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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Feb 10. 2019

36. 숲이 선사한 관계의 도미노_소피아, 불가리아

세 번째 동시성의 반주에 맞춰 춤까지 덩실덩실 췄다지

시가지에서 마주친 풍경, 소피아, 불가리아,,,,,,




언어 문제는 불가리아에서도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날마다 함께 다니다 보니 둘도 없는 여행 친구처럼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만큼 곤혹스러운 상황이 많았다. 불가리아 여행의 첫 방문지인 벨리코 터르노보에서도 그랬다. 숙소가 도시의 외곽이어서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동네 식료품점을 이용해야 했는데 매번 손짓 발짓으로 상점 주인과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말만 통하면 금세 입수할 수 있는 물품들임에도 손에 쥘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상점 주인도 내 요구를 제대로 해소해 주지 못해 답답해했다. 마음은 서로 애틋했지만 넘치는 선의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상점을 찾은 어느 날, 주인아줌마와 간절한 눈빛을 서로 주고받으며 혼란의 바다를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서양 여성 하나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영어를 할 줄 아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대답. 게다가 불가리아인이란다. 사정을 파악한 그녀가 적극적으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세심한 통역 덕분에 필요한 물품을 모두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녀는 나와 같은 숙소에 묵고 있는 여행자였다. 안면을 튼 김에 숙소 앞마당에서 잠시 대화를 나눴다. 그녀의 이름은 크리스티나. 대학 졸업 후 소피아에서 방송 모니터링 요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친절한 성격인 데다가 웃음도 많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상쾌한 느낌을 받았다. 소피아에도 올 계획이 있느냐고 묻기에 동부 해안에 들러 흑해가 진짜로 까만지 확인한 후 소피아로 향할 거라고 대답했더니 소피아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하란다. 말은 고마웠지만 그러기에는 대화의 시간이 너무 짧은 듯했다. 접대용 멘트겠지 생각하며 머릿속으로만 재회의 장면을 상상하고 말았다. 


도심의 중앙 도로에서 열린 북마켓, 소피아, 불가리아


그랬던 그녀를 소피아에서 진짜로 다시 만났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시내도 마음껏 구경했다. 불가리아의 자랑이라는 알렉산드르 넵스키 교회를 포함해 도심 곳곳에 자리한 종교 건축물들을 쭉 훑었고, 소피아의 심장부에 자리한 소피아 도시 정원도 산책했다. 그 밖의 상징물들과 이색적인 거리 상점들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곳들을 바지런히 돌아다녔다. 한 나라의 수도답게 다채로운 볼거리가 우리를 반겼다. 자신의 터전인 소피아에서 크리스티나는 물 만난 고기 같았다. 벨리코 터르노보에서 대화를 나눌 당시 그녀는 문화예술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는데 그래서인지 도심 곳곳의 문화적 흐름을 훤히 꿰고 있는 듯했다. 크리스티나의 적극적인 안내로 여행의 필수 코스는 물론, 현지인의 도움이 없으면 닿을 수 없는 곳들까지 구경할 수 있었다. 저녁 무렵에는 그녀를 앞세워 컨템퍼러리 전시회도 관람했다. 주류 회사의 후원으로 개최된 핀란드 작가의 전시였는데 불가리아 독립 예술의 현주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다음날에도 크리스티나는 나를 만나러 나왔다. 개성 있는 인디 밴드의 공연이 시내에서 열린다며 관객이 잔뜩 들어찬 어느 라이브 공연장으로 나를 이끌었다. 가서 보니 크리스티나는 밴드 멤버들과도 안면이 있었다. 대중문화를 양껏 향유할 수 있는 수입원을 가진 직장인이면서 도시의 문화적 흐름에 적극적으로 발맞추는 예술 애호가이니 독립 예술계에 얼마간의 인맥이 있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공연 전 그녀의 소개로 인사를 나눈 밴드 멤버들은 기대 이상으로 친절했다. 요란스러운 옷차림과는 달리 모두 다정한 태도로 나에게 환영 인사를 전했다. 


