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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Jan 27. 2019

25. 자아를 찾아다니는 여자_플리트비체, 크로아티아

인생을 이끌어 줄 비전이 길 위에 있었으면 좋겠어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플리트비체, 크로아티아




30분쯤을 기다렸을까. 저쪽에서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른 시각에 출발하는 버스를 잡아타야 했을 텐데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었는지 약속한 시각에 딱 맞춰 도착해 주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크로아티아 북서쪽에 자리한 작지만 운치 있는 갯마을 로빈이었다.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라운지에서 여행 정보를 확인하고 있는데 하루 일정을 마친 그녀가 실내로 들어섰다. 주인에게 붙임성 있게 말을 걸고, 숙소에서 키우는 고양이를 향해 애정을 쏟아붓는 모습이 산뜻한 인상을 선사했다. 그날 밤, 보스턴에서 온 미국 여행자 하나가 말을 걸어오면서 대화의 장이 열렸다. 그녀를 포함해 셋이서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주된 화두는 현대인의 사고가 어떻게 조작되고 있는지였다. 매스미디어에 의해 대동소이한 형태로 현대인의 사고가 프로그래밍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도 큰 공감을 표했다. 


나보다 하루 먼저 로빈을 떠난 그녀는 다음으로 안착한 도시인 자다르에서 메시지를 보내왔다. 많은 기대를 안고 도착했는데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여타의 대도시를 답습하는 풍경 일색이어서 차라리 내 플리트비체 여행에 동행하고 싶다고 했다. 자다르에서 하품을 반복하다가 내 다음 방문지가 플리트비체라는 사실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동행을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그녀에게 보냈다.


구시가, 로빈, 크로아티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플리트비체 호수에 비가 내렸다. 기온마저 5도 이하로 떨어졌다. 바람까지 불어 체감 온도는 영하에 가까웠다. 다목적 여름 레저 바지 한 벌과 고어텍스 재킷만으로 버티기에는 버거운 날씨. 그렇지만 최대한 껴입는다고 껴입은 것이었다. 방한 상태는 부실했지만 플리트비체 호수는 악천후를 감내하고도 남을 만큼 아름다웠다. 바람까지 부는 통에 구역 내 카페들로 찾아들어 가 체온을 회복시키기를 반복해야 했으나 고생스러운 만큼 대자연과의 교감이 깊었다. 온몸을 동원한 경험은 그만큼 깊이 기억된다니 플리트비체의 멋진 풍모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했다. 


나란히 호숫가를 거닐며 로빈에서 미처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우르르 쏟아내기 시작했다. 중국의 하와이라 불리는 하이난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난 시유는 대학 졸업 후 상하이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미래를 모색하기 위해 오른 2주 간의 여행길 위에서 인생을 독해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시선을 찾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그 일환으로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유명세가 떨어지는 로빈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애착을 표현하면서 많은 이들의 예찬이 따라붙는 자다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와 닿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한 것 역시 그러한 맥락으로 보였다. 만인이 찬사를 보내도 자신에게 와 닿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십 대 중반이라니 이제 막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을 텐데 그러한 상황에 비추어 사회 현상에 대한 시유의 이해는 무척 깊었다. 로빈에서 엿본 명민한 감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듯했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그녀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더 권력에 유착한 매스미디어의 생리를 깨달은 후부터 TV를 아예 보지 않고 지냈다. 사건의 표면에 드러나는 정보보다는 그 이면에 숨은 원리를 집중적으로 쫓는 듯했다. 중국 정부의 우회적 사상 통제 정책에 대해서도 신랄한 문제의식을 꺼내 놓았다. 진실을 향한 탐구 본능이 대화의 문맥 속에서 자주 드러났다. 중국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 결과로 시유 같은 친구가 육성되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나로서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빗방울들이 음표처럼 뛰놀던 풍경, 플리트비체, 크로아티아


대화는 즐거웠지만 찬바람과 비가 뒤섞인 날씨를 장시간 견디기는 쉽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한국에서 우산을 챙겨 가긴 했으나 어지간한 비는 그냥 맞고 다니고 있었다. 레저 재킷의 방수 기능이 그리 나쁘지 않거니와 우산이 은근히 걸리적거렸기 때문이다. 반면 시유는 우산을 숙소에 두고 온 상태였다. 점심이 지난 후 비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자립적인 성향의 시유도 오들오들 떨면서 추위를 하소연해 왔다. 체온의 급감으로 인해 얼굴까지 창백해진 상태. 나로서도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웠다. 결국 우산을 펼쳤다. 지난 여행들에서의 야전 경험으로 추위는 어지간히 견디겠는데 거세진 비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작은 우산 아래에서 시유와 어깨를 부비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아등바등 의지하며 호수를 계속 산책하다가 아뿔싸, 선착장에서 우산을 호수에 빠뜨렸다. 갑자기 휘몰아친 바람이 우산을 낚아채 호수 안쪽으로 메다꽂았다. 호수의 중심을 향해 떠내려가는 우산을 발을 동동 구르며 쳐다보다가 선착장 직원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했다. 어쩔 수 없다는 반응. 바로 그때, 우산이 역풍을 타고 호수의 가장자리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이때다 싶어 신발과 양말을 벗어던지고 호수 안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가 우산을 건져 올렸다.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었지만 수심이 생각보다 깊어 바지가 다 젖었다. 내가 우산을 들고 선착장으로 돌아왔을 때, 장년의 서양 여행자 하나가 시유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넌 운이 좋은 여자야." 


