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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Jan 23. 2019

22. 자본과 사람이 교차하는 길목에서_오스트리아

선진국을 무조건 맹신하지는 말 것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할슈테터 호수, 할슈타트, 오스트리아




오랫동안 손꼽아 기다려 온 순간이 가까워졌다. 수려한 풍광들을 앞에 두고도 바쁜 일정 때문에 스치듯이 여행했던 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구간이 목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허겁지겁 시간에 쫓기며 여행한 탓에 미련이 잔뜩 남았다. 한가한 일정으로 다시 찾아오마 다짐하며 다음 기회를 벼르고 별렀다. 3국 여행의 첫 방문지는 할슈타트. 가장 큰 미련을 남겨두고 온 곳이었다.


먼젓번에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할슈타트는 예전보다 더 수려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재방문 1순위로 꼽아 둔 보람이 있었다. 늦가을에 접어들면서 앙상한 가지들이 깊은 우수를 자아냈던 그때와 달리 최고의 가을 풍경이 도처로 물결쳤다. 풍요한 자태로 늘어선 수목들 위로는 화사한 햇살이 감돌았다. 이상적인 호반 풍경으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어서 한여름에는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고 했는데 성수기를 지나친 때문인지 방문객의 수는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다. 호숫가를 느긋하게 거닐어도 주변의 어깨에 밀려 호수 안으로 빠지는 일은 없을 듯했다.  


지난번에는 문을 닫아 구경할 수 없었던 소금 광산에서는 소금 생산을 둘러싼 7000년의 장구한 인간사가 펼쳐졌다. 선사 시대에 사용되었다던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계단에서도 묵직한 여운이 느껴졌다. 이후 할슈테터 호수의 파노라마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로 자리를 옮겼다. 안전 펜스 아래에서 믿을 수 없는 풍광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명치 아래까지 벌어진 입을 다무는 데 꽤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다시 찾아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또 했다.


마을 끝에서 마주친 농가 풍경, 할슈타트, 오스트리아


전망대 구경을 마친 후에는 마을을 구경했다. 벼르고 별렀던 재방문이기에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 마을 곳곳을 샅샅이 훑었다. 길목을 돌아설 때마다 흡족한 광경들이 고개를 쳐들어 나에게 눈인사를 보내왔다. 그림 같은 길목들이 선사하는 운치에 정신을 뺏긴 나머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민가에 침입하기도 했다. 한가로이 풀을 뜯던 가축들이 민가 뒷마당을 황급히 빠져나오는 내 뒤통수를 향해 멀뚱한 시선을 던졌다. 먼젓번에는 오후 4시부터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했는데 고맙게도 해는 마지막 배가 운행하는 6시가 넘어서도 떨어지지 않았다. 청명한 날씨에 에워싸인 할슈타트는 일급수의 여행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할슈타트에서는 분 단위로 행복했다지만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유쾌한 경험만 하지는 않았다. 불미스러운 흐름의 신호탄이 발포된 곳은 음료를 사러 들어갔다가 여종업원에게 좀도둑질 혐의로 검문당한 빈의 기차역 매점이었다. 동양인의 외모와 앞뒤로 멘 짐이 검문의 이유였다. 내가 음료를 고르고 있는 동안 매점에서 사라진 물품은 당연히 없었다. 모욕감이 치솟기에 맞불을 놓을까 하다가 결백을 증명하는 게 먼저겠다 싶어 가방을 열어 이상 유무부터 확인시켰다. 경찰을 불러 시비를 가린 뒤 정중한 사과를 요구하는 게 좋았겠지만 당시에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런 생각을 할 경황이 없었다. 갑자기 상냥해진 그녀를 위아래로 독살스럽게 훑으며 경고의 제스처를 던지고 매점을 빠져나왔으나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른 분노는 한참 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리투아니아에서 3일가량 시간을 함께 보냈던 오스트리아 여행자는 자신의 동네 부근을 지나게 되면 여분의 방이 있는 자신의 집에서 묵으라고 했던 약속을 번복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경험했던 몇몇 모습을 통해 그가 태도를 바꾸리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지만 둘러 대는 핑계가 영 엉성해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정담이 오고 가는 풍경을 기대했던 짤츠부르크의 숙소는 가서 보니 기업화된 대형 호스텔이었다. 여행자들 간의 교류가 활발한 중소형 숙소들에서 지내다가 갑자기 거대한 숙박 공간으로 들어서는 느낌이 선득했다. 공간의 기운에 압도된 여행자들은 서로에게도 냉담했다. 먼저 말을 거는 놈이 지는 분위기. 규모의 경제는 사람을 만나러 달려온 여행자들의 교류 의지를 헛기침 하나로 손쉽게 가라앉혔다.


