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떠버린 미각
2019년 2월, 메슥메슥한 입덧에 정신 못 차리는 임신 초기였다. 갑자기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올랐는데, 그건 바로 치킨이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사 먹는 치킨이 아닌, 내가 만들어 먹던 치킨이 먹고 싶었다.
우리나라 치킨집 수만 무려 2만 9000여 개 (2020년 기준)이라고 하니, 그냥 창문 열어서 보이는 치킨집 전화번호만 눌러도 치킨은 바로 배달될 것이다. 굳이 번거롭게 집에서 치킨을 만들어? 어떤 사람은 유난스럽게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때는 사실 음.. 부끄럽지만 지갑이 얇았다. 생활비를 정말 100원 단위로 예민하게 쓰던 시절이었기에, 치킨 한 마리 가격이 나에겐 하늘 높이 매달린 굴비처럼 보였다. 그래서 치킨이 먹고 싶은 날엔 마트에서 닭가슴살을 사다가 직접 튀겨먹었다. 5천 원이면 저녁 반찬으로 푸짐한 양이었고, 무엇보다 갓 튀긴 치킨은 정말이지.. 훌륭했다. 배달치킨이 가게에서 우리 집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올 때, 맛을 길에다 흘리고 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무튼 가격으로 보나 맛으로 보나 집에서 튀긴 치킨이 최고였는데, 슬프게도 입덧 중인 임산부는 부엌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 차라리 그 맛을 몰랐다면.. 스스로 눈을 떠버린 미각이 미운 순간이었다.
"여보! 나 치킨이 먹고 싶어.." (이럴 땐 남편에게 투정을 부리는 게 최고다)
"그래? 시켜줄까?"
"아니.. 내가 만든 치킨이 먹고 싶어. ㅠㅠ"
"뭐? 푸하하" 내 말에 황당한 듯 웃는 남편.. 진지하게 되묻는다.
"만들어줄까?"
만들어준다고? 눈이 휘동 그레진 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이 튀김가루가 어딨는지 알까? 집게가 어딨는지는? 에어프라이어에 몇 도, 몇 분 돌려야 하는지도 나에게 다 물어볼 게 뻔하다. 부엌은 또 한바탕 뒤집어지겠지.. 상상만 해도 귀찮았다. 이럴 땐 포기가 정답!
"그냥 치킨집에 전화하자."
10프로 정도 모자라는 맛이지만, 뭐 어떤가. 다음에 만들어 먹으면 되지. 다행히 입덧은 3주 만에 금방 잠잠해졌고, 기름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자마자, 치킨부터 만들어 먹었다.
치킨을 집에서 만들 때는 간편하게 닭안심이나 가슴살 부위로 산다. 형편이 괜찮다면 우유도 같이 산다. 우유는 닭고기의 잡내를 잡아주는데, 우유가 없다면 끓는 물에 살짝 데쳐도 괜찮다. 튀김가루도 산다. 집에 부침가루나 밀가루가 있다면 그걸 써도 괜찮다.
1. 마트에서 돌아오자마자 우유에 닭을 재운다. 닭 포장용기를 뜯어서, 고기 아래쪽에 있는 육즙 패드를 빼고 우유를 부어준다.
그냥 이렇게 냉장고에 보관한다. 냉장고에 보관할 때는 투명 비닐로 살짝 덮는다. 속이 보이지 않는 검은 비닐로 덮어두면... 그대로 또 까먹는 사람이 바로 나다. 아! 우유에 소금도 살짝 뿌려둔다. 그동안 소스를 먼저 만들어 준다.
2. 간장 2 : 설탕 1 : 다진 마늘 0.5 : 물 1 비율로 냄비에 넣어 한 소끔 끓여준다. 여기에 전분가루를 넣어주면 찍어먹는 소스가 되고, 그대로 프라이팬에서 치킨과 함께 볶아주면 간장 마늘치킨이 된다
3. 1시간 뒤 우유 목욕을 마친 닭고기를 물로 깨끗이 씻어준다. 그리고 먹기 좋게 잘라준다. 비닐봉지에 고기와 튀김가루를 넣어준다.
이때 카레가루를 같이 넣어준다면 더욱 맛있는 향이 난다.
4. 비닐 입구에 입을 대고 바람을 조금 넣어서 빵빵하게 만들어준다. 봉지 입구를 돌돌 말아 공기가 빠져나가지 않게 막아준 다음 열심히 흔들어준다.
닭고기들이 봉지 안에서 정신없이 가루 옷을 곱게 입는다. 나중에 식용유도 한 스푼 넣어서 비벼준다.
5. 에어프라이어에 기름종이를 깔고 치킨을 넣는다. 180도에 10분, 뒤집어서 10분.
사실 공기로 튀긴 것보다 실제 기름에 튀긴 것이 훨씬 맛있지만, 기름을 쓰고 난 후의 뒷정리는 피하고 싶은 것이 주부의 마음이다. 에어프라이어는 그 마음을 달래주는 훌륭한 도구.
띵! 에어프라이어가 할 일을 마치고 나면 집게로 하나 꺼내어 먹어본다. 속까지 익었... 아뜨뜨. 다 익었다! 다 익은 치킨들을 모두 프라이팬에 넣고, 아까 만들어둔 소스와 함께 버무린다.
백숙과 치킨, 똑같은 재료이지만 어찌나 이렇게 맛이 다른지.. 누군가 어느 쪽이 좋냐 하면, 조심스레 치킨의 편에 선다. 튀기면 정말 신발도 맛있는 걸까? 튀긴 닭고기는 중독적이다.
미국 퍼듀대학교의 리차드 매티스 영양학 교수 외 연구진은 지방 맛에 관한 논문(Oleogustus: The Unique Taste of Fat)을 냈다. 지방 맛이 쓴 맛, 단 맛, 신 맛, 짠맛, 깜 칠 맛 외 6번째 맛이라며 올레오구스투스(Oleogustus)라는 이름도 지어준다. 이 맛은 특징이, 너무 많이 먹으면 거부감 느끼고, 적게 먹어야 다른 맛과 어우러지면서 맛있다고 한다. 치킨이 백숙과 다른 맛을 내는 이유는 이 지방 맛을 극대화시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튀겨야 만들어지는 바삭한 식감은 어떻고.. 신경문화인류학자 존 앨런은 <미각의 지배>라는 책에서 '바삭'하는 소리가 뇌를 자극한다고 썼다. 그래서 바삭한 음식일 수록 더욱 중독성 있다고.. 바삭한 튀김옷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걸 보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배달 치킨이 아쉬운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바삭한 식감이 덜 해서 아닐까? 프랜차이즈의 레시피는 나보다 뛰어날지언정.. 만들어지자마자 사람 입이 아닌, 종이 박스로 들어가니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밖에..
'음~ 이 맛이야..'
몇 주를 참다 먹은 갓 치킨은 정말 맛있었다. 아직도 그때의 부엌이 기억난다. 그 치킨을 같이 먹던 뱃속의 아기는 벌써, 두 돌이다.
이웃집 과학자: <치킨이 맛있는 과학적 이유가 있다>를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