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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st in Translation Jul 18. 2016

시내버스로만 한국을 종주한 두 외국인

데이브 하잔, 2016년 7월 11일, 슬레이트

원문 : The Very Cheap Man's Guide to Crossing South Korea


Can you get across the whole country taking only local transit?


최근에 나는 친구 댄 레오나드(Dan Leonard)를 한국의 소요산 지역 부근에 위치한 한 장어구이 집에서 만났다. 소요산은 비무장지대에 바로 남쪽에 위치한 소도시로써 군인들만 많았고 수많은 야산들이 있는 게 특징이었다. 나와 레오나드는 아주 대담한 탐사를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오직 지역 교통 환승만(local transit)으로 여행하며 종주를 마쳤다는 도시전설 몇 가지가 있었는데, 시외버스나 기차, 혹은 페리 같은 배가 아니라, 교통카드나 동전만을 내면서 특정 지역 내에서만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일반 시내버스만 탑승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걸 뜻했다. 특히 이런 버스들은 전 세계의 고된 일상으로 너무나 피곤한 통근자들이 매일 의존하는 교통수단이기도 하다.


올해 41세인 댄 레오나드는 미국 뉴욕 버펄로 출신으로서 매우 큰 체격의 웃긴 친구다. 그는 하와이 셔츠를 입고 돌아다니는 것을 결정했는데, 이는 내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그는 2001년부터 한국에서 정착했고 한국어도 매우 유창하다. 나는 한국어가 서투르기 때문에 그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은 이번 여행에 꼭 필요했다. 나도 그와 비슷하게 14년째 여기서 살고 있지만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


우리의 여행 계획을 장어구이집 사장님께 한번 말씀드렸더니, 그는 우리를 마치 바보처럼 쳐다보았다. 당시 사장님의 표정은 우리가 여행하는 내내 볼 것만 같았다. 그는 우리에게 좀 더 빠른 종주 방법을 알려주었다. 소호산 역에서 지하철을 탄 다음에 서울에 도착해서 KTX로 갈아타고 부산역에 도착하라는 말이었다. 3시간이면 여기서 부산까지 갈 수 있다는 뜻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핵심은 과연 무엇일까? 누구나 산맥을 빠르고 안전하게 가로지르는 초고속열차를 타고 땅의 반대편 끝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다는 것? 우리는 모험을 원했을 뿐이었다. 우리는 왜 이런 여행을 하고 싶은지 이유를 언급했지만, 장어구이 가게 사장님은 연신 머리만 흔들었다. 한국 곳곳을 돌아다니고자 자신의 시간 가운데 무려 3일이나 허비하고, 여행을 마친 다음에 집으로 돌아와서 우리가 체험한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맥주를 먹으며 동료들에게 말해줄 거라는 계획을 그는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우리가 만났던 한국인들 대다수도 사장님과 비슷한 반응을 보여줬다.


하지만 오직 시내버스만 타면서 한국을 여행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크나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한국을 보고 느끼고 싶었다.


Day 1


여행의 첫 번째 구간은 장어구이 집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소요산 부근에서 36번 버스를 타고 서울 북쪽 지역인 노원에 도착했다. 물론 소요산 역에서 서울 지하철 1호선을 탑승해서 서울 경계의 남쪽 도시인 경기도 아산까지 도달할 수도 있었을 게다. 하지만 지하철을 타고 내려간다는 것은 뭔가 부정을 저지르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하철을 아예 생각하지도 말자고 마음먹었다. 그저 버스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지하철이 아닌 버스로만 이동할 때 나타나는 문제점은 교통량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매우 운이 좋게도, 서울과 경기도의 버스 노선은 수도권 전 지역을 커버했다. 출근시간대 특유의 교통체증을 뒤로한 채 우리는 순조롭게 나아갔다. 정말로 복된(auspicious) 출발이었다.


운이 좋지 않았던 점은 그렇게도 버스나 지하철에 끊임없이 캠페인을 펼치고 대외적으로 알리고 있지만, 교통에 대한 한국인들의 공공질서 의식은 현대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낮았다는 사실이었다. 보통 두 개의 좌석이 한 줄로 구성된 버스에서 사람들 대다수가 바깥쪽 좌석을 앉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창 쪽 좌석을 굳이 양보하지 않으려는 경우가 대단히 흔했다. 젊은 친구들은 노년층이 다가와도 일어나서 양보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한테는 약간 짜증 나는 상황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간 "여기는 미국이 아니니까 나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양보를 해야 돼."라는 말을 수차례나 들었다.


