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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Jan 21. 2019

19. 소유냐, 존재냐_우즈호로드, 우크라이나

모두가 괴짜라고 칭하던 사내

우즈호로드성 정원의 조형물, 우즈호로드, 우크라이나




시커먼 그림자가 뒤에서 따라붙었다. 인적 없는 거리에는 어둠만이 무성했다. 발을 빠르게 놀리자 그림자가 고함을 지르며 속도를 붙여 왔다. 그림자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지만 배낭의 무게 때문에 더 이상은 가속을 붙일 수가 없었다. 꽁무니까지 쫓아온 그림자가 내 어깨를 잡아챘다. 고개를 돌려 보니 거칠고 투박한 인상의 중년 남성 하나가 양 미간을 구기며 씩씩대고 있었다. 내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가 호통을 치며 신분증을 내밀었다. 경찰인데 검문을 하겠다는 것. 개발도상국에서 여행자를 상대로 벌이는 강탈 수법이었다. 됐다고 말하고는 다시 돌아서려는데 그가 몸으로 나를 막아섰다. 그 기세가 만만치 않은 데다가 체구도 커서 포위망을 뚫고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젊은 여성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긴급히 그녀를 불렀다. 사건의 증인이자 민간 재판관으로 입회시키려는 것. 그녀에게 영어를 할 수 있는지 묻자 다행히도 할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사내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그녀에게 현지어로 해명을 늘어놓았다. 갑자기 얌전해진 모습. 그녀에게 설명을 마친 그는 왔던 길을 거슬러 돌아갔다. 경찰을 사칭한 털이범인지, 퇴근 후 용돈벌이에 나선 경찰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사태를 모면했다.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표한 후 점찍어 둔 숙소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카미야네츠 포딜스키는 꽤 근사한 여행지였지만 내가 원했던 산악 풍경은 없었다. 숲을 향한 갈망이 더 크게 꿈틀거렸다. 산악 지대의 좌표를 추적하기 위해 펼친 지도 위에서 우즈호로드라는 도시가 빛을 반짝였다. 카르파티아 산맥이 그 곁에서 거대한 몸통을 도사리고 있었다. 산줄기의 등뼈를 가로지르는 길고 푸른 갈기가 지도 위에서 휘날렸다. 여기다 싶어 다시 버스를 잡아 탔다. 먼 길을 달리고 달려 이제 막 우즈호로드에 발을 내디딘 참이었다. 그러나 미지의 도시가 나에게 선사한 건 산악 풍경이 아니라 한밤의 뜬금없는 추격전이었다. 더욱이 도착해서 보니 우즈호로드는 산악 도시가 아니었다. 카르파티아 산맥의 변두리에 간당간당하게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대로 된 숲을 구경하려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했다.


숲으로 진입할 방법을 고민하는 사이, 현지에서 나고 자란 대학 초년생 올레흐와 인연이 닿았다. 우연히 만난 청년 무리에 뒤섞여 있던 그는 일행들 사이에서 유난히 두드러졌다. 도발적인 태도와 거침없는 농담으로 미루어 무리에서 왕초 격의 인물인 듯했다. 그의 친구들도 그를 괴짜라고 칭하며 그가 던지는 농담에 자주 자지러졌다. 일부는 거침없는 그의 언행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 보였다. 그랬던 그가 불쑥 나를 파고 들어왔다. 이튿날 다른 현지 친구와 잡아둔 약속에 동석해도 되는지 물어온 것이었다. 앞뒤 없이 덤벼드는 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올레흐의 친구 일행, 우즈호로드, 우크라이나


약속 당일, 그는 가장 먼저 약속 장소에 나와 우리를 기다렸다. 언제 왔냐고 물어보니 꽤 됐다는 대답. 학교 수업은 땡땡이치고 일찌감치 와서 기다렸단다. 수업을 마치고 와도 되지 않느냐고 반문했더니 학교에서 딱히 배우는 게 없어서 괜찮다는 설명. 예정한 스케줄을 마무리한 후, 셋이서 함께 저녁을 드는데 올레흐가 가방을 열어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집에서 가져온 비계 구이였다.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전통 음식인데 지역 풍속을 경험하게 해 주려고 집에서 싸왔단다. 저돌적인 태도와 달리 내면 어딘가에 세심한 면모가 숨어 있는 듯했다.  


