 탐구하는 여행이니 내 몫은 내가 계산하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에 그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강경했다. 안 되겠다 싶어서 눈을 부릅뜨며 네가 뭔데 내 몫을 계산하느냐는 표정으로 “왜?”(Why?)라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그가 “안 될 건 또 뭔데?”(Why not?)라고 대답하며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시선을 마주쳐왔다. 짧지만 강렬한 반격에 말문이 막혔다. 마땅히 반박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껄껄껄 웃고 말았다. 결국 계산은 파베우가 했다.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파베우는 위트만 뛰어난 게 아니라 사려도 깊고 매너도 좋았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하고, 경쾌하면서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그 모습 위로 균형 잡힌 참나무 한 그루가 피어오르곤 했다.


둘째 날 오전, 휴일을 맞이한 파베우와 함께 동네 식당에서 브런치를 들었다. 서로 즐겁기만 하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하며 파베우네 집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뜻밖으로 대화가 유속 빠른 물길을 만들어 냈다. 여행과 삶에 대한 진지한 담소가 아주 길게 이어졌다. 내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통찰력이 엿보이는 질문들로 압박해 오는 파베우로 인해 대화는 점점 더 무게를 키웠다. 서로를 향해 사소한 대목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반문해 나가는 사이 비가 내리다 그치길 반복했다. 한적한 노천카페에 마주 앉아 화두의 곳곳을 세심하게 짚어 가며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이 컸다.


그날부터 밤마다 깊은 대화가 펼쳐졌다. 대화는 이례적인 깊이로 소통했던 낮보다 더 깊고 정교했다. 통념에 반하는 의견들이 자주 오갔지만 이견은 거의 없었다. 가령 이런 식의 이야기들이었다. 악을 경험하지 않고는 선을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선에 도달하고 싶다면 선악에 대한 기계적인 구분만 반복하고 있을 게 아니라 악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 볼 필요가 있다, 타인을 향한 분노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다, 실패야 말로 진정한 성공이다 등등. 진실은 우리가 상식이라고 부르는 것의 바깥에 자주 존재한다는 사실을 파베우는 잘 알고 있었다. 숱한 화두들을 하이파이브로 마무리하는 기분이 무척 흡족했다.


다음날 아침 출근을 앞둔 파베우는 시계를 확인하며 곧 잠자리에 들겠다고 선언하기를 반복했지만 새벽의 중턱이 가까워 오도록 자리를 뜨지 못했다. 다음날 새로운 일정이 대기하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심연을 휘젓는 대화로 인해 예정했던 취침 시각을 넘기기 일쑤였지만 피곤하다기보다는 서로 순환하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국적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달랐지만 파베우와의 관계에서는 이질감이나 긴장감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아무리 서로 호의적이라고 해도 주인과 객은 자기 몫의 긴장감을 느끼게 마련인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파베우도 이질감이나 긴장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했다. 묘했다.


내가 도착하기 전 파베우는 정체된 일상 속에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때문에 대화의 초점은 파베우가 한창 고민 중인 문제들로 자주 쏠렸다.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부분 서로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더러는 의견이 완전히 반대인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파베우는 최근 직장 생활에서 느끼고 있는 권태의 이유를 세간에서 흔하게 떠돌아다니는 사회 비평적 관점으로 설명했지만 내 눈에는 전형적인 자기 합리화로 보였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지만 파베우가 싸우고 있는 대상은 부조리한 사회 구조가 아니라 자기 안의 두려움이었다. 잔뜩 달아오른 표정으로 대화를 마무리한 파베우는 하루를 사색 속에서 보낸 후 전날의 대화를 깨끗하게 인정해 왔다. 그는 도피와 부정으로 자신을 훼손하는 대신 직면과 고백으로 스스로를 들어 올릴 줄 아는 인간이었다. 격돌은 밤마다 이어졌고, 대화는 시종일관 평등했다. 대부분의 쟁점들에 대해 파베우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정확하게 요점을 간파했다. 방 안을 뜨겁게 채운 소통의 기쁨 속에서 신뢰의 고리가 날로 두터워졌다.

