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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Aug 28. 2019

21. 외로움이 빗발치는 나날들

쿠알라룸푸르 3_다들 쉬쉬하는 성애의 문제가 왜 하필 나에게

심야의 풍경, 부킷빈탕, 쿠알라룸푸르, 말레이시아




오래된 고독은 자극에 취약하다


평온하던 일상에 야릇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성을 향한 안토니의 왕성한 욕망이 파장을 만들어 낸 것이다. 겸손하고 매너 좋고 배려심 깊은 그였지만 이십 대의 뜨거운 피는 어쩌지 못했다. 더욱이 안토니는 육욕의 화신들이 모여 있는 남부 유럽 출신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남부 유럽인의 성향을 ‘핫 블러드(Hot Blood)’라고 설명했다. 온몸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들이라는 말이었다. 자신도 그러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안토니와 재회한 당일, 현지인들 주축의 친목 모임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적당히 놀다가 숙소로 돌아왔지만 안토니는 다음날 점심이 넘어서까지도 복귀하지 않았다. 모임에서 만난 현지 여성과 밤을 불태웠던 것이다. 발리에서도 똑같은 일을 벌인 안토니였다. 현지 여성 하나를 알게 되었다며 그녀의 스쿠터에 실려 숙소를 빠져나간 그는 다음날 오후가 늦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구체적으로 묻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생애에서 그렇게나 로맨틱한 시간은 처음이었다는 그의 고백에서 간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발리 올 로케이션으로 1박 2일짜리 성인 드라마를 찍고 있는 안토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성을 향한 육체적인 돌진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한창 그래야 할 시기에 놓인 안토니였다. 욕망에 충실한 태도는 행복의 성취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도 했다. 수많은 욕망 중에서도 으뜸은 애욕이니 안토니의 좌충우돌 행보가 별로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욕망에 무분별하게 휘둘려 인생을 그르친 이들이 많다지만 겪어보지도 않고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 현장으로 뛰어들어 직접 경험하며 깨우쳐야 할 터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안토니는 자신이 밟아야 할 과정을 착실히 밟아나가는 중이었다. 


물론 안토니가 현지 여성들과 맺은 관계는 지속성 없는 일회용 만남이었다. 그렇지만 그 역시도 부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비록 하룻밤의 사이라고 해도 충분한 존중과 배려 속에서 서로를 상승시켜주는 인연이었다면 오히려 인생에서 다시없을 축복의 상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절제한 섹스 중독이나 자기파괴적 일탈 심리에서 비롯한 행위가 파행을 주도할 뿐, 하룻밤의 관계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섹스 역시 소통을 위한 도구고, 도구는 자기주장이 없는 중립적 존재니 그 자체로는 인간에게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잘못 사용하는 게 문제일 뿐 섹스는 아무 죄가 없다. 대개의 경우 섹스가 야기하는 사회적 해악들은 잘못된 사용에서 비롯한 것들이다. 안토니의 경우, 욕구를 주체적으로 활용한다기보다는 그것에 휘둘리는 쪽에 가까웠지만 그 수위가 문제시해야 할 정도로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문제다 싶었더라도 본인의 선택이니 나로서는 영역 밖의 일이었다.  


이성이 한데 모인 친목 모임에서 안토니가 낙원으로 함께 가자는 표현을 에둘러서 하며 나를 살살 꼬드기긴 했다. 그렇지만 아주 가벼운 수준의 유혹이어서 쉽게 거절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안토니가 그날 이후로도 성애의 나날들을 계속 이어가며 내 바로 곁에서 야릇한 기운을 뿜어내다 보니 한동안 잠잠했던 내면에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숙소에서도 미묘한 기류가 날마다 감돌았다. 물가가 저렴한 국가이기 때문인지 숙소에는 장기 체류자가 많았는데 혈기왕성한 남녀가 한 공간에서 긴 시간 동안 먹고 자다 보니 그 사이에서 빚어진 끈적끈적한 기운이 숙소 곳곳을 은근하게 흘렀다. 여러 감정이 남녀 사이에서 서로 감기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했다. 


