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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Jan 25. 2019

23. 다시 변방으로_블레드, 슬로베니아

주변의 모든 존재가 기립하던 풍경

블레드 섬, 블레드, 슬로베니아




울고 웃었던 오스트리아 일정을 마치고 슬로베니아로 넘어왔다. 서구 사회의 민낯이 적나라했던 오스트리아와 접경하고 있음에도 슬로베니아의 분위기는 그와 많이 달랐다. 서구화가 가속되고 있는 동유럽이라지만 그 정도로 비정한 풍경은 아직까지 찾아보기 어려웠다. 블레드도 마찬가지였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나라 최고의 명승이 자리하고 있음에도 마을 곳곳으로 여유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주민들의 표정도 한층 더 평온해 보였다.


재방문을 기다려 왔던 블레드인지라 다시금 발을 들이는 기쁨은 아주 컸다. 물살을 거슬러 고향에 닿은 연어의 기분이랄까. 블레드 호수가 보여 주었던 그림 같은 비경을 오래도록 잊지 못해 찾아온 길이었다. 하여 블레드에서 머무는 내내 호숫가 산책을 반복했다. 테두리의 둘레가 6km라는 블레드 호수를 하루에 두 번씩 돌았고, 앞선 여행에서는 시간에 쫓겨 방문을 생략했던 전망 언덕에도 올랐다. 언덕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일대의 경관은 실로 눈부셨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작은 섬을 배꼽 위에 얹어 놓은 블레드 호수였다. 만물이 호수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블레드에서 호수변의 모든 생명들은 날마다 블레드 섬을 향해 기립했다. 명불허전이 따로 없었다.


전망 언덕에서 바라본 블레드 호수, 블레드,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수보다 규모도 크고 물도 맑은 호수가 가까운 곳에 있다기에 마지막 날에는 버스로 40분 거리에 있는 보힌 호수에도 다녀왔다. 205cm 장신의 네덜란드 여행자 토마스도 그날 만났다. 정류장에서 보힌 호수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꺽다리 여행자 하나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무척이나 서장훈한 광경. 토마스였다. 이제껏 만난 이들 중 최장신이어서 신기한 마음에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나란히 서 보니 키 차이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눈을 맞출 때마다 고개를 45도로 꺾어야 했다.


보힌 호수행 버스에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큰 키로 인한 여행의 애로사항이 궁금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신의 신장에 맞는 침대가 없어 날마다 고생을 한다는 대답에 내 짜리 몽땅한 몸뚱아리가 갑자기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한국에서 온 다윗과 네덜란드에서 온 골리앗이 45도 각도로 시선을 맞추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사이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커다란 호수 하나가 물비늘을 반짝이며 우리를 반겼다. 보힌 호수였다.  


토마스와 대화를 나누며 호숫가를 트레킹하는 사이 45도로 꺾은 목에 통증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대신 마음은 점점 더 차분해졌다. 토마스의 말투가 조곤조곤한 때문이었다. 매너마저 좋아 편안한 마음으로 걸음을 맞출 수 있었다. 신사적인 태도 이면으로 날카로운 직관을 이따금 번득이기도 해 대화의 식감도 꽤 쫄깃쫄깃했다. 네덜란드의 자유로운 문화적 기풍과 한국의 각박한 사회 환경을 서로 맞대는 즐거움이 컸다. 호숫가가 선사하는 운치까지 더해져 토마스와 나 사이로 기분 좋은 평화가 흘렀다.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 이상이 솟아 있는 토마스, 케이블카 안, 보힌, 슬로베니아


5km쯤 걸었을 무렵 케이블카 탑승장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토마스가 전망대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훌륭하다는 정보를 들었다고 이야기하기에 멋진 경치를 기대하며 케이블카에 몸을 실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망대 꼭대기에 서자 대자연이 직접 표구한 화폭이 깎아지른 벼랑 아래로 드넓게 펼쳐졌다. 블레드 호수 전망대에 버금가는 풍광. 저 끝까지 이어진 줄리안 알프스의 웅장한 풍모에 둘이서 높이를 달리 하며 탄식을 쏟아냈다.  


보힌 호수를 유랑한 후에는 블레드에 맡겨둔 짐을 챙겨 저녁 버스로 류블랴나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예정에 없던 전망대를 오르는 바람에 시간이 촉박해졌다. 하행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서 시계를 보니 버스의 출발 시각이 가까워진 상황. 호숫가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남은 구간을 천천히 둘러보고 싶다는 토마스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고 분주하게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호수의 나머지 반 바퀴를 뛰다시피 걷는 발길이 몹시 숨찼지만 정신없이 걷는 와중에도 아름다운 호수의 자태가 시야를 계속해서 압도했다.


호수변에서 마주친 풍경, 보힌 호수, 보힌, 슬로베니아


숨을 헐떡거리며 도착한 버스 정류장에는 젊은 여성 하나가 홀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지 낯이 익은 느낌이어서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전날 저녁에 호수를 산책하다가 서로 스쳐 지나갔다. 지루함이나 달랠까 싶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한국인이면 다시 한번 우리말을 사용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다. 아쉽게도 그녀는 홍콩인이었다. 이름은 매기. 영국계 항공사에서 근무하는 승무원이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짧게 끝났을 대화가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듯 그녀 역시 새로운 인연을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한창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블레드행 버스가 정류장 앞에 멈춰 섰다. 대화에 가속이 붙은 상황이라 버스에 나란히 앉았다. 대화는 매기가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대인 업무를 능숙하게 처리해야 하는 승무원답게 대화를 끌어가는 솜씨가 훌륭했다. 자신의 직업에 만족한다니 기본적으로도 사람과 부대끼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일 테지만 현업에서 단련한 대인 응대 기술도 수준급인 듯했다. 경쾌한 대화가 차 안으로 흐르는 동안 네모난 차창 밖에서는 대자연이 분주하게 손을 놀리며 액자를 바꿔 끼웠다.