이튿날에도 올레흐를 만났다. 내가 산악 지대를 탐방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가 히치하이킹으로 산악 마을에 다녀오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약속 장소에서 만나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의 초입으로 나갔다. 길가에 서서 목적지를 적은 종이를 열심히 흔들어 보았으나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는 차량은 없었다. 한참이 지나 트럭 한 대가 우리 앞에서 속도를 줄였다. 트럭 기사와 대화를 마친 올레흐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타라는 신호를 보냈다. 목적지가 갈라지는 길목에 다다라 차량에서 내리려는데 트럭 운전사가 거칠고 투박한 말투로 돈을 요구했다. 상황을 간파한 올레흐가 나에게 먼저 내리라는 신호를 보내고는 얼마간의 돈을 지불하고 차량에서 빠져나왔다. 히치하이킹은 고사하고 자칫 잘못하면 금품을 강탈당할 뻔했다.


트럭은 멀어지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우리 둘만 남았다. 시내로 돌아가려면 다시 히치하이킹을 해야 하는 상황. 저 앞으로 주유소가 보이기에 일단 가보기로 했다. 주유소 사무실로 들어가 정보를 구해 온 올레흐가 새로운 계획을 알렸다. 근방을 지나는 버스 하나가 꽤 볼 만한 성이 자리 잡은 마을에 닿는다는 것. 거기까지 가면 우즈호로드의 중심가로 들어가는 버스도 탈 수 있단다.

 

팔라녹성에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 무카체보, 우즈호로드


버스가 도착한 곳은 무카체보라는 이름의 소읍이었다. 마을의 서쪽 언덕 위에는 다부진 풍채의 성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올레흐가 이야기한 팔라녹성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곳이었지만 성채 안팎의 풍모는 의외로 괜찮았다. 특히 성채에서 내려다 보이는 탁 트인 들판 풍경이 일품이었다. 올레흐는 주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성벽에 앉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었다. 한참을 음악에 젖어 있는 그 모습이 평화로우면서도 쓸쓸해 보였다. 음악 감상을 마친 올레흐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방금 극도의 행복을 느꼈다는 얘기를 전했다. 그 얼굴 위로 보살 같은 미소가 피어났다.


우즈호로드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올레흐는 다음날의 일정을 제안했다. 이번에는 진짜 산악 마을에 가자는 것. 정보를 검색해 봤는데 새벽 5시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 세 시간 정도를 달리면 훌륭한 풍광이 펼쳐지는 산악 마을에 닿을 수 있단다. 3일째 재끼는 수업 역시 염려하지 말라는 설명. 시내에 도착한 후에는 올레흐의 단골 바에서 맥주를 마셨다. 새벽같이 일어나려면 자리를 빨리 파해야 했지만 올레흐는 계속해서 맥주를 들이켰다. 아니나 다를까. 벌겋게 달아오른 올레흐가 계획이 변경될 가능성을 통보했다. 지금의 컨디션으로 봐서 내일 새벽에 잠을 깨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단다. 최대한 노력은 해 보겠는데 혹시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으면 다른 일정을 잡으라고 했다. 이튿날 새벽 올레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묵묵부답.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몰라 외출복 차림으로 침대맡에 앉아 있는데 올레흐가 답장을 보내왔다. 샤워 중이었단다. 생각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긴 했지만 택시를 타면 금방 도착할 거라는 설명이었다.  


새벽 열차가 도착한 곳은 볼로베츠라는 마을이었다. 플랫폼 너머로 올려다 보이는 굵은 능선 줄기가 산악 마을에 도착했음을 실감케 했다. 새벽이 차분히 내려앉은 플랫폼의 정취가 아름다워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때 경찰복을 입은 이가 다가와 신분증을 요구했다. 이방인이 드문 곳에서 서양인도 아닌 동양인이 철도 시설을 사진 찍고 있으니 수상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올레흐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는 경직돼 있던 표정을 풀며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이후 철도청 직원이 다시 한번 검문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도 올레흐가 상황을 해결했다. 경찰을 사칭한 털이범을 시작으로 날마다 불심검문에 시달리고 있는지라 올레흐의 존재가 여간 든든하지 않았다.


볼로베츠역, 볼로베츠, 우크라이나


본격적으로 마을 탐방에 나섰다. 규모가 워낙 작은 곳이어서 발길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동네의 구석구석이 눈에 모두 들어왔다. 한참을 돌아다녔는데도 시간이 잔뜩 남아 산등성이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한참을 걸어 올라간 끝에 제법 높은 곳에 도달했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풀밭 언덕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각자의 시간을 즐기기 시작했다. 내가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낮잠과 음악 감상, 사진 촬영과 산책 등을 골고루 하는 동안 올레흐는 가만히 앉아 음악을 들었다. 이후에는 낮잠도 좀 자는 듯 보였다. 개인 시간을 마무리한 올레흐가 나를 향해 말했다. “근래 들어 최고의 상태에 도달했어.”


