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를 맞춘다는 것

배려 그리고 사랑

by 맘가는대로

작년 겨울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과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익숙했던 몸과 마음을 잠시나마 그냥 그 순간을 살아도 되는 시간과 공간에서 새롭게 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미 1년 반이 지났지만 지금도 내 삶에 도움이 되는 배움은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속도를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누구나 자신만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렇다. 그 기준은 사회가 만들어준 것도 있겠지만, 어떤 것은 내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만들어진 내 습관이나 편견에 의한 것도 있다. 내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나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각자의 기준 중에 속도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나는 여러 분야에서 내 속도를 막연히 알고 있을 뿐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인지를 잘 알지 못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비록 거리가 800km나 되는 먼 길이지만, 걷는 것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었다. 1000m가 넘는 피레네 산맥을 넘는 첫날은 눈이 많이 와서 꾸불꾸불한 차도를 따라서 올라갔는데, 몸도 마음도 준비가 덜 되어서인지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며 몸이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길을 함께 한, 길에서 만난 사람들도 모두 첫날의 무게와 예상치 못한 길의 험난함으로 모두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래도 첫날은 꾸역꾸역 30여 km를 걸어올라서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나름 앞서서 걸어온 내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다음날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평균적으로 25~30km를 매일 걸어야 하는 길인데 6~7시간 걸으면 되겠지라고 했던 생각이 내 속도로 인해 틀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30km를 걸으면 7~8시간 정도면 되었지만 나는 항상 30분에서 한 시간씩 더 걸리는 것이었다. 걷는 것 하나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었기에 처음 며칠은 뒤쳐지는 나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쉬는 시간을 줄여보고 발걸음을 재촉해서 그 간격을 조금이라도 좁혀보고자 발버둥을 쳤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걷는 것을 즐기고 충분히 잘 걷는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은 그저 남들보다 산책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즐기는 수준이었지, 몸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며 산길을 걷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을 며칠을 뒤에서 쫒아가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아, 내가 잘 걷는 것이 아니었구나. 걷는 것도 사람마다 많은 차이가 있구나.'를 깨달은 것이다.

걷는 것이 아니어도 나는 스스로를 빠른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실제로 빠른 것도 있을 것이고, 착각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 속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도에 맞추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밥을 빨리 막으면 늦게 먹는 사람들은 불편할 수도 있고, 내가 말을 빨리 하면 누군가는 내 말을 정확히 알아들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시작점에서부터 새로운 것을 설명하면 누군가는 맥락을 잡을 수 조차도 없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상대의 말이 빨라서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너무 느려서 답답해하거나 하기도 하고, 설명을 띄엄띄엄해서 못 알아듣기도 하고 너무 자세히 해서 심지어 화를 내기도 한다. 이 모든 불편함의 시작은 사실 상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속도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아니 어쩌면 그 차이를 인지하지도 못하는 내게 있는 것이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가끔 어쩌면 종종 느끼는 서운함도, 회사에서 상사의 질책에 대한 분노나, 부하직원의 성과물에 느끼는 부족함도 서로의 속도를 몰라서, 알아도 인정하지 않아서, 인정은 하지만 맞춰줄 수 없어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크면 클수록 상대의 속도를 인정하기가 어렵다. 대표적인 경우가 부모 자식 사이가 아닌가 한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 부모는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한다. 때로는 취향마저도 옳고 그름의 기준에 따라 결정되기도 한다. 많은 경우는 부모의 결정이 아이가 겪을 수도 있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미래에는 그 덕분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기도 하지만 어쩌면 세상을 바꿀 기회는 잃어버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에 서로의 의견이 충분히 강한 시기가 오면 충돌이 잦아지거나, 어느 한쪽은 상처를 받게 된다. 그 시간을 지나 나이가 더 들면 자식들이 부모님들의 판단을 자신들의 지식에 맞춰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옳은 것을 알면서, 이렇게 하면 더 좋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기다리고 지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쩌면 속도를 맞추는 것은 일종의 위계질서를 의미하기도 했다. 부하직원은 상사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속도를 맞추기 위해 억울함을 안으로 삭이며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소위 윗사람은 자신의 속도를 다른 사람들이 맞춰주는 것을 자신이 옳기 때문이라고 쉽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대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상사가 부하직원의 속도를 인정해야 하고, 부모는 자식의 속도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고, 부부는 서로의 속도에 함께 맞춰가야 한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면서 옳고 그름의 기준이 과거의 그것과 항상 같지 않은 것도 같은 이치이지 싶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의 속도를 인정하는 것을 배려라고 생각한다. 그냥 그대로 상대방의 속도를 인정하고 기다리는 것, 내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내 속도를 따라오라고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배려이다. 더 나아가 상대의 속도를 인정하고 그 속도에 내 속도를 맞춘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 속도를 바꾸고, 내 기준을 포기한다면 아마도 나는 사랑에 빠져있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내 속도를 다 모른다.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상대의 속도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오늘도 조금씩 배워간다. 한 내 속도에 자신을 맞춰주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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