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쉴러, 2009년 3월 8일, 파이낸셜 타임스
원문 : A failure to control the animal spirits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배우자였던 리디아 로포코바는 전직 발레리나였다. 그녀는 러시아에서 망명한 여성이었다. 따라서 케인즈는 자신의 인척관계에 놓인 사람으로부터 가장 최악의 사회주의 경제 체계에 따른 피폐해진 삶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규제받지 않는, 제한받지 않는 자본주의에 따른 엄청난 위기를 몸소 알 수 있었다. 1920~30년대 영국 내에서의 대공황을 통해 그는 현대 경제를 위한 절충안(middle way)을 찾고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작금의 위기로 인해 우리는 케인즈식 경제 모델의 부활을 목격하고 있다. 대공황 시절인 1936년에 그가 쓴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가지고 우리는 다시 한 번 얘기를 나누고 있다. 오늘날처럼 당시도 자본주의의 멸망을 언급하는 사례가 많았다. 1930년대는 서유럽 내 공산주의 전성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케인즈식 절충안은 실업률과 자본주의의 맹신자 및 공황을 회피하도록 되어있다. 또한 공산주의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력을 억제하고자 한다. [일반 이론] 현명하고 균형이 잘 잡힌 내용으로 인해 20세기 매우 중요한 경제 저서 중 하나로 되었다.
고실업률일 때, 신용 높은 정부는 국채 발행에 의한 적자 지출을 감행해서라도 수요를 확장시켜야 한다. 저실업률일 때는 정부는 반드시 그에 따른 부채를 반드시 갚아나가야 한다. 겉보기에는 절차상의 작은 변화일 것 같지만, 자본주의 체계는 이로 인해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의 급진적으로 메스를 들 필요가 없다.
케인지언들은 이러한 간단한 정책이 대서양을 사이에 둔 양쪽에서 실현되기를 매우 열심이었다. 그들은 그저 간략하게 얘기만 했을 뿐이지,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에 대해 [일반 이론]의 보다 중대하고 근본적인 메시지를 말하지 않았거나 어쩌면 의도적으로 등한시했을 지도 모른다. [일반 이론]은 자본주의 경제가 자신의 손에 한 번 떠나가면, 혹은 정부의 균형 잡힌 자세가 없으면 언제나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자본주의 경제가 원활히 작동하기 위해서 왜 정부가 평형추 같은 역할을 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이러한 통찰력의 포인트는 인간의 심리적 동기에 케인즈가 부여한 역할이었다. 때로는 거시경제학자들이 부정을 했지만, 야성적 충동이라 명명한 그는 이것이 위험을 떠안으려는 사람의 의지에 대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사업가들의 계산은 불안하다고 말했다. “향후 10년 동안 철도, 구리 광물, 직물 공장, 의약품 신용, 대서양 정기선, 런던에 있는 빌딩 한 채에서 나오는 생산 이익을 추정하려는 우리의 기본적인 지식은 어쩌면 매우 적거나 아예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어쨌든 결정하고 행동한다. 이것은 “야성적 충동일 때만 이뤄진다.” 여기에는 “행동하려는 원초적 충동”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특별히 모험적일 때는, 실제로 매우 모험적이기는 하다. 그들의 모험은 보통 미래에 대한 투철한 믿음과 경제 제도에 자긍심으로 인해 촉진된다. 이것은 경기 순환에 있어 호전적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야성적 충동이 또한 다른 방향으로 바뀔 수 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너무나 경계한다.
조지 아커로프와 함께 지은 저서 [야성적 충동]에서, 우리는 케인즈의 논의를 확장시켰고 행동경제학과 심리학을 기반으로 한 현대문학에 접목시켰다. 야성적 충동의 심리학적 근거에 대해서 오늘날 더 많은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로저 섕크나 로버트 아벨슨과 같은 사회심리학자들은 그동안 특히 인간적 흥미를 유발하는 이야기나 인간의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 등 많은 사례와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러한 것은 추상적인 계산보다 더욱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사람들의 경제적 기호는 대부분 타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이나 경제 체계 내에 서로 간에 오고 가는 대화를 바탕으로 형성되고 있다.
우리는 최근 동안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사례가 연속적으로 많아짐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닷컴 거품(dotcom bubble)이 있었고 젊은 백만장자들의 선망에 가까운 개인 스토리가 있었다. 2000년에 결국 그것이 터지긴 했지만, 곧바로 이른바 영리한 자산 ‘플리퍼들’(flipper, 계속 채널을 돌리는 TV 시청자라는 의미. 즉 매우 신속한 거래를 바꿔가며 하면서 수익을 거둬들이는 투자자들)로 인해 새로운 거품으로 대체됐다.
