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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Jan 23. 2019

21. 우리 안의 자연성은 어디로 갔는가_슬로바키아

나를 무너뜨리지 못하는 시련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하이 타트라 산맥, 슬로바키아




평화가 사방으로 흐드러졌다. 숙소까지 걸어오는 동안 호젓한 풍경들을 계속 지나쳤지만 방향 탐색하랴, 무거운 짐 추스르랴 주변 경관을 충분히 음미할 여유가 없었다. 여장을 풀었으니 마을이 선사하는 신선한 기운부터 먼저 만끽해야 할 터였다. 거리로 나서자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도심에서 도보로 30분가량 떨어져 있는 마을은 일체의 소음 없이 고요했다. 다들 피리 부는 소년이라도 따라갔는지 행인 하나 보이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가지가 겨드랑이를 들썩이는 소리만이 귓가를 맴돌 뿐이었다. 개울로 다가서자 맑고 깨끗한 물길이 꼬리를 차박차박거리며 내 발 앞으로 흘렀다. 그 청아한 음색 사이로 나뭇가지들이 몸을 비틀며 토해내는 낮은 신음소리가 이따금 뒤섞였다. 


일주일 안팎으로 예상했던 우크라이나를 20여 일이나 여행하면서 체력을 잔뜩 소진했다. 그만큼 끌림이 컸지만 언어 장벽과 정보 부족에 끊임없이 시달리다 보니 에너지 소모를 피할 수가 없었다.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적었던 탓에 자존감도 하락했다. 축 늘어진 몸뚱이를 끌고 도착한 곳은 슬로바키아 북부의 산악 도시 포프라드. 풍요로운 숲 지대가 있다기에 열차를 잡아타고 달려왔다. 그동안 여행하면서 대자연 속에서 고양감을 자주 얻었다. 힘이 부치는 순간마다 어김없이 나를 들어 올려 준 대자연이었기에 커다란 신뢰를 가슴에 품고 포프라드에 발을 들였다.  


성수기를 지난 숙소는 함성이 물러간 운동장처럼 덩그랬다. 나만이 유일한 숙박객. 휴식이 필요한 때문인지 여백 가득한 실내 풍경이 오히려 안락하게 느껴졌다. 누적된 피로를 풀기 위해 예약한 독방의 상태는 꽤 훌륭했다. 원래 3인용 시설인지 싱글 침대 외에 더블 침대도 하나 더 놓여 있었고, 소파와 장롱, 오디오와 TV도 있었다. 크기도 만족스러웠고, 채광 상태도 좋았다. 천정 창문을 투과한 햇살의 줄기가 아침마다 내 가슴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그것만으로도 흡족한데 유일한 숙박객이라는 이유로 주방과 거실과 샤워실까지 숙소의 모든 공간을 독점했다. 밖으로도 평화, 안으로도 평화. 아주 오랜만에 온전한 고요를 맞이했다.


도시 외곽의 전원주택들, 포프라드, 슬로바키아


쉬엄쉬엄 인근을 구경하며 원기를 회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틀쯤이 지나자 복부에서 연료가 차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트레킹으로 심신을 해독하기 위해 찾아온 길이었다. 이 정도면 산에 오를 수 있겠다 싶어 하이 타트라 산맥의 심장부에 자리한 스타리 스모코베츠 인근으로 숙소를 옮겼다. 가서 보니 트레킹 코스가 길이와 경로별로 꽤 다양했다. 적당한 곳을 추천받을 요량으로 관광 안내소의 문을 두드렸다. 상냥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한 여성 안내원은 지도를 펼쳐 코스별 상태를 꼼꼼하게 설명했다. 지역색이 묻어나는 소박한 태도가 인상적이어서 이 지역 출신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하이 타트라의 자세한 면모가 궁금하던 차였다. 마침 안내소가 한산하기에 지역의 내력을 그녀에게 좀 더 물었다. 예상했던 대로 친절한 답변들이 돌아왔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니 그녀는 자연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 울창한 숲으로 겹겹이 에워싸인 자신의 고장에 대해서도 크나큰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숲이 길러 준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깊이 감사하는 듯 보였다. 안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자연 예찬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하이 타트라가 그 모습 그대로 오래도록 보존되었으면 한다기에 나 역시 같은 마음임을 알렸다. 그 일환으로 ‘I am a forest’라는 프로젝트를 들고 여행한다는 사실도 말해 주었다. 