 


유태인 지구의 중앙대로, 카지미에시(유태인 지구), 크라쿠프, 폴란드


며칠이 지난 후, 파베우는 뜻밖의 말을 나에게 전했다. 이러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는 사실을 예견했다는 것. 변화를 모색 중인 자신에게 꼭 필요한 대화였는데 나에게서 숙박 요청 메시지를 받았을 때 이 상황을 예지 했단다. 바르샤바의 야콥과 마찬가지로 파베우도 숙박 요청 메시지를 날마다 여러 통씩 받았다. 크라쿠프가 바르샤바와 더불어 폴란드를 대표하는 여행지인 데다가 파베우의 거주지가 현지 대안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쇄도하는 숙박 요청들 사이에서 내 카우치서핑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기다렸다는 듯 수락 버튼을 눌렀다는 설명이었다. 본인으로서도 신기한 일이라고 했는데 나로서도 그랬다.


파벨과 나눈 대화의 상당 부분은 공감각을 동원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더욱이 그 복잡 미묘한 내용을 영어로 주고받아야 했다. 우리말로도 풀어내기가 만만치 않으니 어눌한 내 영어로는 전혀 주고받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액면 너머까지 모두 읽어 내야만 제대로 된 소통을 할 수 있는데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깊이의 대화를 조악한 영어 솜씨로 파베우와 나누고 있었다. 내 생애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에, 더군다나 그 대상이 외국인이기에 더욱 어리둥절했다. 이국의 어느 3층 발코니에서 영혼의 대화가 벌어질 때마다 밤하늘이 벌겋게 달아오른 이유였다.


밤마다 열띤 대화를 나눴던 파베우의 방, 카지미에시(유태인 지구), 크라쿠프, 폴란드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47th 퍼포머

: Pawel Brzuszek


- 국적: 폴란드

- 촬영지: 크라쿠프, 폴란드


파베우와의 사연은 이후로도 길다. 파베우네 집에 머물던 당시, 사진에 문외한인 그에게 사진을 몇 차례 가르쳐 주었더랬다. 초점은 기술이 아니라 철학과 태도였다. 내가 떠나간 후 파베우는 바르샤바의 한 사진 마스터에게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까지 왕복 5시간을 오고 가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I am a forest' 프로젝트의 48번째 참여자인 야콥의 집에도 몇 차례 묵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가 내가 중간에 다리를 놓으면서 친분을 틔웠다.

이후 파베우는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500년 된 원시림의 벌목 현장으로 카메라를 메고 들어갔다. 환경 운동가들이 만든 캠프에 머물며 사진 촬영을 비롯해 다양한 활동을 펼친 그는 벌목을 주제로 한 자신의 사진과 폴란드 예술가들의 작품을 들고 한국에 왔다. 내가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강원도의 숲에서 벌인 예술 캠프에 참여하기 위해 자비를 들여 내한한 것이었다.

사실 'I am a forest' 프로젝트를 만나기 전까지 파베우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남다른 면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세파의 힘이 더 강했기에 일상에 순응하며 집과 직장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벌목 문제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I am a forest' 프로젝트를 만나면서 폴란드에서도 같은 사태가 벌어지고 있고, 숲 파괴 문제는 눈 앞의 현상을 넘어 우리 사회의 정신적 현상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심 좋은 플랫 메이트 두 명에게 당연한 마음으로 'I am a forest'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하자고 청했다가 깔끔하게 거절당했던 여파도 있었을 것이다. 나무만 쓰러지고 있는 게 아니라 사람도 쓰러지고 있다는 것, 자신 역시 그 무리 속의 한 명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어딘가를 건드렸을 것이다. 그랬던 그가 직장을 때려치우고 숲으로 들어가 쓰러져 가는 나무들을 일으켜 세우겠다고 카메라를 메고 동분서주했다. 그러고는 그 결과물을 들고 한국에 왔다.

