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영진 Feb 06. 2019

32. 상실의 시대, 방황하는 청춘_시기쇼아라,루마니아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잘할 수 있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르겠어

성채 안의 풍경, 구시가, 시기쇼아라, 루마니아




늦가을의 문턱에 접어든 드라큘라 마을은 적잖이 을씨년스러웠다. 낙엽이 나뒹구는 거리로는 찬바람이 두서없이 지나다녔고, 그 사이사이에서는 앙상한 가로수들이 쓸쓸한 표정으로 흔들렸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었던 낯선 마을에서 만물은 구름 낀 하늘의 육중한 기운을 빌려 저마다의 색감을 묵직하게 뿜어댔다. 내장에서부터 토해진 듯한 빛깔들은 제 나름의 체중마저 지니고 있었다. 그 모습이 꽤나 음습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야밤에만 활동한다는 드라큘라가 대낮에 불쑥 등장해 검정 망토를 휘날리며 거리에 나뒹구는 낙엽을 쓸고 지나가도 이상할 것 없는 풍경.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신선한 피 한 잔을 마시고 싶은데 이 근처에 혹시 핸드 드립으로 내린 피를 파는 카페가 없냐고 물어 왔더라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시기쇼아라의 가을은 그렇듯 깊고 진했다. 


낙엽들과 함께 바람에 떠밀린 걸음이 숙소 앞에 닿았다. 성채 안에 자리 잡은 숙소라고 해 어떤 곳일까 궁금했는데 가서 보니 아담하고 예쁜 가정집이었다. 밝은 얼굴로 대문을 열어 준 숙소 주인은 친절하고 다정했다. 환영한다는 의미로 웰컴 쿠키와 커피를 내 주어 숙소까지 걸어오면서 차가워진 몸을 얼마간 녹일 수 있었다. 다른 투숙객이 있는지 물었더니 다 빠져나갔다는 대답. 내가 유일한 숙박객인데 어쩌면 저녁에 또 한 명이 입실할지도 모른단다. 


루마니아 중부의 소도시 시기쇼아라는 '드라큘라'라는 닉네임으로 널리 알려진 블라드 체페슈의 출생지였다. 성벽에 에워싸인 언덕 위의 마을은 드라큘라의 전설이 탄생한 곳이자 지역의 최고 볼거리. 가슴 서늘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성채 안에 자리한 숙소를 잡았다. 깊은 밤이 선사하는 정적 속에서 모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고 싶었다. 구름 낀 하늘 아래로 찬바람이 흩날리는 날씨 때문에 마을 풍경은 을씨년스러웠지만 그 편이 드라큘라의 전설을 상상하기에는 오히려 좋은 듯했다. 마을 분위기가 꽤 옛스럽기까지 해 감정을 수월하게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는 드라큘라의 전설 때문인지 마을이 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구시가, 시기쇼아라, 루마니아


성채가 어둠에 잠길 무렵, 또 다른 여행자가 입실했다. 창백한 인상의 사내가 포마드 기름을 잔뜩 바른 머리로 턱시도를 펄럭거리며 등장하길 기대했는데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선한 인상의 젊은 동양 여성이었다. 드라큘라 마을의 성채 안 고요한 독방에서 남몰래 흡혈귀의 날카로운 송곳니에 목덜미를 내맡길 기회를 빼앗은 불청객의 이름은 찬. 유럽을 홀로 여행 중인 말레이시아 출신의 대학생이었다. 커다란 눈망울에 수더분한 옷차림이어서 숫기가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붙임성도 좋고, 성격도 활달했다. 불 꺼진 빈 방에서 밤새 공포에 떠는 기쁨을 빼앗긴 대신 쾌활한 추억을 얻을 수 있을 듯했다. 


찬이 입실할지 몰랐기에 밤이 되면 방에서 혼자 조용히 맥주를 마실 계획이었다. 어둠이 깔리기 전 성채 밖에 있는 슈퍼마켓에 가서 맥주도 사 왔다. 그런데 찬이 바로 앞에서 말똥거리고 있으니 혼자서 마시기도 멋쩍은 상황. 활달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오는 그녀에게 술을 마시느냐고 물었다. 체질이 맞지 않아서 입에도 못 댄다는 대답을 기대했으나 그 반대였다. 술을 좋아한단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넉넉히 사 오는 건데 아무도 입실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내 몫의 맥주만 사 가지고 왔다. 슈퍼마켓에는 우리 둘이 일주일 내내 쉬지 않고 마셔도 남을 만큼 충분한 맥주가 있었다. 