바로 전에 머물렀던 슬로바키아 제2의 도시 코시체에서도 관광 안내소에 들렀다가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슬로바키아에서의 최대 관심사가 하이 타트라였던지라 안내원에게 코시체와 더불어 하이 타트라에 대한 정보를 추가로 문의했다. 코시체의 정보만 취급하고 있어서 하이 타트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하기에 알겠다고 대답하고 돌아서려는 찰나, 그녀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안내 데스크 뒤편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그녀는 지도와 카탈로그를 잔뜩 들고 등장했다. 창고를 뒤져 관련 유인물을 몽땅 찾아온 것이었다. 친절하기만 해도 고마운데 괜한 수고까지 해 주니 나로서는 더더욱 고마울 따름이었다. 거기에 더해 성격마저 밝고 쾌활해 정보를 문의하는 내내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녀가 발산하는 건강한 기운이 프로젝트에 스며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I am a forest’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참여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충분한 소통 후 참여를 청해 오고 있었지만 워낙 밝고 건강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그녀인지라 놓치기가 아쉬웠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녀가 촬영을 마무리한 후에는 그녀의 동료도 카메라 앞에 섰다. 한국에서 인화해 간 사진을 두 사람에게 선물로 한 장씩 건넨 후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게 바로 며칠 전이었다.

 

구시가, 코시체, 슬로바키아


이번 역시 관광 안내원의 자연 사랑이 남달라 새로운 인간 숲 친구를 맞이할 수 있을 듯했다. 숲 지대에서 나고 자란 데다가 대자연을 향한 깊은 애정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그녀였다. 그 일대의 나라들을 통틀어 최고의 명산이 자신의 고장에 자리 잡고 있으니 참여를 거부할 리 없었다. 더욱이 트레킹 코스를 안내해 주는 모습이 여간 친절하고 자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프로젝트 참여 여부를 묻는 내 질문에 그녀가 의외의 대답을 했다.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것. 예상치 못한 차가운 대답에 갑자기 기운이 쭉 빠졌다. 친절하게 안내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전한 후 조용히 관광 안내소를 빠져나왔다. 


거절당하는 기분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사실 그동안에도 여러 번 거절을 당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빌뉴스의 한 호스텔에서 미국인 한 명과 장시간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숙소에서 일을 거드는 조건으로 무료로 잠자리를 제공받으며 지내던 친구였다. 어느 날엔가 그가 여행의 사연을 물어오기에 질문에 맞춰 대답을 하다가 ‘I am a forest’ 프로젝트를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목표와 방향성을 전해 들은 그는 멋진 프로젝트라고 말하며 나를 추켜세웠다. 프로젝트의 면면에 조목조목 공감을 표하는 데 더해 자연보호의 중요성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힘주어 밝혔다. 참여 의사를 우회적으로 전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충분한 모습이기에 촬영에 응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한껏 화통했던 그의 안색이 180도로 바뀌었다.  


정색한 얼굴로 뱉어대는 그의 변명은 궁색했다. 간단히 이야기해도 알겠다고 할 참이었는데 묻지도 않은 거절 사유에 대해 제 발이 저린 사람마냥 장황하게 떠들어 댔다. 프로젝트를 큰 소리로 예찬하는 것도 모자라 자연 사랑의 소신까지 보탠 그였다. 호인의 풍모를 적극적으로 연출하던 바로 전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양새. 횡설수설하는 그의 표정 위로 현대 사회의 숨은 암부가 습자지처럼 비쳤다.