빗속에서 호수를 구경하고 있는 방문객들, 플리트비체, 크로아티아


우산을 다시 펼쳐 쓰고 호수 유랑을 재개했다. 호수 뒤편에 숨은 크고 작은 연못과 폭포를 누볐고, 저 안쪽까지 이어진 탐방로를 따라 산등성이 하이킹도 했다. 올라가는 길에는 체온을 회복한 시유가 우산을 박차고 나가 나를 이끌었고, 내려오는 길에는 트래킹화를 신은 내가 한발 앞서 걸으며 미끄러운 운동화로 인해 더딘 걸음을 걷는 시유의 하산을 도왔다. 호수를 구경한 후에는 시유가 머물고 있는 자다르로 함께 넘어갈 예정이었다. 마지막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면 바삐 움직여야 하는데 호수의 면적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넓은 데다가 호수 뒤편으로도 훌륭한 풍광들이 잔뜩 숨어 있어 알뜰하게 시간을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대자연과 온몸으로 부대끼는 쾌감까지 더해지면서 일정을 통제하기가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다. 신선한 기운이 오래 다린 한약처럼 심신에 깊게 스며드는 통에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호수 유람에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저 안쪽에서부터 자다르행 버스를 향해 한참 동안 쇄도해야 했다. 비가 흩날리는 호숫가를 중장거리 성 대결하듯 정신없이 질주하는 두 남녀의 모습이 꽤나 장관이었으리라.  


숨 가쁜 질주 끝에 버스를 아슬아슬하게 잡아챘다. 자다르로 향하는 이날의 마지막 버스는 내가 탑승하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정류장을 출발했다. 버스 안에서도 시유는 추위에 시달렸다. 이튿날 몸살을 앓게 될 것 같다며 반냉동된 얼굴로 시선을 맞춰오는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상체는 괜찮아졌는데 하체가 계속 춥다기에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그러고서 그녀가 챙겨 온 식빵을 함께 나눠먹었다. 아무런 첨가물도 없는 맨 식빵을 지금처럼 맛있게 먹었던 마지막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자다르에 도착해 그녀의 숙소 앞에서 작별 인사를 나눴다. 체온을 되찾을 때까지 뜨거운 물로 충분히 샤워를 하고, 저녁 식사로는 가급적 뜨끈한 국물 요리를 해 먹으라고 조언한 후 걸음을 옮겼다. 스노보드에 한참 광분했던 시절 자주 효과를 본 처방이었다. 걸음을 옮겨 체크인한 숙소에는 주방이 없었다. 뜨근한 국물 요리를 해 먹으려던 마음을 주저앉히는 상황. 식당을 찾아다닐 기력이 나지 않아 슈퍼마켓에서 봉지 라면을 하나 사와 뽀글이를 해 먹었다. 내가 근근이 허기를 때우는 사이 시유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샤워 후 토마토 수프를 만들었는데 괜찮으면 먹으러 오라는 것. 뽀글이 하나로는 영 부족하던 차여서 곧 가겠다고 답장했다. 그녀가 렌트한 아파트형 숙소는 꽤 아늑했다. 샤워로 체온을 회복한 시유와 식탁에 사이좋게 앉아 그녀가 조금 전 만들었다는 토마토 수프와 레몬 꿀차를 들었다. 이후 시유는 침실에서 짐을 정리했고, 나는 주방에 그대로 앉아서 쉬었다. 침실과 주방의 거리는 서로 멀었지만 그 사이로 흐르는 끈끈한 연대감이 실내를 훈훈하게 달궜다.


탐방로 뒤편에 자리한 작은 호수들 중 하나, 플리트비체, 크로아티아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67th 퍼포머

: Sergej Dinic


- 국적: 크로아티아

- 촬영지: 카를로바츠, 크로아티아


세르게이는 플리트비체에 가기 위해 경유지로 선택한 도시 카를로비츠에서 만난 친구다. 여행 가이드로 일하는 그는 바쁜 성수기 일정을 마무리한 후 휴식 기간을 이용해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수려한 자연경관을 누비는 일을 하는 만큼 자연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깊이 절감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자연이 풍부한 크로아티아에서 여행 가이드인 그에게 자연보호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 듯 보였다. 한국 여행에 관심이 있다며 정보를 물어오던 그가 언제고 한국을 방문했을 때 우리도 수려한 자연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런데 그때까지 우리의 자연은 잘 보존되어 있을까?



68th 퍼포머

:  Shiyu Chen


- 국적: 중국

- 촬영지: 플리트비체, 크로아티아


최악의 기후 조건에서도 시유는 촬영을 마다하지 않았다. 눈에 띌 정도로 오들오들 떨면서도 오히려 자청해서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메시지를 적은 종이가 구깃구깃한 것도 그 때문이다. 고생하는 시유를 위해 순발력 있게 촬영을 해야 했는데 손은 시리고, 그녀는 체력이 잔뜩 소진된 상태로 비바람을 견디며 내 앞에 서 있고, 그 눈빛에는 믿음이 서려 있고, 그 상황에서 사진은 건져야겠고, 참으로 막막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뷰파인더에 김까지 잔뜩 서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도로 집중하면서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렀는데 우려했던 것보다는 결과가 양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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