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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Jan 13. 2019

14. 실천은 말보다 강하다_바르샤바, 폴란드

뜨거운 환대가 이끌어 낸 희열의 탭 댄스

자신의 방 창문에서 인사를 건네는 야콥, 바르샤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역대 최고의 환대를 받았다. 지금까지도 기대 이상으로 호의를 누리며 여행하고 있었는데 바르샤바에서의 환대는 그보다 몇 길 위였다. 환대의 출처는 나에게 숙박을 제공한 현지 카우치서퍼 야콥이었다. 여행자들이 쇄도하는 도시에 사는 데다가 거주지의 위치도 시가지의 몸통 부근이어서 야콥은 하루에도 여러 통의 카우치서핑 요청 메시지를 받았다. 동일한 일자에 숙박 요청이 몰리다 보니 마음이 이끌리는 게스트를 선택해 답신을 하곤 했다. 그러던 차에 내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단숨에 승낙 의사를 알려왔다. 야콥이 이끌린 부분은 내가 카우치서핑에 임하는 방식이었다. 


처음 카우치서핑을 시도할 때부터 한 번에 한 명에게만 숙박 요청 메시지를 보냈다. 귀중한 인연이 될지도 모르니 상대에게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후 거절 메시지가 돌아오거나 이튿날까지 응답이 없으면 그때 다른 호스트를 검색해 카우치서핑 메시지를 보냈다. 저쪽에서 답신을 늦게 보내오는 바람에 일정이 엉키기도 했고, 현지에 도착할 일자가 가까워졌는데도 승낙 메시지를 받지 못해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뒤늦게 호스텔을 수소문하다가 숙소가 동난 상황에라도 직면하면 식은땀이 한 바가지씩 흘렀다. 소신을 계속 지켜오고 있었지만 답답한 순간도 그만큼 많았다. 


반복되는 위기 상황이 의지의 팔목을 꺾어 올 때면 두세 명한테 동시에 카우치서핑 메시지를 보내볼까 생각했다. 다른 카우치서퍼들은 당연하다는 듯 복수로 숙박 요청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50통가량의 메시지를 한 번에 뿌린 후 답장을 보내온 호스트를 취향껏 골라 가며 숙박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렇지만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멀쩡한 인격을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라는 인식이 마음의 발끝을 돌부리처럼 잡아챘다. 


난관에 처할 때마다 유혹이 일었으나 마음을 다잡고 원래의 방침을 고수했다. 두세 통이든 오십 통이든 인간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행위라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정도만 다를 뿐 같은 성격의 행위일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관계를 울창하게 키우는 길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욱이 카우치서핑으로 멋진 친구들을 계속 만나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부터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거듭 깨달아 온 여정이었다. 남들이야 어떻든 내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계속 나아갔다. 


야콥이 나에게 호감을 느낀 대목이 거기였다. 그동안 꽤 많은 카우치서퍼들을 만났지만 이제껏 한 번에 한 사람에게만 숙박 요청을 하는 사례는 처음 경험한다며 내 방식을 높이 평가했다. 자신도 여행길에 오르면 한 번에 여러 통의 카우치서핑 메시지를 보내곤 한다는 것이었다. 내 카우치서핑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핑거 스타일 기타로 메탈리카의 'Nothing else matters'를 연주하고 있는 스트리트 뮤지션, 신세계 거리, 바르샤바, 폴란드


야콥은 진취적이고 자립적인 친구였다. 재능면에서도 남다른 부분이 많았다. 다채로운 여행 경험의 소유자이자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루는 음악가, 개성 있는 감각의 사진작가이자 책임감 있는 웹디자이너, 한 마디로 만능의 인간이자 다재다능한 예술가가 바로 야콥이었다. 카우치서핑에 임하는 자세도 확고했다. 자국을 찾아온 여행자들을 그만큼 적극적으로 돕고 챙겼다. 분명한 신념을 바탕으로 자신이 지닌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모습이 뭉클한 느낌으로 다가오곤 했다. ‘진짜 카우치서퍼’(True Couchsurfer)라는 인상을 자주 받았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내 카우치서핑 방식 때문인지 야콥은 첫 악수와 동시에 커다란 호의를 나에게 베풀기 시작했다. 알고 보면 쥐뿔도 없는 나를 마치 동쪽에서 온 귀인 대하듯 아주 극진히 대접했다. 부엌에 있는 모든 음식은 그의 것이면서 또한 내 것이었고, 그가 내어 준 소박하지만 포근한 독방은 그냥 내 것이었다. 바르샤바는 일전에도 한 차례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여러 면에서 깊은 인상이 남아 반드시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추를 열어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은 곳들도 있었다. 먼젓번에는 공사로 인해 휴관 상태였던 쇼팽 박물관에도 가보고 싶었고, 일정이 바빠 겉모습만 구경했던 문화과학궁전의 전망대에도 오르고 싶었다. 그랜드 피아노를 캠핑카에 싣고 다니며 연주 여행을 하던 동갑내기 독일 피아니스트와의 뜻깊은 추억도 구시가의 한쪽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랬던 바르샤바에서 야콥이라는 멋진 친구를 만나 복에 겨울 정도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차고 넘치는 그의 환대 때문이었을까? 야콥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자존감이 수직 상승했다. 스스로가 꽤 쓸모 있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감성도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올랐다. 야콥의 안내로 그의 여자 친구네 집을 방문한 어느 저녁, 생초보 주제에 여러 명의 현지 친구들 앞에서 자청해서 하모니카를 연주했다. 선택한 곡은 한국 동요인 ‘섬집아기’.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호흡이 떨리고, 하모니카도 떨리고, 그것을 쥐고 있던 손도 떨리고, 그 손을 지탱하고 있던 몸통도 떨리고, 심지어는 그 바로 아래에서 지면을 향해 가느다랗게 뻗어나간 두 다리마저 바들바들 떨렸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연주를 끝까지 이어나갔다. 긴장감과의 힘겨루기 끝에 연주를 무사히 마무리한 내 등 위로 희열이 떼 지어 달렸다. 그 자리에는 부끄러움 많은 현직 클래식 음악가 아니아도 있었다. 자청해서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내 모습에 자극받은 그녀는 한참 동안의 망설임을 거두고 피아노 앞에 앉아 답가를 연주했다.