예술 캠프가 겨냥한 곳은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베어낸 평창동계올림픽이었다. 공교롭게도 파베우가 사진으로 담아 온 폴란드 원시림의 역사도 500년이었다. 훌륭한 카혼 연주 실력과는 별개로 발치에서만 예술을 바라보고 있었던 파베우는 수십 명의 한국인 예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신의 작품들을 예술 캠프에 공개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예술가의 이름으로 내건 첫 전시였다. 귀중한 발걸음을 해 주었기에 파베우는 한국의 예술가들에게 크나큰 환영을 받았다. 예술 캠프 내내 카혼을 다리 사이에 두고 한국의 즉흥 연주자들과 날이면 날마다 즉흥 잼판을 벌였다.

애석하게도 예술 캠프 기간 중 파베우는 지갑을 도난당했다. 신용카드와 현금을 몽땅 털린 것이었다. 파베우뿐만 아니라 행사에 참여한 예술가들 몇몇이 함께 털렸다. 외부 관람객의 소행으로 보였으나 범인을 잡지는 못했다. 파베우가 한국에서 머문 보름 내내 내가 계속 따라붙었던 이유다. 예술 캠프가 마무리된 후에는 경상도와 강원도 등지를 함께 여행했다. 숲을 보고 싶다는 파베우의 청으로 원주에 사는 숲 전문가의 도움을 빌려 치악산의 금강송 군락에 다녀오기도 했다. 홍대 앞에 자리한 한 복합문화공간에서 파베우의 사진과 폴란드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전시회도 열었다.

파베우가 폴란드로 돌아가기 직전, 환송 파티가 벌어졌다. 자신을 신경 써 준 한국의 친구들에게 파베우는 몇 가지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고, 파베우의 입맛을 귀띔받은 한국 친구들은 그가 좋아하는 한국 두유와 아이스크림과 케이크를 그의 품에 잔뜩 안겼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깜짝 이벤트가 아직 남아 있었다. 파베우가 도난당한 지갑 속에는 현금이 30만 원 이상 들어있었다. 소중한 작품들을 들고 자비로 내한해서 도난 사고까지 겪는 모습을 마주하자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한국인의 소행일 확률이 높아 미안한 마음이 더욱 컸다.

해서 파베우 모르게 모금을 했다. 나중에 모금액을 합산해 보니 파베우가 도난당한 현금의 액수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이 역시 신기한 일이었다. 모금 봉투 앞에서 파베우는 강력하게 손사래를 쳤지만 "이것은 돈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자 우정이며, 이 부담스러움을 차후 위기에 빠진 다른 이를 도와주는 일로 대신하라"는 내 말에 결국 모금 봉투는 파베우의 손으로 고이 넘어갔다. 그러고는 공항에서 서로 깊은 포옹을 한 후 파베우는 폴란드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연락은 계속 주고받고 있다. 역대급의 우정 역시 변함없다. 자신의 삶에 불길이 일었던 파베우는 지금 굉장한 인간으로 변모해 있다. 예의 그 유쾌한 농담을 남발하면서 때로는 구도자 같은 모습으로, 때로는 웅숭깊은 실천적 지식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가 변화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본 나로서는 파베우의 변신은 그저 기적 같은 일이었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다. 기적은 어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파베우였다.


48th 퍼포머

: Camille Dkt


- 국적: 프랑스

- 촬영지: 크라쿠프, 폴란드


카미유는 로뎅의 연인과 동명을 쓰는 귀엽고 명랑한 19세의 프랑스 아가씨다. 파베우가 카미유의 숙박 요청을 수락하면서 셋이서 이박삼일을 동고동락했다. 관계는 오손도손 좋았다. 내가 만든 파전과 카미유가 만든 크레페를 셋이서 사이좋게 나눠 먹기도 했다. 그녀는 고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2주 계획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전공은 불문학, 영문학 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동물을 끔찍이 사랑하며, 같은 이유로 채식을 했다. 다정한 사이는 아니라는 친오빠를 거론하며 "I love him!"이라고 말하던 순간의 그 맑고 순수한 목소리가 아주 영롱한 음색으로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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