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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Feb 08. 2019

34. 살아있는 모든것은 푸르다_벨리코터르노보,불가리아

웅대한 이상이 회색 잠에 들어도 삶은 푸른 빛으로 흐르나니

부즈루자, 카잔루크, 불가리아




아무리 찾아도 미니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이 근처에서 국경을 넘는 미니밴이 출발한다고 했는데 비슷하게 생긴 차량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출발지가 터미널이 아닌 도심의 한 교차로여서 불안한 느낌이 있었다. 여유 있게 도착해 한참을 수소문했지만 주변에는 문의할 만한 창구도, 플랫폼도, 안내 표지도 보이지 않았다. 차량을 기다리는 사람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인근 호텔로 찾아들어 가 관련 정보를 물었으나 그 차량이 존재하고, 요 앞 길가에서 출몰하긴 하는데 그 이상은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불안감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던 서양인 한쌍을 마주쳤다. 알레시오와 소피였다. 


두 사람은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거주하는 독일인들이었다. 알레시오는 1년 예정으로, 소피는 6개월 예정으로 부쿠레슈티에 머무르고 있었다. 업무차 현지에 체류 중인 두 사람은 여유 기간을 이용해 불가리아를 단기 여행하려던 참이었다. 현지 휴대전화를 소지하고 있었지만 불가리아 여행은 처음이었고, 해당 차량을 탑승한 경험도 없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불안하기는 매한가지. 그들이 내 등장을 반가워한 이유였다. 사방팔방으로 안테나를 세우며 미니밴의 위치를 혼자서 추적하고 있던 내 입장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셋이서 머리를 맞댄 끝에 드디어 미니밴을 찾아냈다. 국경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은 차량 안에서 여행의 사연이 오손도손 오고 가기 시작했다. 답답한 일상에 대한 반동인지는 까맣게 모른 채 무한정 들뜬 여행자들이 길 위에 숱하고, 그중 일부는 스스로에게 잔뜩 심취한 표정으로 그동안의 여행 경험을 과시하느라 바쁘지만 두 사람은 아무런 허영 없이 차분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예의 바르면서도 진솔한, 역동적이면서도 편안한 대화가 펼쳐졌다. 여행의 사연이 오고 가는 사이 차량이 불가리아의 국경 도시 루세에 도착했다. 현지인이 알려준 환전소를 향해 사이좋게 걸어가 환전을 했고, 다시 터미널로 돌아와 각자의 버스표를 끊었다. 나는 불가리아 중부의 산악 도시 벨리코 터르노보행 버스표를, 그들은 수도인 소피아행 버스표를. 


차레베츠 요새에서 내려다본 시가지, 벨리코 터르노보, 불가리아


두 사람과 함께하는 동안 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불시에 등장한 악당 패거리를 같이 무찌르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찾아온 갑작스러운 낭패를 함께 해결하지도 않았다. 드라마를 바랄수록 삶은 불만족스러워지는 법. 이례적인 일들이 일상보다 자주 펼쳐지는 여행이라지만 그래 봐야 세상 어디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인간사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 충분히 좋았다. 과장된 영웅담을 일방적으로 떠들어 대는 여행자와 보내는 시간보다 훨씬 편안했다. 


버스 앞에서 동료 기사들과 담배 연기를 뒤섞던 운전기사가 흡연을 마치고 운전대를 잡았다. 두 친구에게 작별을 고하고 버스에 오르자 차량이 기다렸다는 듯 엉덩이를 세웠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발칸의 소박한 농촌 풍경을 한 시간 반쯤 훑었으려나. 벨리코 터르노보가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숙소는 버스 터미널에서 한참을 걸어야 하는 곳에 있었다. 제법 긴 거리였지만 지역의 볼거리들을 두루 거치는 동선이어서 지루한 느낌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다른 산악 도시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지형이 내 눈을 자주 사로잡았다. 낡고 굽이진 뒷골목에 숨어 있는 숙소도 꽤 마음에 들었다. 여장을 풀고 돌아본 숙소의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아기자기했다. 오래된 건물 특유의 운치도 매력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현지의 생활양식을 있는 그대로 경험할 수 있는 곳이어서 새로운 보금자리에 안착하는 마음이 흐뭇했다. 