아랍계 남성 여행자 하나는 다정한 말투를 앞세워 중국 여성과 일본 여성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했다. 자유에 도취된 듯 보이는 젊은 서양 여성 몇몇은 헐벗은 차림의 남성 여행자들과 나란히 앉아 캔맥주로 몸과 마음을 적시길 반복했다. 화려한 외모를 지녔거나 스타일이 좋은 여행자가 새로이 입실하면 숨 가쁜 움직임이 숙소 곳곳에서 뒤따랐다. 젊은 중국 남성 하나는 투숙객이 분주히 오르내리는 계단에 버티고 앉아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불렀다. 속셈이 뻔히 들여다 보였지만 기타 연주와 노래 솜씨는 여자를 유혹하기에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며칠 후 기타를 연주하는 그의 어깨에 젊은 서양 여성 하나가 나른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대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안토니가 뿜어 내는 쾌락의 물결에 더해 숙소에서마저 연일 혼곤한 기류에 휩싸이다 보니 중심이 계속 흔들렸다.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어지러운데 안토니가 보여주는 뜻밖의 상태가 생각 세포까지 자극하기 시작했다. 성적 쾌락의 몰입도를 점점 높이고 있는 안토니였지만 그러한 상황에 놓인 젊은 남성 치고 내면의 상태는 무척이나 고요하고 부드러웠다. 그렇게 평화로운 방식으로 성을 탐닉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다. 간밤에 상대 여성과 벌인 일을 열심히 설명하는 안토니에게서 내면이 요동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안토니가 자신의 상태를 숨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흐름에 몸을 맡긴 채 필요 지점에서만 쇄도하는 방식으로 쾌락의 밤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 안토니의 모습을 날마다 경험하자니 어떤 날에는 내가 문제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혼란을 야기할 정도로 위협적인 금기가 내 안에 아직도 남아 있어서 방어 기제가 저 스스로 작동한 건 아닌지, 안토니는 지극히 건강한 삶을 살고 있을 뿐인데 낡은 편견이 발동해 그가 욕망에 휘둘리고 있다고 판단한 건 아닌지, 자신의 욕망에 정직할 뿐인 남유럽 사내들의 성적 자유분방함을 내가 괜히 문제시하고 있는 건 아닌지, 예기치도 못한 물음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런 와중에 성애의 문제와 관련해 안토니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따금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 모습으로 보아 스스로도 자신의 행보가 지나친 수준에 이르렀다고 느끼는 듯 보였다.  


며칠간 동고동락했던 안토니가 떠날 날이 왔다. 진작에 다른 도시로 넘어갔어야 하는 안토니였으나 여자를 탐닉하느라 쿠알라룸푸르에서의 체류 기간이 계획보다 길어졌다. 나에게 깊은 포옹을 한 안토니는 큰 배낭과 작은 배낭을 앞뒤로 메고 씩씩하게 숙소를 걸어 나갔다. 이제부터는 동선이 달라 이번 여행에서는 더 이상 마주칠 일이 없을 터였다. 이로써 40일이 넘는 안토니와의 인연을 일단락했다. 돌아보면 다사다난한 시간들이었다. 


안토니는 갔지만 화두는 남았다. 다들 쉬쉬하지만 삶에서 풀어야 할 아주 중요한 숙제 중 하나인 성애의 문제. 내면에서는 여전히 파고가 높았다. 프로이트는 인간 심리의 상당 부분이 성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그의 이론을 후배 학자들이 적잖게 수정했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대목이 유효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 참에 인간의 행동 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성의 원리를 좀 더 깊이 탐구해볼까 생각하다가도 그게 또 자극의 불가마 속으로 들어가야만 가능한 일인데 다른 목적으로 쿠알라룸푸르까지 흘러 들어온 처지에 거기에까지 신경을 써야 하나 싶어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날들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 생명 활동의 원동력, 성 에너지

이 시기의 경험은 결과적으로 성 에너지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당시에는 하루하루 일상을 바로 세우기에 바빴으나 그 과정에서 누적된 의문으로 인해 후에 관련 분야를 탐구하게 되었다. 성 에너지는 생명의 본바탕이다. 생명 활동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성이 이루어진다. 자연의 섭리라는 얘기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에너지를 순환시킬지 여부다. 에너지의 성격을 건전한 방향으로 전환해 활동의 동력으로 삼는 것이 좋다. 이때 성 에너지는 창조적인 쓰임새를 보이게 된다. 자기 관리가 허술한 상태에서는 외부에서 약간의 자극만 가해져도 강렬한 충동이 발생한다. 외로움을 피할 수 없는 장기 여행에서도 이런 현상은 흔하다. 이성과의 직접적인 소통은 아주 좋은 해법이지만 충동에 휩쓸린 상황에서는 방향성이 일그러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 역시 훌륭한 인생 공부일 테니 무작정 자제력만 발휘하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상황에 부딪쳐 보는 게 어떨까 싶다. 그러다가 스스로 이게 아니다 싶은 느낌이 든다면 그때 자신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차분히 살펴보고, 적절한 해법을 찾아 실천으로 옮기면 될 것이다. 정신 현상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융 심리학의 핵심 화두 중 하나인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문제를 곁들여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아니마'는 남성 안의 여성성, '아니무스'는 여성 안의 남성성을 칭하는 심리학 용어다. 융 심리학의 가장 난해한 화두 중 하나여서 심리학의 기초 원리를 터득한 후 접근하는 것이 좋다. 뜻밖의 진실들이 잔뜩 숨어 있는 영역인 만큼 차후에라도 꼭 탐구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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