밴드의 멤버는 전기 기타와 바이올린을 번갈아서 연주하는 리드 보컬, 가창과 나레이션의 일부를 담당하는 건반 주자, 프로그래밍된 리듬 음원과 전자음 기반의 타악기로 비트를 공급하는 퍼쿠셔니스트까지 총 3명이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건반 주자. 수 년째 여장을 하고 다니는 남성으로, 캐릭터가 워낙 두드러져 소피아에서는 꽤 유명하다는 후문이었다. 공연용 컨셉이 아니라 평소에도 그러고 다닌다고 했다. 일종의 행위 예술로서 복식과 화장을 활용하는 듯 보여 더욱 흥미로웠다. 


인디 밴드의 공연 중에 한 컷, 소피아, 불가리아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조용히 구경하며 현지 인디 씬의 근황을 유추해 볼 참이었는데 공연이 절정에 이를 무렵 밴드 보컬이 나를 무대로 호출했다. 공연장 내에서 유일한 외국인이었기에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객석의 안팎에서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잠시 공연장 밖으로 나갔을 때도 몇몇의 관객이 말을 걸어왔다.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객석이 뜨겁게 반응했다. 떠들썩한 함성을 가르며 씩씩하게 무대 위로 오르는 사이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곧이어 밴드의 반주에 맞춰 즉흥 잼을 시작했다. 나에게 맡겨진 역할은 가창. 리드 보컬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멍석도 깔렸겠다 춤까지 덩실덩실 췄다. 


그런데 잼 도중에 리드 보컬이 '숲'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내가 숲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여행한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일까? 크리스티나가 슬쩍 언질을 주었을까? 정황상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동시성이 또 한 번 작용한 듯했다. 갑작스러운 ‘숲’의 등장에 당황해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왜 하고 많은 것들 중에 숲이지,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다시 흐름 속으로 진입했고 얼마간 숲과 자연을 주제로 해 잼을 이어나갔다. 협연을 마친 직후, 관객들의 함성이 공연장에 메아리쳤다. 내가 자리에 다시 착석하자 여러 명의 관객들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한국에서 흔하디 흔한 나는 소피아에서도 귀했다. 


공연이 끝난 뒤, 리드 보컬이 며칠 후 열리는 자신의 생일 파티에 나를 초대했다. 이튿날 소피아를 떠날 계획이었는데 뜻밖의 제안으로 고민에 봉착했다. 예정했던 일을 모두 마쳤으니 생일 파티에 참석하려면 체류 기간을 며칠 더 연장해야 하는 상황. 딱히 하고 싶은 일도, 가보고 싶은 곳도 없으니 체류 기간을 연장하면 생일 파티 전까지 무료한 일정 속에서 빈둥거릴 확률이 높았다. 파티 참석을 위해 며칠을 날릴 것인가? 아니면 생일 파티를 뒤로 하고 새로운 장소를 찾아 나설 것인가? 그런데 이 흐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끝에서 나는 어떤 상황과 만나게 될 것인가? 에라 모르겠다, 갈 데까지 가보자 생각하며 숙박 기간을 연장했다. 


당일이 되어 찾은 생일 파티장에는 수십 명의 참석자들이 운집해 있었다. 파티는 카페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진행되고 있었는데 축하객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큰 공간이 가득 찰 정도였다. 그런 식의 생일 파티가 불가리아에서는 보편적인 일인지, 아니면 그가 유별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많은 이들이 반갑게 맞아 주어서 고마웠다. 주최 측에서 마련한 다과와 음료를 드는 동안 참석자들의 축하 공연과 가창이 이어졌다. 그 틈을 이용해 나도 노래를 불렀다. 엉성하게나마 하모니카로 축가도 연주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마음껏 표현하고 싶었다.


