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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Feb 09. 2019

35. 자본주의의 반대편을 보여줄게_플로브티브,불가리아

처음 듣는, 그리하여 오래도록 잊지 못할 작별 인사

구시가 언덕 꼭대기의 유적 단지, 플로브티브, 불가리아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 변방에서도 저마다의 역사와 전통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패권에 밀려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각기 다른 개성으로 이룬 역사적 기풍들이 나라마다 면면했다. 그게 이 세계가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일 것이었다. 유적이 즐비한 플로브티브의 세월 짙은 표정이 보기 좋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터미널이 위치한 외곽 지역에서 숙소가 자리한 구시가까지 이어지는 길을 거스르는 동안 운치 있는 풍경들이 시야에 자주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웠는데 그 길의 끝에서 마주친 구시가는 그보다 훨씬 더 고풍스러웠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커피를 마시러 주방으로 나갔다. 찻잔이 수납된 위치를 살피고 있는데 낯선 목소리 하나가 내 등을 두드렸다. 뒤를 돌아보니 훤칠한 키의 서양인 하나가 서 있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그가 소탈한 목소리로 저녁 식사 여부를 물었다.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샐러드를 만들어서 먹고 있는데 음식이 많이 남는다며 합석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려던 참이었으나 새로운 인연도 만들 겸 그의 권유에 응했다. 나를 초대한 이는 독일인 여행자 로빈. 그의 안내로 합석한 식탁에는 두 명의 여행자가 더 있었다. 각각 미국과 프랑스에서 여행을 온 친구들. 낯선 표정으로 다가선 나를 향해 두 친구 또한 환영의 목소리를 보내왔다.  


다음날에는 숙소 뒷마당에서 로빈을 마주쳤다. 잡담이나 잠깐 나눌 생각이었는데 고목 아래에 놓인 야외 테이블의 운치에 이끌려 서로 마주 보고 자리에 앉았다. 뒷마당 곳곳에서는 두툼하게 쌓인 낙엽들이 계절감을 물씬 품어내고 있었다. 여유로운 일정으로 유럽 일대를 여행하고 있다는 로빈은 프랑크푸르트 소재의 대학에서 독일어와 역사 교육을 전공하고 있었다. 지명이 귀에 익어 몇 년 전에 서유럽을 여행하면서 프랑크푸르트에도 방문했다고 말했더니 자신의 고장이 마음에 들었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좋게 좋게 대답하고 넘어가는 게 상책이겠지만 마뜩지 않은 풍경도 기억하는 터라 느낀 그대로 대답했다. 


"마음에 드는 부분도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있었어. 괴테와 관련된 명소들, 평화로운 마인 강변, 문화와 역사를 세심하게 돌보려 노력한 흔적들, 여행자에 대한 배려가 뛰어났던 숙소는 마음에 들었지만 자본주의를 가속화하던 명품 거리와 금융권이 장악하고 있던 중심가의 현란한 풍경은 마음에 들지 않았어." 


구시가 외곽에서 만난 대형 쇼핑몰, 플로브티브, 불가리아


당시 프랑크푸르트를 여행하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것들이었다. 괴테의 대표작 중 하나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감동받아 찾아간 길이었다. 책장을 한쪽 한쪽 넘기는 동안 섬섬옥수 같은 문장들에 자주 감동받았다. 어려운 말은 하나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감정의 결을 낱낱이 더듬어 대는 솜씨가 경탄을 자아냈다. 괴테를 찾아다니는 발걸음 위로 벅찬 감동이 자주 덮쳐왔다. 평화로운 풍경이 길게 이어진 마인 강변도 아름다웠고, 중세풍의 건물이 늘어선 구시가도 그윽하니 좋았다. 숙소에서는 정기 이벤트라며 스파게티를 잔뜩 만들어 숙박객들에게 무료로 제공했다. 주머니 가벼운 배낭 여행자들을 먼저 나서서 보듬어 준 오랜만의 숙소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는 명품 거리라는 이름의 욕망의 낚시터가 행인들의 시선을 낚아 올리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은빛으로 번쩍거리는 고층 빌딩들이 바벨탑처럼 서서 시민들의 소박한 일상을 내려다보았다. 괴테의 명망과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 비단 프랑크푸르트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두 개의 장면이 보여주는 대비가 컸기에 자본주의가 과도하게 몸집을 부풀린 도시 중 하나로 머릿속에 남았다.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에서 자본주의의 바탕 산업인 금융업을 주재하는 도시였다. 인류 진화의 산물인 금융업이라지만 내 시야에 포착되는 현대의 금융 산업은 온갖 교묘한 잔재주로 인간 세계에 균열을 야기하는 존재였다.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여타의 장치들마저 저 스스로의 욕망을 앞세워 폭주하는 시대이니 아무리 괴테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프랑크푸르트라고 해도 올곧은 일들만 펼쳐질 리는 만무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병폐들이 유서 깊은 도시를 장악해 나가고 있는 광경을 맥없이 바라보는 기분이 아득했다. 


