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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Jan 26. 2019

24. 믿음이 앞서야 관계가 열린다_피란, 슬로베니아

모든 인연은 제 나름의 무늬를 지니는 법

성 조지 성당, 피란, 슬로베니아




슬로베니아 서쪽 끝의 한적한 바다 마을 피란에서도 인연의 물길은 계속 열렸다. 그 시작은 숙소에서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물어보았다가 말을 트게 된 한국인 유학생 고범준 군이었다.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다가 병역 문제로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는 그는 만료 직전의 여권으로 유럽 국가들을 유랑한 후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첫 대면 이후 여러 날을 함께 보내면서 그의 개인사를 조목조목 전해 들었다. 수더분한 겉모습에 비해 인상적인 이력이 많았다. 


그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시기는 고등학교 때. 미국 현지에서 고교 3학년에 편입해 학업을 이어나가다가 체육 선생님의 권유로 육상을 시작했다. 단거리 실력이 학교에서 으뜸이어서 100미터와 계주 등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당시 그의 100미터 기록은 11.6초. 주력 좋기로 소문난 손흥민은 물론,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의 젊은 박지성보다도 기록이 빨랐다. 전교생의 환호를 등에 업고 트랙을 질주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자니 내가 다 짜릿했다. 


이후 그는 매사추세츠주에 위치한 대안 교육 기반의 사립 인문 대학인 햄프셔 칼리지에 진학했다. 학교의 분위기가 워낙 자유분방한 데다가 학생의 취향을 전적으로 존중하는 학풍을 지닌 교육 기관이라서 맨발로 학교 생활을 했다는데 전위적인 성향의 학우들이 어찌나 많은지 자신은 오히려 평범한 축에 속했다고 했다. 일상은 그러했지만 스포츠에서는 역시 상당한 두각을 나타냈다. 이번에는 축구로 학교를 주름잡았다. 아드리아해가 곁으로 펼쳐지는 분위기 좋은 노천카페에 앉아 푸른 계절의 사연을 전해 듣는 기분이 산뜻했다. 


그는 운동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소양도 풍부했다. 대안 교육 기반의 대학에서 학업을 수행한 때문인지 대화에 오른 화두들을 보편적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그 이면이나 빈틈까지 빠짐없이 훑어냈다. 여유롭지만 촘촘하고, 진솔하지만 예리한 대화가 자주 오고 갔다. 다부진 기개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패기 있게 걸어 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호방하고 굵직굵직한 언행이 어울릴 것 같은 삶의 이력과 달리 그 태도는 오히려 느긋하면서도 세심했다.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녔음에도 힘 자랑을 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서로 재촉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늘어지지도 않았다. 볼거리를 다 찾아다니면서도 한껏 헐렁했다. 그러면서도 상호 간의 배려는 빈틈이 없었다. 그와 함께 피란 곳곳을 느린 걸음으로 돌아보는 즐거움이 아주 컸다.

 

언덕 위에서 항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범준 군, 피란, 슬로베니아


한동안 중단했던 카우치서핑을 재개한 직후였다. 수도인 류블랴나에서 한 차례 카우치서핑을 한 후, 다음 구간에서 접촉해 볼 만한 카우치서퍼가 있는지 호스트 목록을 검색했다가 피란 근교에 사는 이들 중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친구를 발견했다. 메시지를 보내자 적극적인 환영 인사를 담은 답장이 되돌아왔다. 하지만 결혼식 참석을 위해 다른 지역에 있다는 소식. 언제 거주지로 돌아오느냐고 되물었더니 내가 그 지역을 떠날 무렵에야 돌아올 것 같단다. 예정대로라면 서로 엇갈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개성 있는 사진작가라는 점도 흥미로웠거니와 맞닿기만 한다면 좋은 인연이 될 것 같은 예감이 있었다. 


마음과는 달리 만남을 성사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체류 기간을 당초의 계획보다 연장해야 했고, 그녀는 그녀대로 바쁜 일정을 쪼개야 했다. 막상 만나 보면 공감대가 부족할 수도 있는 데다가 양쪽 다 연락이 손쉬운 처지가 아니어서 체류 기간을 연장할지 말지 고민해야 했다. 내가 그녀와 어렵사리 연락을 이어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범준 군은 그녀와의 만남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저쪽의 반응이 다소 심드렁해 보이는 데다가 인연의 흐름도 매끄럽지 않은데 그렇게까지 열심히 관계에 임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자신이라면 포기했을 거라고 했다.  