첫 번째 구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자 우리는 서울을 제대로 경험하게 되었다. 서울의 맥도널드 매장들은 정말로 완벽했고, 심지어 스마트폰 판매 가게가 무려 3군데나 있는 하나의 건물도 여기에 있다. 댄과 나는 곧바로 142번 버스를 탔고 순천향대학 병원 정류장에서 5005번 버스로 갈아탔다. 한강을 지나친 이 버스는 우리를 용인 버스터미널로 안내했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4번째로 가장 큰 도시를 약 2시간 만에 횡단한 셈이었다.


용인은 매우 한적한 도시였다. 이곳에서 우리는 도시를 따라 지나는 작은 개천에서 두루미가 자신의 몸을 강물로 씻는 장면을 목격했다. 근처 중국집에 들어갔는데, 배달만을 중요시했는지 테이블은 별로 많지 않았다. 나는 짜장면을 먹었고, 댄은 글루틴 과민증 때문에 면이 아닌 새우볶음밥을 주문해서 먹었다. 식사를 하면서 우리는 스마트폰을 충전했다.


용인 버스터미널 주변은 구시가지에 속한 지역인데,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이 만약 대형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을 둘러본다면 한강으로부터 나타난 남한의 기적(South Korea's Miracle on Han)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함께 모여서 소주(한국에서 제일 흔한 술)를 마시며 라면을 먹는다.


경기도 안성으로 가는 22-1번 버스는 이윽고 도시를 벗어나 농촌 지역에 진입했다. 댄은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 (나는 멀미 때문에 그 좌석을 피하는 편이다) 옆에 앉은 대학생과 영어로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그 학생은 미국인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회화실력을 연습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고무적인 표정을 지었다. 댄의 이점은 여기서 주로 나타난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점 때문인지는 몰라도 역겹고 혐오스러운 티셔츠를 입은 댄에게 한국 사람들은 스스로 다가와서 친하게 지내려고 하거나 말을 영어로 건다. 


우리는 드디어 전형적인 농촌 지역 안으로 들어왔다. 여름날의 곡식은 알맞게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매우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의 들판을 계속 지나갔다. 숲의 나뭇가지들이 지붕 모양으로 우거져서 곡식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버섯도 심어져 있을 테고, 혹시 인삼도 있으려나?


농촌 지방에 사람이 없어 점차 황폐화되어가고 있다는 두려움이 한국에는 만연하다. 여기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뒤따르는데, 평균적으로 농촌 지역 사람들의 평균 나이는 계속 올라가고 있고 젊은층에 속하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할 때마다 작은 체형의 어르신들이 지팡이를 두른 채 탑승했고, 어떤 분들은 허리가 굽어져 마치 꼽추처럼 움직이기도 했다. 이것은 평생 동안 일을 열심히 했다는 것과 더불어 계속되는 가난 때문에 불균형한 영양 섭취로 인한 결과물이었다.


어르신들은 푼돈이라도 벌기 위해 여전히 일을 한다. 한국의 노년층 가운데서 약 절반 정도는 가난하게 살고 있다. 그들의 수많은 자식들과 손자들이 고향을 떠나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이주해 살고 있고, "강남 스타일"에 적응되어 가는 순간에도 어르신들은 농장에서 일을 하거나 빈 병을 모으거나 도로 청소를 하면서 하루에 2~3 달러를 받으면서 비록 비참할지 몰라도 자신들의 생을 계속 영위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차를 구입할 능력도, 운전할 여유도 없다. 가까운 이웃 지역에서 가서 가족이나 친구들을 만나려고 할 때면 주로 버스를 이용한다. 왜냐하면 어르신들은 버스를 탈 때마다 가격 할인을 받기 때문이다. 버스는 노인들의 유일한 이동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안성에서 댄 때문에 우리는 길을 잃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댄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가 유일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책임으로 몰았다. 우리는 안성의 대규모 로터리에서 내렸다. 이 지역은 중앙에 강물이 흐르고 있었고, 엄청 큰 사찰 탑이 서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천안 터미널로 향하는 201번 버스를 기다렸다.


여기서 발생한 문제점은 외지인이 올바른 버스를 탑승하도록 도와주는 시각화 표시가 총체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버스 앞면에 있는 숫자, 시간과 노선을 설명한 포스터, 다음 버스가 언제 도착하는지를 알려주는 디지털 전광판 대신에 그저 회색 글자로 쓴 "버스정류장"이라는 글씨가 한국어와 영어로 표현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여기서 용인을 가든, 천안을 가든, 아니면 저 멀리 중국의 만주 벌판으로 가게 될지 누구도 모를 영문이었다.