내려오는 길에는 함께 음악을 들었다. 올레흐가 한국 음악을 들려달라고 청하기에 휴대폰에 저장해 둔 노래 중 몇 곡을 골라 틀었다. 올레흐가 가장 크게 감응한 곡은 인디 뮤지션 리싸(leeSA)가 부른 ‘사람들은’이라는 곡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생각 없이 내뱉은 말들에 상처 받은 마음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노래. 가사를 설명해 달라기에 번역 앱을 돌리며 노래의 내용을 풀이해 주었다. 그런데 올레흐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데도 가사의 내용이 그러하리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 자신이 겪는 상황과 똑같아서 위로가 많이 된다며 몇 번이고 반복해서 틀어 달라고 했다.


사실 올레흐는 괴짜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혜를 모색하는 구도자에 가까웠다. 삶의 부조리를 응시하며 실존을 고민하는 젊은 지성이기도 했다. 그를 괴짜라고 부르며 친분을 과시하던 친구들은 그의 진짜 모습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더 고독한 올레흐였다. 살아 있는 삶과 맞닿길 원하는 그에게 형식 일색의 일상은 몸에 맞지 않았다. 마을에 다다르기 직전, 발아래로 개울이 흐르는 언덕 모서리에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미 숱한 대화를 나눴음에도 남은 말들이 더 있었다. 그가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 달라기에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권해 주었다. 구체적으로 인식하지만 못했을 뿐 그는 이미 소유론이 강제하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인생에서 벗어나 존재론이 권유하는 가치 추구의 행로로 들어선 상태였다. 책을 읽으며 자신의 선택이 그르지 않았음을 좀 더 확신할 수 있길 바랐다.


산악 마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우즈호로드. 뻐근하게 하루를 보낸 때문인지 갈증이 차 올랐다. 우정이 깊어진 올레흐와 이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워 그가 자주 찾는다는 또 다른 바에 들렀다. 올레흐와 함께 보내는 마지막 밤. 지난 며칠간 올레흐는 나를 물심양면으로 챙겼다. 남은 현지 돈을 어떻게 소진할지 궁리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그동안 모아둔 유로화 동전을 비닐봉지에 담아서 가져왔고, 다음 도시로 이동하는 길에 뜻하지 않은 사고가 나에게 닥칠 걸 대비해 세관에서 일하는 부친을 통해 믿을 만한 국경 통과 차량 한 대를 예비로 확보해 주었다. 그 밖에도 크고 작은 배려가 많았다.


맥주잔을 비운 후 밖으로 나와 올레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자 올레흐가 가방을 열고 무언가를 꺼내 내 앞으로 내밀었다. 며칠 전 들고 나와 자신의 최고 애장품이라며 자랑했던 터키모자였다. 선물이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눈동자마저 그렁그렁한 상태. 본인에게 귀하디 귀한 소장품을 내가 어떻게 받나 싶었지만 뿌듯하게 웃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내가 터키모자를 조심스럽게 받아 쥐자 그의 얼굴에 미소가 사르라니 번졌다.


산등성이 풍경, 볼로베츠, 우크라이나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57th 퍼포머

: Oleg


- 국적: 우크라이나

- 촬영지: 볼로베츠, 우크라이나


올레흐와 함께 산등성이를 누비며 음악을 나눠 듣고, 밝은 햇살을 받으며 언덕에 누워 낮잠을 즐기던 순간의 행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프로젝트 촬영도 언덕에서 했다. 우즈호로드에서 이미 촬영을 했는데 올레흐가 근래 들어 최고의 상태에 도달했다며 다시 한번 촬영을 청했다. 프로젝트에 조금이라도 더 좋은 기운이 스며들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두말없이 카메라를 들었다. 사진 속에서 그가 쓰고 있는 모자가 그의 최고 애장품인 터키모자다. 당대의 가벼운 유행이나 교육 시스템의 낡은 패착에 현혹되지 않고 진지하게 삶의 방향을 모색하는 올레흐의 모습이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58th 퍼포머

: Ua Sya


- 국적: 우크라이나

- 촬영지: 우즈호로드, 우크라이나


로찌(애칭)는 올레흐의 친구다. 올레흐 무리와 처음 마주친 날, 그들에게 휩쓸려 강변 일대를 함께 산책했는데 그때 로찌가 통역사의 역할을 도맡아서 했다. 이틀 후에도 로찌를 만났다. 올레흐와 내가 펍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나온 것이었다. 자리가 거나해질 무렵, 프로젝트와 관련된 대화를 올레흐와 주고받았는데 그 얘기를 곁에서 전해 들은 로찌가 프로젝트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며 자진해서 참여 의사를 밝혔다.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견해를 피력했는데 숲 보호의 필요성을 깊이 실감하고 있다고 했다. 능동적인 태도가 그의 일상을 고양시키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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