미라벨 정원, 짤츠부르크, 오스트리아


멋진 친구들과의 만남을 계속 이어가며 희망을 키워온 여정이었기에 숙소 분위기가 그렇든 말든 내 방식을 고수하기로 했다. 저녁 무렵 주방에서 마주친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말을 건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숙소는 주방에서 취사를 하려면 각종 조리 도구를 투숙객 각자가 세트째로 빌려야 하는 이해할 수 없는 규칙을 내세우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런 줄 모르고 주방을 두리번거리며 공용 조리 도구를 찾고 있었다. 그 상황을 계기로 말문을 텄다. 나로서는 두 달 반 만에 만나는 한국인들이었기에 반가운 마음이 더욱 컸다. 다음날에는 시내 구경도 같이 했다. 오랜만에 한국어를 구사하며 타향만리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되새기는 기분이 아주 흡족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지인 미라벨 정원부터 이색적인 간판들로 유명한 게트라이데 거리에 이르기까지 발길 닿는 곳들에서 옛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지친 다리를 쉬어가기 위해 분위기 좋은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비를 아껴가며 여행한다는 두 사람이었지만 카페에서 낭만을 즐기는 시간만큼은 돈이 아깝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의 태도가 대단히 무례했다. 현지어로 적힌 메뉴를 내놓기에 취급하는 차의 종류를 물었는데 퉁명스럽다 못해 무시하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우회적인 방식의 인종 차별이었다. 전날에는 혼자서 거리를 걷다가 현지인으로 보이는 백인 사내가 아랍계 사내의 얼굴에 주먹을 꽂는 모습을 목격했다. 성미 고약한 귀족이 권력을 앞세워 노예를 길들이는 듯한 광경. 경제 권력을 등에 업은 또 한 번의 인종 차별이었다. 이전의 여행에서는 단정한 모습으로 기억에 남았던 오스트리아가 다르게 보였다.


인종 차별의 맛이 담긴  차와 커피, 짤츠부르크 대성당 광장 인근, 짤츠부르크, 오스트리아


두 달 반 만에 한국인들과 마주하면서 정체성의 문제를 떠올리던 차였다. 우리말이 생각처럼 편하게 나오지 않아 당황스러워하고 있기도 했다. 입을 놀릴 때마다 뇌에 과부하가 걸리는 느낌을 받았고, 말을 내뱉다가 버벅거리는 경우도 잦았다. 수 년짜리 여행도 아닌지라 우리말 감각에 관한 한은 아무 염려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구어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버퍼링이 발생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로빈슨 크루소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거쳐 온 국가들 다수는 소비에트 연방 소속이었다가 분리 독립한 역사를 품고 있었다. 지금은 고유의 언어를 되찾았지만 소비에트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자국의 언어가 버젓이 존재함에도 러시아어가 공식어라는 이유로 모국어는 가정에서나 사용할 수 있었다. 언어를 잃지 않기 위해 문학이나 노래를 활용하기도 했다는데 공과 사 전반에 걸쳐 러시아어의 사용 빈도가 월등했던 이상 얼마간의 언어 소실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독립과 더불어 각국은 언어 체계를 재정비했고, 그 결과를 커리큘럼화한 후 학교 교육을 통해 후세들에게 계승하기 시작했다. 우리 역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언어 파괴를 경험했던지라 그들의 역사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인종 차별의 맛이 담긴 커피를 추레한 몰골로 홀짝이노라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느닷없는 모국어 장애도 나에게 물음을 계속 던져오고 있었다. 언어는 너에게 무엇인가? 소비에트 연방은 왜 하위 민족들의 모국어 사용을 억압했는가? 언어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데 너와 네 민족의 미래는 어떠한가? 오스트리아에서 네가 직간접적으로 겪었던 부조리한 장면들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빈번히 발생하는 이 세계에서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선진국이라는 화려한 수사에 속고 싶지 않아 사안마다 그 본질을 정확히 응시하려 애쓰며 여행해 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인종 차별의 풍경들이 생각을 다시금 자극했다. 지금까지 거쳐 온 극동 유럽의 국가들에서는 거의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었기에 선진 사회의 비인간성이 더욱 씁쓸하게 느껴졌다. 지구촌 패권의 중심부이자 대한민국 현대 문화의 모태인 서구 사회의 숨겨진 표정을 좀 더 더듬어 보기로 했다.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것들이 과연 당연한지도 다시 곱씹어보기로 했다. 서구 사회를 거울처럼 뒤집어서 비춰 주는 동구의 변방국들을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으니까 말이다.


할슈테터 호수, 할슈타트, 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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