참석자들의 축하 공연이 이어지고 있는 생일 파티, 소피아, 불가리아


이 모든 일의 뒤에는 크리스티나가 버티고 있었다. 그녀를 통해 맞닿은 사건들이자 관계들이었다. 현지에서 사진 전시도 했는데 이 역시 크리스티나의 도움 덕분에 가능했다. 한국에서 인화해 간 사진들을 보여 주며 지역에 전시가 가능한 공간이 있는지 묻는 나에게 그녀는 자신이 종종 방문하는 곳이 있다고 대답하고는 곧바로 나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아파트먼트’(Apartment)라는 이름의 복합 문화 공간이었다. 방 단위로 분리돼 있는 내부 구조에서 착안한 이름인 듯했다. 크리스티나가 매니저에게 전시의 목적을 요모조모 설명하자 매니저가 긍정적인 전망을 표출하며 운영자에게 연락을 취했다. 상황을 설명 들은 운영자는 그 자리에서 유선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날 저녁 조명이 은은한 전시벽 한쪽에 사진들을 부착했다. 마음껏 공간을 사용해도 좋다기에 이번에는 오와 열을 무시하고 마음 가는 대로 사진들을 배치했다. 멀리서 보니 욕망이 사진의 형식을 빌려 덩어리로 뒤엉킨 모습이었는데 나로서는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운영자는 그로부터 이틀 후에 대면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는데 직접 만나 보니 지역 독립 예술계의 통이었다. 그의 이름은 플레멘. 반골 기질과 게릴라 근성으로 무장한 중년 사내로, 세간의 고정관념을 장난스럽게 우롱해 온 인생의 궤적이 화통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직설적이면서도 유쾌한 언행 역시 시원스럽기는 마찬가지. 유머를 여유롭게 저글링하는 그와 사연을 나누는 동안 쾌청한 바람이 마음을 자주 통과했다.


여행 내내 사람이 나를 이끌고 있었다. 저항하지 않고 그 물결을 그대로 탈 때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또 그만큼 흐뭇한 추억이 남았다. 이번에는 크리스티나가 나를 이끌었다. 현지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 속에서 짧게나마 인디 밴드와 협연했고, 지역 예술가의 생일 파티에서 수많은 현지인들의 환대와 친절을 누렸다. 그것도 모자라 좌석을 가득 메운 그들 앞에서 한국 음악을 노래하고 연주했다. 호탕한 주인이 운영하는 복합 문화 공간에서 전시도 했다. 성장판이 다시 열린 나날들이었다. 


이후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도중에 여러 명의 소피아 시민들에게서 인터넷으로 연락을 받았다. 전시벽에 부착된 안내문의 연락처를 보고 메시지를 보낸다며 신선한 전시 방식과 멋진 사진들에 감사한다는 말을 전해왔다. 숲이 선사한 관계의 도미노가 국경 너머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 역시 크리스티나가 없었더라면 파생될 수 없는 사건이자 관계들이었다. 그녀가 만든 도미노 현상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들 간의 연결성을 새삼 깨달은 불가리아에서의 시간들. ‘숲’을 가슴에 품고 여행한 덕분에 귀한 인연들이 내 삶으로 찾아들었다.


소피아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알렉산드르 넵스키 교회, 소피아, 불가리아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90th 퍼포머

: Kristina Stefanova


- 국적: 불가리아

- 촬영지: 소피아, 불가리아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를 좋아한다. 사소한 풍경 속에서도 경이로움을 발견해 내기 때문이다. 나도 소년 시절에는 그런 계절들을 살았을 텐데 세파에 휩쓸리고 마음에 때 묻은 지금은 눈 앞의 풍경들이 탁하게 보일 때가 많다. 크리스티나는 반짝이는 눈동자의 소유자였다. 웃음꽃을 연발하며 사소한 일에도 자주 감탄하던 그녀의 눈빛 안에서는 언제나 별이 반짝였다. 내가 불가리아에서 새로운 인연의 물길을 따라 흐를 수 있었던 것도 크리스티나의 맑은 기운과 생동감 넘치는 바이브 덕분이 아닐까 싶다. 함께하는 내내 웃음을 멈추지 않았던 크리스티나의 모습이 이따금 그리워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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