행사에 앞서 리허설을 하고 있는 인디밴드, 문화과학궁전 광장, 폴란드, 바르샤바


바르샤바를 떠나오는 날 아침에는 야콥과 즉흥 잼을 했다. 역시 나는 하모니카를, 야콥은 기타를 연주했다. 겁도 없이 내가 먼저 청했다. 즉흥 잼을 하기에 내 솜씨는 아주 많이 부족했지만 실력만이 소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아닐 터였다. 두 악기가 서로를 향해 호응하기 시작하자 삽시간에 몰입도가 깊어졌다. 예상치도 못했던 흐름. 심연에서 잠자던 감각 세포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들렸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가속 페달을 밟는 동안 짜릿한 쾌감이 사방의 벽을 차고 날랐다. 영화 ‘원스’의 삽입곡 'Falling slowly'를 맞춰볼 때는 심장이 몸 밖으로 뛰쳐나와 쾌락의 탭 댄스를 췄다. 물아일체의 순간이 무언지를 그때 알았다. 연주를 이어가는 내내 뜨거운 뭔가가 내면을 가득 채웠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내 연주를 솜씨 좋은 기타 연주로 훌륭히 뒷받침해 주고 있는 야콥 역시 희열 가득한 눈빛을 나에게 연신 보내왔다. 


이후에는 야콥과 함께 동네 인근에 자리한 공원을 산책했다. 관광객들은 잘 모르는 곳이라며 야콥이 그리로 나를 이끌었는데 일상의 여유가 흐르는 풍경들이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흐뭇한 빛깔로 일렁이는 산책로를 발맞춰 걷다가 어느 나무 그늘 아래에서 야콥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너를 사진 찍고 싶은데 괜찮으면 내 카메라 앞에 서 주겠니?” 한참 동안 카메라를 방치해 두었는데 문득 다시 작업을 하고 싶어졌다는 것이었다. 포트레이트 연작을 만들고 싶은 욕구가 일기 시작했다며 내 사진을 새로운 시작점으로 삼겠다고 했다. 며칠간 함께 보낸 시간이 한동안 시들시들했던 그의 창작욕을 일으켜 세운 듯했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광대뼈에 힘을 주며 그의 카메라 앞에 섰다. 


야콥과의 작별 포옹은 더없이 뜨거웠다. 씩씩하고 다부진 야곱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았다. 원래는 강골인데 한 해 전의 해외여행에서 오염된 물을 마신 후 면역 결핍성 질환이 생겨 투병을 시작했단다.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야콥인 만큼 회복세는 빠른 편이었지만 식이 조절부터 일상 관리까지 신경 써야 할 게 많았다. 제약 조건이 많은 상황임에도 호스팅을 마다하지 않아 더더욱 감사한 마음이었다. 조속한 쾌유를 바라며 트램 정류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야콥 덕분에 더욱 늠름해진 자존감이 페이스 메이커를 자처하며 내 앞에서 성큼성큼 걸음을 이끌었다.


왕궁 앞 광장, 구시가, 바르샤바, 폴란드 


쇼팽 박물관, 바르샤바, 폴란드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46th 퍼포머

: Jacob Alder


- 국적: 폴란드

- 촬영지: 바르샤바, 폴란드


야콥이 나를 극진히 환대했던 이유는 그가 천성적으로 유하다거나 순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호락호락하지 않은 모습으로 시대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하던 야콥이었다. 야콥 덕분에 귀중한 체험도 많이 했다. 1980년대의 모습 그대로 운영되고 있는 서민 식당, 온갖 잡화가 즐비한 지역민 전용 재래시장도 야콥 덕분에 구경할 수 있었다. 후에 연락을 주고받은 바로 야콥의 건강은 상당히 호전된 상태다. 새로 장만한 필름 카메라로 포트레이트 작업도 이어나가고 있다. 흥미로운 일감도 많이 들어오고 있단다. 뷰파인더 너머로 선량한 눈동자를 반짝이던 그의 모습이 여전히 머릿속에 또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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