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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Jan 22. 2019

20. 그녀는 나의 천군만마_우즈호로드, 우크라이나

뒷골목에서 마주친 그녀와의 어떤 약속

우크라이나의 전통 복식, 우즈호로드성 박물관, 우즈호로드, 우크라이나




언어 장벽은 우즈호로드에서도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녔다. 외국인의 방문이 드문 지방 소도시이다 보니 인터넷에서도 쓸 만한 지역 정보를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현지에서 여행 정보를 직접 수집해야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숙소 스탭은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지역의 분위기도 확인할 겸, 영어 구사가 가능한 현지인도 찾아볼 겸 거리로 나섰다. 일말의 기대를 안고 행인들에게 속속 말을 걸었으나 속 터지는 순박한 미소들만이 되돌아왔다.


타는 속을 식히려고 카페를 찾다가 좁은 골목 안쪽에 자리한 테이크아웃 카페를 발견했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카페로 다가왔다. 매장 직원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으로 미루어 직원과 친구 사이인 듯했다. 인상도 좋고 총기도 느껴져 영어를 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렇다는 대답. 그녀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현지 정보를 탐문하기 시작했다. 근처 슈퍼마켓의 위치, 지역의 대표적인 볼거리 등 무척 요긴한 지역 정보가 그녀의 입에서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잘하면 그녀를 앞세워 시내 구경을 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혹시 시간이 날 때 지역을 구경시켜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러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의 이름은 타냐. 영문학을 전공하는 18세 대학생이었다. 언제가 편하냐는 내 질문에 그녀는 친구의 일이 끝나는 밤 9시경이면 괜찮을 것 같다고 답했다. 당일을 예상하지는 않았는데 운이 좋은 듯했다. 그 시간에 카페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민가의 풍경, 우즈호로드, 우크라이나


사실 약속을 잡으면서 과연 그녀가 약속 장소에 나올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길에서 만난 현지인들과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대부분 믿을 만한 표정을 보였지만 그들 중 절반 정도는 약속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게 중에는 연락처를 주고받은 이도 있었는데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아 연락을 취하면 연락을 받지 않았다. 한국에서 마주친 외국인들과의 약속을 꼬박꼬박 지켜 온 내 입장에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 일이 겹칠 것 같으면 아예 약속을 잡지 말든가,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다면 연락이라도 해 주든가, 무책임한 태도에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한 번 보고 말 사람이라고 인격을 몰수하는 현상이 지구촌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번에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대화의 분위기도 좋았고, 약속을 잡을 때의 표정도 산뜻했지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그녀에게 나는 신원 불명의 이방인에 불과했다. 여행자들에 의한 범죄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안전을 위해 약속을 깨뜨린다면 딴지를 걸 수도 없을 것이었다. 더욱이 약속 시각은 어둠이 잔뜩 깔린 밤 9시. 약속 장소 또한 어둡고 협소한 뒷골목이었다. 젊은 여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기피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마음을 비우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안 나와도 이상할 게 없고, 나오면 오히려 고마운 일. 모습을 드러내 주기만 한다면 충분히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카페를 향해 걸었다.


골목 입구에 도착했다. 약속 시간 전이니 그녀는 아직 오지 않았으리라. 혹시 모르니 그녀가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으면 30분 정도는 더 기다려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약속 장소로 다가섰다. 그런데 세상에나, 카페에 다다라서 보니 그녀가 불 꺼진 카페 앞 노천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카페 직원이자 자신의 친구인 다나와 함께 말이다. 감동의 물결이 골목을 통으로 휩쓸었다. 


타냐와 다나가 도심의 볼거리들 중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꼽은 우즈호로드성, 우즈호로드, 우크라이나


그녀들의 인솔로 근처를 산책하기 시작했다. 지역을 대표하는 몇몇 볼거리도 구경했다. 이후 그녀들의 단골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맥주를 마셨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지역 청년들에게 각광받는 장소인 듯했다. 곧이어 그녀들의 학교 친구 몇 명이 실내로 들어왔다. 다른 테이블에 앉으려고 했던 그들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우리 테이블을 향해 다가왔다. 곧이어 우리 좌석의 곳곳에 엉덩이를 끼워 넣고는 나를 향해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들의 물음에 맞춰 개인 신상, 여행 이력, 한국의 이모저모 등을 낱낱이 실토하던 중 내 직업과 관련된 항목에 이르러 그들이 작품을 보여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마침 한국에서 인화해 온 사진들이 가방에 들어 있었다. 


사진에 대한 반응은 아주 좋았다. 타냐가 약속 장소에 등장하면 충분히 보답해야겠다고 다짐을 해 둔 상황이라 그들 모두에게 사진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타냐의 친구 자격으로 그들과 어울리는 중이어서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고 싶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한 장씩 선물로 주고 싶다고 내가 얘기하자 그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게까지 기뻐할 필요는 없는데 싶으면서도 내심 기분은 좋았다. 가장 먼저 나선 이는 가장 크게 함성을 질렀던 타냐였다. 전광석화보다 빠른 속도로 사진 한 장을 낚아챈 그녀는 두 손을 치켜올리며 만세삼창을 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었는데 달라 소리는 못한 채 군심만 삼키고 있었던 게다. 