열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경제가 작동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의 산물이었다. 영리한 사람들이 구입하니깐 모기지 금융상품에 투자한다는 이야기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러한 자산을 매입한 부러운 사람들은 스스로 확인해봐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수고를 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그들과 옆에서 나란히 달리면 된다.
무엇이 열기와 이러한 이야기들을 존재하는 한 계속 지속되게 할 수 있도록 이끌었을까? 열기와 패닉에 빠져가던 도중 야성적 충동의 역할을 스스로 부정한 잘못된 경제이론으로 인해 우리는 현재의 경제 체계와 금융 위기에 놀랄 정도로 깊게 개입해 있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표준 고전 경제이론은 경제가 본질적으로 안정적이라고 말한다. 만약 사람들이 자유 시장에서 스스로의 경제적 이윤을 합리적으로 추구한다면, 생산품을 제조하든가 타인과 물물교환을 하면서 상호적으로 모든 유익한 기회를 다 써버릴 것이다. 상호적이고 이로운 거래를 위한 기회를 소진하는 것은 완전 고용으로 나타난다. 이 이론에 따르면 대안은 없다.
물론 어떤 노동자들은 고용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일시적으로 구직활동을 하거나 터무니없는 높은 임금을 요구할 때 일자리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한 고용 불안정은 자발적인 것으로 간주되거나 거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고전 이론은 또한 금융시장이 게다가 안정적일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스스로 이득이 된다고 볼 때만 거래할 것이다. 주식, 채권, 모기지 구입, 아니면 좀 더 복잡한 금융상품을 취득함으로써 금융시장에 사람들이 진입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사고자 하는 것 자체가, 아니면 구입할 가치가 있는지, 또한 파려고 하는 것의 가치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이 이론을 도외시하는 요인은 사람들이 너무나 과신할 때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익 때문에 행동할 때 자본주의는 그들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을 고려하지 못한다. 질병을 고치려는 사람들에게 의약품을 제공한다. 이건 그들이 실로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수익적인 것만 봤을 때, 그것은 사람들이 오해해서 원하는 것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것은 자칫 ‘만병통치약’(snake oil)을 만들어낼 수 있다. 만병통치약 자체에 대한 욕구로 인해 생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단점이다. 표준적인 경제이론은 자산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자칫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할 수 있다는 것과 그들이 구입하려는 복잡한 유가증권은 대신 그들에게 ‘만병통치약’과 비슷한 것을 판매하는데, 이것에 관한 리스크를 줄여주는 보험은 시장이 대신 판매하지 않다는 점을 설명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에는 자본주의 본질보다 더욱 광범위한 도덕이 존재한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애덤 스미스의 지혜를 더욱 이용해야 한다. 대부분 자본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생산물은 우리가 진실로 원하는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지불하려는 단위에 따라 그 가격이 정해진다. 반면에 신뢰가 높을 때, 또한 금융자산을 평가하기에 어려울 때, 사람들은 기꺼이 ‘만병통치약’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변함없이 언제나 그것의 실체가 드러나기 마련인데, 이때는 신뢰가 땅을 치고 경제는 급속도로 오염된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기 위해 정부의 역할은 보통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자산 시장을 관리하는 책임을 가져 사람들이 잘못 속아 ‘만병통치약’과 같은 자산을 구입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금융자산을 위한 그런 기준은 우리가 먹는 식품이나 약국에서 구입하는 의약품처럼 많은 공통적인 특성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점이 내포된 자본주의의 좋은 부분을 결코 내던지지 않는다. 이러한 좋은 부분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자칫 경기 불안정이 불거질 때에도 정부가 누군가 구입하기를 원하는 것을 사람들이 제공하기를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지켜봐야 한다. 재정과 통화정책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완전 고용을 유지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다.
이러한 경제의 숨은 원리는 사회경제의 원리와는 같지 않다. 정부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경제가 잘 작동되도록 오직 거시적인 조건만을 구축해 놓으면 된다.
이것도 정부의 역할이지 아닐까 싶다. 그 역할은 바로 ‘현명한 자유방임 상태’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최근의 경제이론에 의해 추앙받은 ‘모든 자본주의를 위한 자유’는 아니며, 대처 정부나 레이건 정권 시절부터 경제학자나 경제체계 기획자들로부터 ‘성가’처럼 받아들여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고삐가 풀린 자본주의의 실업률과 경제적 파국을 목격한 사람들과 정부는 결코 어떠한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매우 효과적인 절충안이다.
제한, 구속받지 않는 자본주의는 언제나 좋은 생산물을 산출할 수 있는 생각은 자본주의 사회 방식과 위기를 초래한 요인에 관한 그릇된 경제 이론이다. 이런 이론은 야성적 충동이 경제적 행동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경제적 변동기에도 신뢰, 이야기, 그리고 만병통치약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