그때 마주쳤던 택시 운전사들, 커피 바리스타, 그리고 어르신들 덕택에 우리는 목적지로 가는 세 가지 각기 다른 방향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도중에 유일하게 이곳에 도착하는 201번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 무려 20분이나 걸렸다. 우리가 다시 홀로 남겨졌을 때 나는 친구인 댄을 깜짝 놀려주기 위해서 캐내디언 클럽(Canadian Club)이 담긴 휴대용 술병을 꺼냈다. 소요산에서 떠나기 직전에 내가 미리 챙긴 술이었다. 우리는 다음 버스가 오기 전까지 행복하게 술을 나눠 마셨다. 하지만 25명 정도의 근처 초등학교 학생들이 이곳으로 시끌벅적하게 다가오자 우리는 곧바로 술병을 치워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었다.


대전을 거쳐 세종까지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술잔을 돌렸다. 세종시에 도착하고 나니 시간은 어느새 저녁대로 바뀌어 버렸다. 우리는 그곳에 도착하면서 밤을 세종에서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세종은 신도시이기 때문이다. 도시 자체가 생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호텔 같은 건물을 찾기가 어려웠다. 호텔이 전무했다는 말이 더욱 어울릴 정도였다. 세종은 한국 정부가 주도적으로 만든 도시로써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겸 서울 바깥 지역의 경제적 효과를 일으키고자 행정적 수도를 맡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정부는 이곳을 한국의 새로운 수도로 만드려고 하는데, 마치 호주 캔버라(Canberra)처럼, 재미도 없고, 활력도 보이지 않고, 볼품도 없는 꼴로 완성시키는 듯 보인다. 세종에서 우리는 990번 버스를 탔고 대전의 반석역 근처에서 내렸다. 


한국에는 오래된 농담 하나가 있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외국인을 뭐라고 지칭하는지 아는가? 바로 '장로(Elder)'다. 여기 한국에 와있는 몰몬교 선교사들은 언제나 다른 외국인들과 잘 어울리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젊고 외양을 단정히 하며 극도로 공손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예수 말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를 원한다. 만약 당신이 그들의 고향 풋볼 팀 얘기를 꺼내게 된다면, 평생 친구 한 명을 아주 쉽게 얻을 수가 있다.


반석역 근처에서 우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두 명의 몰몬교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호텔이 밀집한 지역을 알아냈다. 그곳에 도달한 우리는 한국의 전형적인 호텔식 건물들이 엄청 많다는 점을 깨달았다. "모텔(Motel)"이라 불리는 곳은 가격이 싼 호텔을 뜻한다. "여관(yeogwans)"이라는 건물은 더욱 싼 호텔을 의미한다. "민박(minbak)"은 그저 땅바닥에서 잠만 자는 곳을 얘기한다. "러브모텔(Love Motels)"은 당신이 배우자나 부모님의 감시망을 피하면서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와 성관계를 하려는 곳에 가깝다. "무인텔(Muintel)"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들을 위한 러브모텔이다. 그저 기계에 돈을 투입한 다음 열쇠를 받아서 정해진 호실로 가면 된다. 모텔 직원과 부끄럽거나 불안하게 "아이 컨택"할 필요가 없는 곳이 바로 무인텔이다.


우리는 여관과 러브모텔이 반쯤 섞인 공간에서 묵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멕시칸 레스토랑에 가서 우리의 여행 첫 번째 날을 축하했다. 나는 맥주를 마셨고, 댄은 커다란 잔에 가득 담긴 모히토를 계속 들이마셨다.


Day 2


대전 중심부에 위치한 중앙시장(Jungang Market)은 웬만한 한국 도시들에 있을법한 조그마한 시장이었다. 백화점과 대형 쇼핑몰에 의해 점차 없어진다고 말을 많이 하지만 시장은 지금도 한국의 서민과 하층에게 우선시 되는 곳이다. 중앙 식당이라는 곳에서 우리는 갈비탕으로 아침식사를 해결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얼큰하게 취한 두 명의 어르신들의 모습을 재미있게 관찰했다. 식당을 나오면서 나는 발을 잘못 헛디뎌 넘어졌고 결국 식당 소유의 소주잔을 깨트리고 말았다.