타냐가 고른 사진은 몽골 고비사막에서 찍은 모래 언덕 사진이었다. 처음에 구경할 때부터 그 사진 앞에서 감탄을 거듭하던 그녀였다. 개인적으로 아끼는 작품이었는데 타냐가 골라서 다행이었다. 다른 이들 역시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서 책갈피에 챙겨 넣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런데 타냐는 책갈피나 다른 안전한 곳에 보관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상하 양쪽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쥔 채로 사진을 계속 들고 있었다. 헤어질 때까지 몇 시간을 그런 상태로 있었다. 사람이나 사물에 부딪히기라도 할까 봐 온 신경을 쏟아 사진을 보호하는 모습이 감동을 자아냈다. 그동안 반갑거나 고마운 이들에게 꾸준히 사진을 선물하면서 여행했고, 그들 대부분은 사진을 소중히 보관했지만 타냐만큼은 아니었다. 사진 찍는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예우를 타냐가 선사해 주고 있었다. 작품을 고가에 구입해 아무 데나 방치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감동적인 일로 기억될 듯했다.


밤 풍경을 구경하러 가자는 그들의 제안으로 거리로 나섰다. 올레흐를 처음 마주친 순간이 이때였다. 타냐의 또 다른 친구 무리에 그가 섞여 있었다. 시끌벅적 인사를 나누는 그들 사이에서 올레흐가 대담하고 도발적인 태도로 말을 걸어오면서 관계가 열렸다. 타냐 일행의 보호를 받으며 밤거리를 신나게 쏘다니기 시작했다. 부산스럽지만 싱그러운 순간들이 내 걸음 주변을 수놓았다.


야경투어 출발 직전, 우즈호로드, 우크라이나


이튿날부터는 올레흐와 주로 시간을 보냈지만 하루에 한 번씩은 타냐도 함께 만났다. 여행자가 자주 드나드는 곳이 아니기에 한국에서는 흔하디 흔한 나도 거기에서는 귀했다. 더욱이 동양인은 가뭄에 콩 나듯 찾아드는 곳이었다. 영어 솜씨가 좋지만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타냐에게는 외국인 친구가 거의 없었다. 한국인 친구는 당연히 내가 최초였다.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니지만 그 시절의 타냐에게는 그마저도 특별한 사건이기에 우즈호로드에서 내가 사귄 최초의 친구는 그녀라는 사실을 이따금 타냐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소중한 인연으로 여기고 있다는 속마음의 표현이었다. 그녀가 나와의 인연을 뜻깊게 생각하는 만큼 나도 그렇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타냐는 올레흐에게도 귀중한 친구였다. 지역 안팎을 함께 여행한 며칠간 올레흐는 이따금 타냐의 존재를 입에 올렸다. 그녀를 대하는 마음이 아주 각별했는데 겉보기와는 달리 흔치 않은 진솔함이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자신의 취향에 대한 각성 없이 유행에만 열광하거나 주변의 풍문에 시끄럽게 몰두하는 애들과는 다르다는 설명이었다.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친구가 타냐라고 했다. 진솔함이라는 가치를 그녀 스스로도 소중히 여기고 있고, 그래서 남다른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나와의 약속을 지킨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첫인상은 맑았고, 첫 대화는 담백했던 타냐였다.


우즈호로드를 떠나오는 날, 타냐는 아침 일찍 터미널로 나를 배웅 나왔다. 내가 버스에 무사히 탑승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올레흐에게서 이미 전해 들은 상태였다. 버스에 오르는 나를 향해 타냐는 집에서 만든 샌드위치 도시락과 알록달록한 색상의 팔찌를 내밀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타냐가 보는 앞에서 팔찌를 손목에 채웠다. 팔에 매달아 놓고 보니 색상과 스타일이 다른 팔찌들과도 보기 좋게 어우러지는 듯했다. 몇 개의 팔찌가 매달린 내 손목을 남몰래 쳐다보며 선물을 계획했을 타냐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샌드위치 도시락은 오래도록 먹지 못했다. 이른 아침 건네받은 도시락을 먹은 시각은 늦은 저녁. 하루 종일 배가 고팠지만 아까워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타냐와 올레흐, 포크 뮤지엄, 우즈호로드, 우크라이나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56th 퍼포머

: Tania Chuchka


- 국적: 우크라이나

- 촬영지: 우즈호로드, 우크라이나


발음 좋은 영어를 구사하는 18세 여대생 타냐는 희박한 현지 정보와 언어불통의 문제를 안고 우즈호로드를 떠돌던 나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였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올레흐와의 인연도 없었을 것이다. 공수표가 자주 남발되는 여행길 위에서 신뢰를 선사해 주어 더욱 고마웠다. 낯선 도시를 허랑하게 떠도는 나를 배웅하겠다고 귀하디 귀한 아침잠을 물리고 터미널로 나와 준 모습도 뭉클했다. 타냐가 선물로 준 팔찌는 지금도 내 손목에 잘 걸려 있다. 밝고 명랑한 타냐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심성 고운 그녀는 지금도 그 길목에서 예의 그 함박웃음을 꽃피우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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