맥주가 식도를 타 넘으면서 기분이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의 사연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싱가포르 소재의 대학에 재학 중인 찬은 교환 학생으로 프랑스에 머물고 있었다. 학업을 수행하던 중 짧은 방학을 맞이해 여행을 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순박한 대학생으로만 보였던 찬은 대화가 무르익을수록 총명한 모습을 드러냈다. 첫인상과는 다른 면모에 놀랐다. 더욱 당황스러운 부분은 명석한 모습과는 달리 찬이 아직 인생의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도, 잘할 수 있는 게 어떤 건지도 도통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계속 고민하고 있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고 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책상에만 붙어 있기가 석연치 않아 여행을 떠나온 것이라고 했다. 


구시가, 시기쇼아라, 루마니아


찬의 사연이 낯설지는 않았다. 나 역시 상실의 시대를 거쳐왔거니와 한국에서도 유사한 사연을 숱하게 접했다. 예술가와 여행자가 인맥의 다수를 차지하다 보니 청년들과의 접촉이 잦았는데 그들 중 꽤 많은 수가 불투명한 미래에 좌절하고 있다며 암담한 심정을 하소연해 오곤 했다. 그렇지만 찬은 한국인이 아닌 말레이시아인이었다. 개발주의의 채찍을 쉴 새 없이 휘두르며 달려오는 사이에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적폐가 쌓여버린 한국이라면 모를까 인간미도 아직 많이 살아 있고, 부조리한 현상을 걸러내며 사회 발전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도 꽤 남아 있는 말레이시아 출신 대학생의 입에서 그런 얘기가 흘러나올 줄은 몰랐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전 세계가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기분이 우울했다.  


앞길 창창한 청년들이 장밋빛 미래를 설계하기에 이 세계는 너무도 어지럽고 혼탁한 듯했다. 사실상 ‘인재’라는 그럴싸한 표현의 이면에는 고효율의 노동력이라는 본뜻이 숨어 있었다. 자기실현을 억제하고 부품화를 권장하는 거대한 신자유주의의 세계에서 힘없는 대학생이 자존감을 사수하며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예비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일 것이었다. 드라큘라만 흡혈을 하는 게 아니라 소외의 문제가 만연한 이 세계도 힘없는 이들을 상대로 날마다 흡혈을 하고 있었다. 밤에만 활동하는 드라큘라와 달리 밤낮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흡혈의 양상은 훨씬 더 잔혹했다. 찬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봤다. 찬보다 오래 살았고, 성취와 좌절을 번갈아 겪으며 약간이나마 사회적 기반을 구축하긴 했지만 힘없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암담했다.  


다음날 찬과 함께 마을을 돌아다녔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구름 낀 음울한 하늘 아래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손이 시릴 정도로 날씨가 추워서 피신 삼아 종탑 전시관으로 들어가 내부를 구경하기도 했고, 다시 야외 공간을 돌아다니다가 배가 고프다는 핑계로 식당에 들어가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켜놓고 체온을 끌어올리기도 했다. 동양에서 온 남녀 한 쌍이 드라큘라 마을을 누비는 모습이 지역의 이력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듯했으나 그래도 우리의 입장에서는 기억에 남을 만한 시간이었다. 비수기라서 방문자가 적다는 점도 여행의 운치를 돋우는 데 한몫을 했지만 역시 우리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제공한 일등공신은 춥고 음습한 날씨였다.  


온종일을 함께 보낸 후, 저녁이 되어 작별 포옹을 나누고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떠났다. 나는 찬이 시기쇼아라에 오기 직전 머물렀던 곳으로, 찬은 내가 시기쇼아라에 오기 직전 머물렀던 곳으로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곁에서 나란히 걸으며 찬의 여정을 응원하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내 몫의 길이 따로 있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드라큘라 마을의 을씨년스러운 가을. 때가 되면 봄이 다시 찾아온다는 사실을 억지로 떠올리며 터미널을 향해 걸었다.


구시가, 시기쇼아라, 루마니아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79th 퍼포머

: Jieyu Chan


- 국적: 말레이시아

- 촬영지: 시기쇼아라, 루마니아


드라큘라의 전설에 걸맞은 풍경을 간직한 시기쇼아라는 꽤 마음에 드는 여행지였다. 붙임성 좋은 찬과 함께여서 더 좋았던 것 같다. 프로젝트의 초기부터 참여자들에게 'I am a forest'라는 문구를 영문과 병기하도록 요청해 오고 있었다. 찬 역시 영문 아래에 말레이시아어로 '나는 숲이다'라는 문장을 적었다. SNS상에서 확인한 바로 찬의 최근 모습은 그때보다 활기차다. 사회 문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요즘 들어 인권 문제에 관심이 커진 듯 보인다. 여행도 열심히 하고 있는 듯하다. 씩씩한 발걸음 속에서 의미 있는 미래를 꾸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31. 나의 자립은_시비우, 루마니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