옥전으로 가는 607번 버스를 타고 창밖을 보니까 정말로 낙후된 지역이 나타났다. 여기서 타는 사람들의 억양은 강했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표준어가 통용되지 않는 듯 보였고, 그 지역 특유의 사투리(provincial directs)가 강세를 띠기 시작했다. 이제는 댄과 지역 사람들 간의 대화가 참으로 어렵게 진행되었다. 각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판국까지 도달했다. 우리는 그 지역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매우 특이한 별종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중년  두 명의 뚱뚱한 백인 남성들이 옥천 지역에 출현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던 광경을 현지 사람들은 1951년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 군인들이 여기를 지나간 이후로 비슷하게 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옥천군 양산면 부근에서 우리의 행운은 소진되고야 말았다. 김천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현지 주민들에게 우리는 오직 시내버스만 타고 전국 일주를 한다고 얘기를 했다. 그러자 버스 운전사와 승객들은 우리의 여행 방식이 정말로 가능한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펼치는 게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갑자기 커다란 목소리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몇몇 버스정류장과 주유소들을 알려주는 동시에 다음 버스가 언제 오는지를, 버스가 과연 오긴 하는지를, 어디든 여기보다 좀 더 문명화가 진행된 곳으로 안내해줘야 한다든지, 무차별적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결국 버스 운전사가 어르신 승객들의 모든 의견을 기각(overrule)했다. 그리고 우리를 전북 진안군 노천리의 한 도로 부근에 내려주었다. 그러면서 근처 주유소로 이동해서 김천으로 가는 버스에 타라고 조언을 건네주었다.


주유소에 도달하자 그곳 직원들이 우리에게 김천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김천까지는 보통 4시간 30분 정도 걸리기 때문에 도착하게 된다면 아마 오후 8시쯤 될 거라고 덧붙여 말했다. 주유소 편의점 내에 술의 재고량을 체크하고 나서 우리는 이곳에 20분 이상 있는 게 불가능하다고 합의를 봤다. 이 도로를 4마일 정도 쭉 따라 걸으면 노천리보다 조금 더 큰 지역인 환간면이 나온다는 얘기를 건네들은 후 우리는 몇 가지 식료품을 구입했고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날씨는 뜨거웠다. 우리가 걷는 도로 주변에는 온통 논밭밖에 없었고, 간간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소형 주택들이 보였다. 2.5 마일 정도를 걷고 있는 도중에 한 버스가 우리 옆에 섰다. 우리가 탔던 125번 버스였는데, 기점에서 출발해 종점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버스 운전사는 우리에게 "왜 이러고 있어?"라고 물으면서 우리를 안으로 태웠다. 댄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운전사뿐만 아니라 승객들 모두가 우리를 향해 웃었다. 그들은 우리를 무료로 태워줬고, 김제 황산면의 한 버스터미널에 내려주었다. 


거기서 우리는 버스를 두 번이나 또 갈아탄 다음에 결국 구미에 도착했다. 싸구려 모텔들이 가득한 곳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묵기로 결정했다. 삼겹살을 구우면서 저녁식사를 먹었는데, 댄은 오랫동안 소주를 입에 대지 않았지만, 모처럼 한국의 정서와 기를 나와 함께 느끼기 위해서 그것을 마셨다. 우리는 3일째 구역이 이번 여행에서 제일 어려운 곳이 많다는 점을 깨달았다. 낙후된 경산 지역을 통과해서 계속 남쪽으로 진전하며 마지막 도착지인 부산 해운대로 가는 날이었다.


Day 3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일찍 일어나자고 약속을 했건만 다음날 아침 일찍 댄의 문을 두드리자 감감무소식이다. 그때 시각이 오전 8시 30분이었는데도 말이다. 늦게 일어난 죄로 그는 아침 커피를 못 마시게 되었고, 자신이 직접 베트남에서 가져온 원두를 나로 인해 몰수당했다. 우리는 9시 15분쯤에 거리로 나섰다.


바깥에는 비가 엄청나게 쏟아져 내렸다. 약간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왜관으로 가는 버스 172번을 탑승했다. 버스에서 내린 다음에 환승을 하기까지 30분 정도 남아 있어서 우리는 근처 카페로 들어가 커피와 베이글을 주문했다. 우리가 들어서자 그때까지 등장을 보이지 않았던 젊은 여종업원이 쏜살같이 안에서 나와 2분 만에 우리가 주문한 것을 완성해서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에게 대구로 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북대구를 향하는 250번 버스를 탔는데, 버스 안은 마치 당신의 할머니가 잠자는 방과 비슷한 분위기가 베어나왔다. 좌석 뒤편은 접시 바닥에 놓는 작은 깔개 같은 모양과 흡사한 자주색 천으로 뒤덮여 있었고, 창문마다 리본 같은 것이 달려있었다.


대구는 한국에서 전통약재 유통 및 판매에 있어 가장 큰 중심지였다. 길거리에는 인삼을 통조림으로, 그리고 병으로 판매하는 가게들이 즐비했고, 약재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시하는 곳뿐 아니라 침술에 쓰이는 침을 파는 곳도 있었다. 우리는 근처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삼계탕을 두 그릇 주문했다. 삼계탕은 어린 닭을 약초와 인삼과 함께 물로 끓인 국이었다. 삼계탕과 더불어서 우리는 인삼주도 따라 마셨다.