시가지 외곽의 주택가, 벨리코 터르노보, 불가리아


저녁 무렵, 숙소 앞마당으로 나갔다가 현관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이베리아 출신의 여행자 페드로와 파비오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자신들을 한마을에서 같이 자라 지금까지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죽마고우라고 소개했다. 개인적으로 이베리아 반도 출신들에게 호감이 높은 편이었다. 인간적이면서 유쾌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동네 어딘가에 모여 앉아 음식과 술을 나누며 일상을 떠들어대는 그들이었다. 그 시끌벅적한 현장 속으로 끌려 들어가 함께 저녁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가볍게 시작한 대화가 사람 환대가 몸에 밴 두 이베리아 친구들 덕분에 삽시간에 깊이를 만들어 냈다. 자연에 관한 화두에 이르러 ‘I am a forest’ 프로젝트를 언급하게 되었다. 감동받은 목소리로 프로젝트를 호평한 그들이 망설일 겨를이 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장시간 식사를 거른 상태여서 저녁을 먹으러 나갈 참이었다던 그들이었으나 숲 보호가 식사보다 중요하다며 외출을 미루고 촬영에 나섰다. 뜻하지 않았던 긴 대화에 사진 촬영까지 두 시간가량 주린 배를 붙잡아야 했음에도 두 사람은 진지한 태도로 촬영에 임했다. 허기진 표정이 역력했지만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촬영하라고 말해 주어 편안한 마음으로 셔터를 누를 수 있었다.  


파비오를 촬영하고 있을 무렵, 숙소 라운지에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던 이들 중 하나가 페드로에게 다가와 설명을 구했다. 내막을 파악한 그가 작업이 일단락된 틈을 타 나에게 다가왔다. 자신도 참여하고 싶다는 것. 지금까지 사전 소통 없이 촬영을 진행한 적은 거의 없었다. 프로젝트의 내용과 방향성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고, 상대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관계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프로젝트에 닿는 경우에 한해 작업을 진행해 온 이유였다. 그런데 일면식도 없었던 이가 참여 의사를 먼저 밝혔다. 난감한 순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간절함이 깃든 그의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믿음직스러운 눈빛이었다. 두말 않고 촬영을 시작했다. 상호 간의 소개는 촬영 후에 했다. 그는 캐나다에서 온 케빈. 환경학을 전공 중인 대학생이었다. 인사를 나눈 후 뿌듯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케빈이 이 사회의 숨은 의인처럼 느껴졌다.


부즈루자로 가는 길에 통과한 숲 지대, 쉬프카 패스, 불가리아


다음날에는 두 이베리아 친구가 렌트한 차량을 타고 부즈루자(Buzludzha)라는 곳을 여행했다. 계획에 없던 곳인데 두 사람이 수 차례 동행을 청해와 결국 함께 다녀오는 쪽으로 일정을 바꿨다. 이베리아 친구들의 끈질긴 유혹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의 사전 설명이 있었지만 목적지의 구체적인 정체는 모른 채 두 사람에 대한 신뢰만으로 따라나섰다. 길은 구불구불한 도시의 외곽 도로와 안개에 휩싸인 신비로운 숲 지대를 골고루 지났다. 목적지 근처에 도착해 언덕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다는 부즈루자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5미터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짙은 안개와 걸음을 길 밖으로 밀어내는 엄청난 강풍이 진로를 방해했다. 게다가 길은 또 얼마나 가파른지 한걸음 한걸음이 숨가빴다.  


도착해서 보니 한때 공산주의 최고 권력자들의 회의장으로 쓰이다가 폐허로 변모한 거대한 구조물 한 동이 언덕 꼭대기에 허망한 자태로 서 있었다. 경찰이 올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내부 진입이 금지된 듯 보였는데 안전사고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정치적 구실 때문인지 그 이유는 알 길이 없었다. 두 사람이 준비해 온 밧줄을 이용해 지하 공간으로 진입했다. 무조건 준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굳이 출입을 금지해야 할 이유도 느끼지 못해 양심에 찔리지는 않았다.  


이후 내부의 계단을 다시 오르며 공간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실패한 공산주의 혁명의 씁쓸한 풍경이 많은 생각을 불러들였다. 사회 이론으로서 공산주의는 이상적인 미래를 이 세계에 제시했지만 명분 뒤에서 아우성치는 권력욕과 관념 아래로 억압된 자유의지의 반동으로 인해 길을 잃었다. 내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그에 대한 여실한 흔적이었다. 크나큰 교훈을 주는 역사적 장소를 남부끄러운 치부 마냥 은폐하고 있는 상황이 국제 사회의 패권을 쥔 서구 사회를 향한 콤플렉스로 보였다. 주변으로 안개와 바람과 추위까지 소용돌이쳐 많은 감정이 들고 났다. 갑작스러운 여정이었지만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을 듯했다. 두 사람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유혹해 준 덕분에 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끈질긴 유혹은 역사 속에 박제된 관념의 소산들보다 훨씬 더 생명력이 넘쳤다. 실내악곡의 음표들처럼 다정하던 알레시오와 소피의 목소리도, 자발성으로 반짝이던 케빈의 눈동자도 생동하는 삶의 또 다른 모습들일 것이었다. 저 아래에 세워 둔 차량을 향해 돌아가는 길. 관념은 회색이지만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푸르다던 누군가의 말이 짙은 안개를 뚫고 피어올랐다.