사실이 그랬다. 근근이 연락을 이어나가긴 했지만 답신에서 신통치 않은 인상을 느낄 때가 많았다. 만남의 기대가 가득한 듯 보였으나 실제로도 그런지는 활자의 겉 표정만으로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겪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법. 속는 셈 치고 며칠 더 버텨 보기로 했다. 범준 군과의 인연처럼 처음부터 순조롭게 흘러가는 관계도 있지만 난관을 넘어서야만 우정의 문을 열 수 있는 관계도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피란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친 상황이었지만 조금 더 인내심을 발휘해 보기로 했다. 그녀에게도 그 사실을 알렸다. 

 

지역의 아고라 역할을 하는 타르니티 광장, 피란, 슬로베니아


내가 자신에게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텐데도 그녀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빨리 알려줘야 계획을 바꿀 수 있는데 이렇다 할 신호를 보내오지 않았다. 말로는 어서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만남의 의지를 확실하게 피력하는 것도 아니어서 풍향계의 불규칙한 움직임을 넋 놓고 바라보아야 했다. 느긋하고 관용적인 범준 군조차 상황을 회의적으로 바라볼 정도니 장밋빛 전망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듣기 좋으라고 접대용 멘트를 날리고 있는데 혼자 순진하게 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실 애매한 그녀의 반응에 짜증도 여러 번 났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견디고 있자니 인내심이 자주 흔들렸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만큼의 노력을 기울이는 게 현명한 일인지 스스로에게 날마다 되묻곤 했다. 그럼에도 그녀를 계속 기다렸다. 만나보기 전까지는 그녀가 처한 상황을 알 수 없기에 괜한 속단은 자제하려고 애썼다. 


하루에도 몇 번씩 침을 꼴딱꼴딱 삼킨 끝에 힘겹게 약속을 잡는 데 성공했다. 당일이 되어 만난 그녀의 이름은 사냐. 예상했던 대로 개성과 색채가 뚜렷한 친구였다. 그녀의 친구이자 또 다른 사진작가인 야네즈도 함께 나왔다. 셋이서 어깨에 카메라를 나란히 메고 인근의 바다와 언덕과 염전을 사이좋게 누비기 시작했다. 같은 직업을 가진 우리 셋 사이로 감수성의 섬세한 파동이 소리 없는 공명을 자주 만들어 냈다. 수려한 풍광들을 만끽한 후에는 야네즈네 집으로 운전대를 꺾었다. 그의 집은 바다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저 아래로 바다가 넓게 엎드린 그의 집 마당에서 두 사람이 차린 소박한 현지식 점심을 들었다. 개인 양조를 하는 야네즈가 자신만의 맥주 창고를 구경시켜 주기도 했다. 그의 추천으로 바디감 진한 맥주 몇 종도 기분 좋게 맛봤다.


야네즈네 집 앞마당에서의 점심식사, 스트룬얀, 슬로베니아


야네즈가 바쁜 일을 처리하기 위해 먼저 빠져나간 후 다시 사냐와 한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는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경험이 있었으나 화려한 성취의 이면에 숨겨진 모순적 상황도 함께 겪으면서 좀 더 독립적인 길을 모색하는 중이었다. 위선에 많이 시달렸는지 사냐의 발언은 육두문자가 끊임없이 등장할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속마음과 겉모습을 분리해야 하는 현실, 속된 목표를 진정한 자기실현으로 포장하게 만드는 사회 환경을 향해 돌직구를 계속 던졌다. 입담은 거칠었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어서 불편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따져 보면 남의 일도 아니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육두문자를 함께 뒤섞었다. 팩트 폭격의 탈을 쓴 욕설이 식탁 위를 미친 듯이 널뛰는 대화는 불편하기는커녕 오히려 한껏 통쾌했다. 


사냐는 안 좋은 일들이 겹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는데 인터넷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보여준 올록볼록한 반응이 거기서 유래한 듯했다. 변화를 꾀하기 위해 여행길에 오르기를 원했지만 일상 속의 많은 일들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때문인지 사냐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도 욕설을 아끼지 않았다. 맞장구의 의미로 내뱉은 내 육두문자와 그녀의 욕설이 허공에서 자주 하이파이브를 했다. 속에도 없는 말은 그동안 많이 해 왔기에 깊은 공감대 위로 청량한 기포들이 솟구쳐 오르는 대화가 오히려 반갑게 느껴졌다. 겉도는 시간 없이 본론으로 뛰어들었음에도 이야기는 감속 없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표정이 처음보다 밝아졌다. 