식사를 하는 시간 내내 댄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이것은 길조가 아니라는 점을 의미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갑자기 어디선가 막혔던 셈이었다. 다음 목적지인 영천으로 가는 지역 시내버스가 다음날 아침까지 없고, 점심때가 돼서야 1대 정도가 올 거라는 소식이었다. 영천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해도 버스가 오전에만 있기 때문에 더욱 힘든 상황이었다.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일단 수중에 돈이 별로 없고, 솔직히 말해서 금요일이나 토요일 저녁을 영천이나 대구에서 보낼 만한 인내심 같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을 실패할 확률이 점차 높아갔다. 대구에서 경주로 가는 버스를 탑승해야만 했다. 어쩌면 이것은 아주 고귀한 실패일 수도 있겠다. 베토벤은 9번 교향곡을 가지고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 작업을 시도한 바 있고, 프로스트는 [스완네 집 쪽으로, Swann's Way]을 통해 문학을 재정의 하고자 했다. 하지만 베토벤과 프로스트는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수많은 명작 작품들을 창작했다는 점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우리도 오직 시내버스만 탑승하는 여행의 새로운 '마스터피스'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약간 편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는 근처 정류장에서 5번 시내버스를 탑승한 다음 대구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차했고, 거기서 경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야 말았다.


그렇다고 내가 고속버스를 탔다고 해서 심기가 엄청 불편하거나 죄의식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뒤로 눕혀지는 좌석과 직통으로 가는 버스라는 사실이 나의 정신적 고통을 완화시켰다.  경주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약간 젖어 있었는데, 우리가 탄 버스는 그 위를 총알처럼 빠른 속도로 재빠르고 품위 있게 지나갔다. 경주시외터미널에 내린 우리에게는 아주 간단한 계획이 있었을 뿐이다. 거리를 건너서 봉계시장으로 가는 500번 버스를 타면 끝이었다.


경주는 한때 한국의 수도였다. 14세기에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나타나 수도를 서울로 옮기기 전까지 경주는 약 1천 년 동안 지속된 신라 왕조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도착하면, 갖가지 사찰과 궁전, 그리고 대형 봉분들(burial mounds)을 볼 수가 있는데, 봉분은 잔디로 뒤덮인 커다란 언덕 같은 곳으로써 그 안에 왕이나 왕비가 매장되어 있는 무덤이다. 서울 다음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로 경주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버스 창을 통해 이런 역사적 광경을 육안으로만 목격했을 뿐이다.


울산 KTX 역으로 가는 308번을 탑승했다. 그리고 울산에 도착해서는 편의점 세븐일레븐에 들어가 휴대용 소주팩을 구입했다. 해운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마시려고 했다.


양산행 3000번 광역버스는 우리를 역 앞에서 실어줬다. 그리고 양산에서 우리는 11번 버스로 환승했다. 내 친구인 댄은 과거에 부산에서 살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우리의 여행 계획은 엄청나게 간소화되었다. 스펀지 몰에서 하차한 우리는 부산 도심 해운대로 가는 100번 버스로 다시 환승했다. 해운대는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으로부터 3블록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우리는 내렸다. 거기서도 바다 냄새를 맡을 수가 있었다. 구름은 흩어졌고 매우 청명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해변을 향해 알맞은 속도로 유지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엄청 빠르게 뛰어가면서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걸음을 옮기면서, 발걸음을 떼면서, 우리는 마음속으로 그곳에 빨리 도착하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그곳에 서 있게 된다면 우리의 여행은 종료가 되고 목표를 완수했다는 사실이 뒤따라 오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성공했다. 물론 거의 성공한 셈이다. 물론 딱 한 번의 편법이 있었지만, 우리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서 목표치를 이뤄냈다. 우리가 탄 버스는 24대였다. 버스를 타면서 우리가 지나간 정류장은 595군데였다. 280 마일을 달렸다. 5군데의 도(province)와 5군데의 광역도시를 방문했다. 우리의 지출비용은 교통카드 3만 원짜리 구입과 더불어 현금 7,000원이 고작이었다. 


바닷물이 차오르는 지점 몇 발짜국 앞에서 우리는 포옹했다. 여행 때문에 심신이 너무나 피곤했지만, 그래도 해안선을 따라 쭉 걸었다. 그리고 근처 술집에 들어가 우리의 여행 성공을 자축했다. 그때 댄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소주를 마시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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