부즈루자의 복도, 카잔루크, 불가리아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84th 퍼포머

: Alessio Gigante


- 국적: 독일

- 촬영지: 루세, 불가리아


알레시오는 할아버지에게서 이탈리안의 피를 물려받은 독일인이다. 바흐, 멘델스존, 슈만 등을 배출한 라이프치히가 고향인데 당시에는 업무를 위해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1년 일정으로 머무르고 있었다. 아동들을 교육하는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남유럽의 낭만적 기질이 혈관에서 흘러 다니는지 알레시오는 딱딱하고 재미없기로 소문난 독일인답지 않게 시종일관 활달하고 유연했다. 프로젝트의 취지에도 크게 공감한다며 환전과 버스표 구입 등으로 바쁜 와중에 아주 적극적으로 촬영에 임해 주었다. 이후에도 프로젝트를 계속 지지해 준 것은 물론이다.



85th 퍼포머

Sophie Marie


- 국적: 독일

- 촬영지: 루세, 불가리아


알레시오의 직장 동료인 또 다른 독일인 소피는 양친 중 한 분에게서 프랑스인의 피를 물려받았다. 그래서인지 풍기는 분위기가 알레시오와 또 달랐다. 뭔가 포근하면서 평온하달까. 개인적 특성에서 오는 차이라기보다는 뿌리에서 오는 차이로 느껴졌다. 프랑스 문화의 가장 대표적 특징인 관용성과 사유하는 습관이 그녀의 내면에 균형을 만들어 주는 듯 보였다. 소피 역시 적극적으로 촬영에 임해 주었으나 주어진 시간이 넉넉지 않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셔터를 눌러야 했다. 길 위에서 벌이는 프로젝트이다 보니 사진을 찍기만 해도 감지덕지인 상황이 잦았다. 



86th 퍼포머

Pedro Braz


- 국적: 포르투갈

- 촬영지: 벨리코 터르노보, 불가리아


남부 유럽 특유의 낙천성을 쉴 새 없이 뿜어내던 페드로. 해학적인 그 모습이 웃음을 자주 유발했다. 악천후 속의 부즈루자에서도 희극적인 태도는 여전했다. 숙연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폐허 속에서 페드로는 이죽이는 표정으로 눈을 맞춰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촬영을 할 때의 모습은 완전히 반대였다. 그 누구보다 진지했다. 프로젝트의 취지와 진행 경과에 감동받았다고 이야기한 페드로였다. 이 사진 속의 중요한 오브제는 페드로의 머리 위에 있는 '비상구' 표시다. 생명심이 잦아든 이 세계에 탈출구가 필요하다는 페드로의 목소리를 반영한 작업이다.



87th 퍼포머

Fabio Antao


- 국적: 포르투갈

- 촬영지: 벨리코 터르노보, 불가리아


페드로의 죽마고우인 파비오는 진지한 성향의 건축학도다. 포르투갈인 특유의 낙천성이 없지 않지만 철학적인 사유 능력을 필요로 하는 건축학도답게 중요한 일들 앞에서는 신중하게 살피고 판단하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이베리아 출신들은 낙천적이고 유쾌할 거라는 편견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주체적인 태도로 임하길 권장하는 작업이어서 참여자들에게 촬영 컨셉이나 장소를 직접 정해보라고 할 때가 많았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고 하면 그때 내가 상황을 해결했다. 파비오는 푸른 빛깔의 숲으로 뒤덮인 불가리아 지도를 촬영의 뒷배경으로 선택했다. 건축학도다운 선택이었다.



88th 퍼포머

: Kevin Mason


- 국적: 캐나다

- 촬영지: 벨리코 터르노보, 불가리아


페드로와 파비오를 촬영한 곳은 여행자 여럿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숙소의 라운지였다. 촬영 과정을 보고 뭔가를 알아차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던 케빈의 모습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SNS에 올린 케빈의 작업 결과물에는 몇 개의 댓글이 달렸다. 그중에는 케빈을 향해 "네가 바로 숲이다"라고 말하는 댓글도 있었다. 그의 부친이 단 댓글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자랑스러움이 듬뿍 담겨 있었다. 후에 케빈이 자필 메시지에 실수가 있었다며 혹시 포토샵으로 수정해 줄 수 있는지 물어왔는데 "네 표정과 태도에 충분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대답했다. 내 답변에 케빈이 방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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