장기 휴가를 내고 반년 일정으로 뮌헨에서 체류하고 있던 매기는 여유 시간을 이용해 슬로베니아를 여행하는 중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뮌헨행을 결정했단다. 세계 곳곳을 누비는 직업이다 보니 한국에도 여러 번 왔다고 했다. 제주도에도 가 봤다며 섬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들에 대해 커다란 애정을 드러냈다. 대화의 분위기가 워낙 활기차 SNS로 친구도 맺었다. 내 계정의 게시물을 잠시 확인한 그녀가 ‘I am a forest’ 프로젝트의 작업물들을 보고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물어 왔다. 내 설명을 들은 매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을 표하며 자발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혔다.


블레드 외곽의 전원주택들, 블레드, 슬로베니아


버스 안의 수다가 속도 방지턱 위로 튀어 오르길 반복하는 사이 익숙한 풍경들이 시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블레드였다. 버스에서 내려 시계를 보니 류블랴나행 버스의 출발 시각이 임박한 상황. 촬영을 서둘러야 했다. 작업 장소로 정한 호숫가를 향해 허겁지겁 발을 놀리는 내 뒤를 메기가 힘찬 걸음으로 따라왔다. 내가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메기는 그루터기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정성스럽게 자필 메시지를 적었다. 쪼그리고 앉은 자세가 불편했을 텐데도 그런 내색 없이 정성껏 글자를 새겨 넣는 그녀의 뒷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기내에서 승객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빈틈없이 깔끔한 모습과는 정반대의 면모이기에 더욱 보기 좋았다. 내가 그녀를 향해 셔터를 누르는 동안 화사한 오후 햇살이 그녀를 따뜻하게 감쌌다. 며칠 후 메기는 자신의 SNS 계정에 후일담을 올렸다. 격려의 기운이 나를 따뜻하게 감쌌다.


이 여행의 마지막 정거장에서 저는 서울에서 온 차영진을 만났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제 국적에 대한 그의 물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나라, 여행 경험, 직업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그가 작가-사진작가-예술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계를 여행하며 계속해서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습니다.

저는 자신의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시도를 지속해 나가는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현재 그는 동계올림픽 경기 개최를 핑계로 숲을 파괴해 스키 슬로프를 짓는 당국을 겨냥해 'I am a forest'라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을 전심으로 존경합니다.

또한 저는 그가 자신의 작품 사진 중 하나를 선물로 주겠다고 해 너무 기뻤습니다. 모든 사진들이 너무나 좋아서 고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두 점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는 제가 사진을 바라볼 때마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선사할 거라며 두 사진 중 하나를 권했습니다. 위의 사진이 선물 받은 그것입니다.

프로젝트의 성공을 기원하며 여정 속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길 바랍니다. 슬로베니아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슬로베니아의 아름다운 경관보다도 훨씬 귀중합니다.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61st 퍼포머

: Thomas Husken


- 국적: 네덜란드

- 촬영지: 보힌, 슬로베니아


205cm의 신장에 다리도 길쭉한 토마스는 그 신체 조건에 비해 의외로 천천히 걸었다. 덕분에 호수의 절반을 아주 여유롭게 구경했다. 어쩌면 나에게 보폭을 맞춰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촬영은 케이블카 전망대에서 했다. 그 아래로 펼쳐지는 숲의 장대한 파노라마가 무척 훌륭했다. 혼자 서 있는 사진이어서 토마스의 신장을 가늠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는데 종이 대 사람의 비율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의 키를 어림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그걸로도 부족하다면 같은 방식으로 아래의 사진과 비교해 보는 것도 방법이겠다. 프로젝트의 최장신 기록은 아직까지도 토마스가 보유하고 있다.  



62nd 퍼포머
: Maggie Cheung

- 국적: 홍콩

- 촬영지: 블레드, 슬로베니아


보힌 호수를 하이킹하고 블레드로 돌아가는 길에 매기를 만났다. 여느 때 같았으면 짧게 끝났을 대화가 성격 활달한 매기의 주도로 한참 동안 이어졌다. 당시 장기 휴가를 내고 반년 일정으로 뮌헨에 체류하고 있던 매기는 그로부터 얼마 후 예정했던 일을 무사히 마무리하고 홍콩으로 돌아갔다. 곧바로 직장으로 복귀했다는 것 같다. 지구촌 곳곳을 누비는 승무원답게 매기는 세계 각국에서 찍은 사진을 자신의 SNS에 올리곤 한다. 최근에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찍은 사진을 올렸다. 사진 속의 표정은 예의 모습 그대로 늘 쾌활한 편이다. 연락을 이따금 주고받으며 서로의 근황을 묻곤 하는데 매번 밝은 목소리를 들려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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