나로서는 그게 프랑크푸르트에 대한 솔직한 인상이었지만 로빈에게는 내 대답이 그리 반갑지 않을 터였다. 질문을 해오던 표정에서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는 답변을 기대하는 듯한 인상도 받았다. 그렇지만 좋은 얘기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겉도는 대화도 진작에 피로해진 상황이었다. 누구에게든 솔직하게 이야기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게 나에게는 상대를 존중하고 있다는 표시이자 조금이라도 더 진실하게 마음을 맞댈 수 있는 길이었다. 반갑지 않은 대답이었을 텐데 로빈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내 말에 수긍했다. 거기에 더해 독일을 대표하는 금융 도시로서 프랑크푸르트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을 더욱 상세히 언급했다. 이후 민감한 부분들을 포괄하며 현대 문명의 이모저모를 다양한 각도에서 함께 짚어 나갔다. 대화의 식감이 꽤 쫄깃쫄깃했다.


시가지의 풍경, 플로브티브, 불가리아


긴 잡담을 마무리한 뒤에는 로빈과 함께 구시가를 돌아다녔다. 도심이 드넓게 내려다 보이는 언덕 꼭대기의 유적 단지에서 주변 경치를 감상했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현지 청년과 저녁에 만나 술을 한잔하기로 약속도 잡았다. 로빈은 여행자들을 무척 잘 엮었다. 원래 그런 성격인 듯했다. 현지 청년을 향해 꾸물거리지 않고 달려드는 모습이 시원스럽게 느껴졌다. 저녁 무렵 로빈이 숙소의 여행자들 몇몇을 더 엮은 덕분에 택시 한 대를 대절해 현지 청년이 기다리고 있는 이색적인 바에 갔고, 야시시한 영상과 물담배와 라운지 음악이 만들어 내는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두어 시간 정도를 해롱거렸다. 


즐거운 날들이 지나가고 헤어질 시간이 왔다. 다음 행선지인 소피아로 이동하기 위해 여장을 꾸리고 있던 나와 달리 로빈은 플로브티브에 조금 더 머물 예정이었다. 그런데 소피아에 도착한 이튿날 로빈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소피아에 왔단다. 플로브티브에 좀 더 체류하리라 생각했는데 느긋한 시간보다는 새로운 장소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던 모양이다. 내친김에 시내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인근을 돌아다니며 도시 야경을 구경하다가 시가지의 한 공원에 임시로 조성된 크리스마스 야외 시장에 들러 뱅쇼를 한 잔씩 나눠 마셨다. 뜨끈한 와인으로 체온을 높인 후에는 다시 분위기 좋은 공간으로 자리를 옮겨 맥주를 마셨다. 


잡담을 안주 삼아 맥주를 홀짝거리다 보니 어느새 늦은 밤. 자리를 털고 나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걷기를 십여 분. 익숙한 모양새의 갈림길 하나가 우리 앞을 막아섰다. 이번에는 진짜 작별의 시간. 여행길 위에서는 만남과 헤어짐이 일상인지라 서로를 향해 안녕을 기원하는 목소리는 비교적 가벼웠다. 마지막 인사는 로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길 위에서 수없이 작별 인사를 나눴지만 다른 작별 인사에 비해 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말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 오면 꼭 연락해. 그땐 자본주의의 반대편을 보여줄게." 아직 로빈이 내 눈 앞에 있는데도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본주의의 반대편을 누비며 다시금 진솔한 대화를 주고받을 날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구시가, 플로브티브, 불가리아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89th 퍼포머

: Robin Frust


- 국적: 독일

- 촬영지: 플로브티브, 불가리아


프랑크푸르트 소재의 대학에서 독일어와 역사 교육을 전공하고 있는 독일인 여행자 로빈. 느긋하게 여행하고 있던 그였지만 대화 중에는 종종 날카로운 통찰력도 드러냈다. 자신의 고장인 프랑크푸르트를 거론하면서도 도시가 현대화되는 과정에서 새로이 떠안게 된 문제점들을 예리하게 짚어냈다. 로빈은 키가 무척 컸다. 195cm라니 서양인치고도 상당한 기럭지.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들 중 61번째 퍼포머인 토마스(205cm)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키였다. 해서 숙소 뒷마당에 서 있는 거목 옆을 촬영 장소로 골랐다. 쭉 뻗은 두 존재의 콜라보. 거목이 압승을 거뒀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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