이후 사냐의 차를 타고 지역의 새로운 볼거리들을 향해 달렸다. 사냐는 자신과 같은 직업을 가진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인상적인 장면을 발견하면 언제든 차를 멈춰 주는 것은 물론, 내가 촬영을 위해 차에서 내릴 때마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 자신을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사진을 찍으라는 말로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오전에 시작한 만남은 결국 밤이 깊어질 때까지 이어졌다. 전통 음식을 맛보게 해 주고 싶다는 사냐의 제안으로 저녁 식사는 한갓진 곳에 숨어 있는 골목식당에서 했다. 서로의 작품도 하나씩 선물로 주고받았다. 지루한 기다림의 끝에서 만난 멋진 하루가 식당 밖으로 저물어 가고 있었다. 믿음을 먼저 주어야 우정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밤. 한나절만에 각별한 우정을 키운 우리 둘의 머리 위에서 별들이 투명한 눈동자를 초롱초롱 반짝였다. 


사냐가 차량의 속도를 줄여준 덕분에 포착한 동네 명물녀. 초상권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사냐의 설명. 포르토로즈, 슬로베니아


사냐의 안내로 해안 도로를 돌아다니다가 만난 아드리아해의 풍경, 스트룬얀, 슬로베니아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63rd 퍼포머

: Jan Brdo


- 국적: 슬로베니아

- 촬영지: 류블랴나, 슬로베니아


카우치서핑 시도를 재개한 슬로베니아에서 첫 숙박 요청에 바로 응답을 받아 현지 카우치서퍼의 집에서 3박 4일을 머물렀다. 수도인 류블랴나에 사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 얀의 집이었다. 도착 당일, 커플 댄스 마니아인 얀의 안내로 댄스 바들을 방문해 장내를 뜨겁게 달군 금요일 밤의 열기를 엿봤다. 이후 요리를 해서 나눠 먹기도 했고, 분위기 좋은 바에서 이안의 친구들을 함께 만나 맥주잔을 사이에 두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얀과도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주로 사회, 정치와 관련된 화두들이었다. 얀은 프로젝트 촬영에도 아주 기쁜 표정으로 임했다. 



64th 퍼포머

: 고범준


- 국적: 대한민국

- 촬영지: 피란, 슬로베니아


처음 만났을 당시 개인실을 별도로 쓰고 있었던 우리는 다음날이 되어 아예 트윈룸 하나를 잡아 공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프로젝트 촬영은 동고동락했던 방에서 했다. 그의 제안으로 침대 위를 촬영 장소로 선택했고, 잠자리에 들기 전 촬영을 진행했다. 그의 침대 바로 옆에 내 침대가 있다. 자유분방한 학풍의 대학에서 공부한 때문인지 그가 내놓은 촬영 아이디어는 신선했다. 자신의 노트북에 있는 가짜 과일 마크를 자필 메시지로 가리고 촬영하자는 것. 마음 같아서는 방 안 벽에 커다랗게 메시지를 적고 싶었다는데 그러면 안 되는 줄 알기에 참았단다. 여러모로 개성 만점인 그였다.


65th 퍼포머

: Janez VOlmajer


- 국적: 슬로베니아

- 촬영지: 스트룬얀, 슬로베니아


야네즈 하면 가장 먼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장면은 역시 그의 집 앞마당에서 보낸 순간들이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풍경도 멋졌지만 앞마당 자체가 선사하는 여유로운 분위기가 더 훌륭했다. 나무와 식물이 어우러진 녹색의 공간에서는 아무거나 먹어도 맛있었고, 아무 짓이나 해도 즐거웠다. 초목은 집 밖으로도 잔뜩 우거져 있었다. 자연이 풍요로운 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인지 야네즈는 성품이 온화했다. 인정도 많았고, 음식 인심도 좋았다. 함께하는 내내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베풀어 준 친절과 배려가 내 마음을 한껏 여유롭게 만들어 주었다.



66th 퍼포머

: Sanja Tosic


- 국적: 슬로베니아

- 촬영지: 스트룬얀, 슬로베니아


샤냐를 촬영한 곳은 야네즈네 집 근처의 숲이다. 재능 있고 감각적인 예술가답게 사냐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그에 맞춰 퍼포먼스를 펼쳤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인간 숲 친구들 중 최고의 노력과 시도를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나무에 한 손으로 아슬아슬 매달려 생명 파괴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장면을 연출하는가 하면, 개구쟁이 같은 모습으로 아름드리나무에 오름으로써 동심의 감정을 끄집어내기도 했다. 최근 사냐는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 소식을 전하는 목소리는 그날만큼 친밀했다. 언제든 환영한다는 얘기를 그때보다 더 분명하게 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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