스트로브스케 호수, 하이 타트라, 슬로바키아


여행을 시작할 때보다 맷집은 좋아졌다지만 거절은 늘 일정한 좌절감을 나에게 안기고 있었다. 대자연에 대한 애착과 연대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피력해 온 이들에게 거절을 당할 때면 환멸감마저 들었다. 기댈 곳 없는 머나먼 땅에서의 거절은 파괴력이 아주 강했다. 기운이 잔뜩 소진된 날에는 괜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밀려들기도 했다. 아쉬울 것 없는 내가 뭐하러 생면부지의 이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다니나 싶었다. 쓸 데 없는 고생하지 말고 그냥 좋은 경치, 좋은 음식, 좋은 잠자리만 찾아다닐 걸 그랬나 생각했다. 남들도 다들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다. 프로젝트의 의미를 곱씹을 때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며, 그게 이번에는 나라는 결론을 얻었다. 혼자서 꾸역꾸역 밀어붙이기가 쉽지 않았지만 숲의 시작도 한 톨의 작은 씨앗일 터였다. 그 결실 역시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었다. 프로젝트는 주체적인 여정을 계속 이끌어주고 있는 강력한 동력이기도 했다. 새로운 인연과 맞닿은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창조적인 행위가 프로젝트 촬영이었다. 참여자의 얼굴에 피어나던 화사한 기운 역시 프로젝트가 이끌어 낸 작지만 분명한 창조적 결실이었다. 여행만 하기에도 벅찬 와중에 포기하지 않고 프로젝트를 밀어붙일 수 있는 이유였다. 적지 않은 이들이 지지와 격려를 계속 보내오고 있었다. 이듬해에 예술 축제를 함께 개최하기로 약속한 한국의 동료 예술가들, 그동안 프로젝트에 참여해 준 세계 각국의 친구들, 프로젝트의 경과를 꾸준히 확인하면서 그 의미와 방향에 공감을 표해주는 이들을 떠올리며 다시 힘을 냈다. 


새로운 인간 숲 친구를 맞이하는 일에 실패한 채로 관광 안내소를 빠져 나온 내 앞에서 진짜 숲이 가슴팍을 활짝 벌리고 서 있었다. 이제 그 품에 안길 차례였다. 신발끈을 질끈 동여매고 하이 타트라의 푸른 내장 속으로 뛰어들었다. 안에서 만난 하이 타트라는 밖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산맥의 하부를 따라 동에서 서로 길게 이어지는 그림 같은 전원주택의 행렬, 아름드리나무가 장관을 이룬 울창한 숲, 지상의 풍경을 거울처럼 비춰 주는 맑고 고요한 호수에 이르기까지 일대에서 만난 모든 비경들이 내 몸과 마음을 정화시켰다. 숨을 턱턱 조여 오는 오르막길의 고생만큼 육체와 정신이 단단해져 갔다. 우크라이나에서 방전된 의욕도 다시 차 올랐다. 프로젝트를 계속 밀어붙이려면 내 안의 자연성을 다시 회복시켜야 했다. 거절한 이들을 향한 원망을 지우고 그 자리에 다시 이해와 공감을 채워 넣어야 할 것이었다. 숲이 뿜어내는 광대한 원기를 있는 힘껏 흡입하며 대지의 내음이 진동하는 흙길 위를 씩씩하게 걷고 또 걸었다.


트레킹 루트에서 만난 숲, 하이 타트라, 슬로바키아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59th 퍼포머

: Katarina Szaboova


- 국적: 슬로바키아

- 촬영지: 코시체, 슬로바키아


현지의 정보를 문의하기 위해 찾아들어간 코시체의 여행 안내소에서 나에게 온갖 친절을 퍼부었던 친구가 바로 카타리나다. 창고에서 각종 지도와 카탈로그를 뒤져 가며 열과 성의를 다해 여행자를 도우려는 모습이 꽤 감동적이었다. 쾌활한 모습이 명랑소녀 혹은 말괄량이를 연상시켰는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덩달아 해피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기분이었다. 바깥 날씨가 화창하기에 촬영 장소는 안내소 앞 화단을 선택했다. 업무 중인 카타리나였지만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나를 따라 안내소 밖으로 나섰다. 카타리나의 뒤에 설치된 화사한 꽃 무더기가 그녀의 밝은 성품과 잘 어울리는 듯했다. 



60th 퍼포머

: Inula Melichova


카타리나의 뒤를 이어 또 다른 안내소 직원인 잉그리드(이눌라)도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카타리나와 마찬가지로 잉그리드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상대와 충분히 소통한 후 프로젝트 참여를 청해 오고 있었지만 이날만큼은 예외였다. 그리 길지 않은 대화 속에서도 두 사람이 꽤 괜찮은 친구들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래 알고 지냈다고 상대의 속내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아니듯 짧은 대화만으로도 상대의 심성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잉그리드를 촬영한 장소 역시 안내소 앞 도로였다. 대학생인 두 사람은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는 중이었는데 이날이 마지막 근무일이라는 것 같았다. 다음날부터 학기가 시작된다고 했다. 날씨만큼 화창한 학창 생활이 이어지길 바라며 잉그리드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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