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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st in Translation Apr 29. 2017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절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 준다

앤드류 솔로몬, TED2014

원문: Andrew Solomon: How the worst moments in our lives make us who we are


(과거에) 역경을 경험한 학생으로서 저는 몇 년 동안 크나큰 어려움이 닥쳤을 때 스스로 엄청난 힘을 발휘해 그것을 극복했던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런 불행에 직면하는 과정에서도 그들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았다는 일련의 훌륭한 조언도 들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저는 그런 "의미"가 나타난다고, 실로 위대한 진실이 곧 나를 반겨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저는 "진실"이라는 개념은 실로 무의미하다고 판단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의미를 거기서 "찾는다(find)"고 하지만, 실제로는 의미를 "만드는(forging)" 것이라고 부르는 게 더 합당하다는 생각입니다.


저의 최신 저서는 다양한 종류의 역경과 흔치 않은 질병을 갖고 태어난 자식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를 슬기롭게 대처하는 가족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 어머니를 저는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녀는 심각한 다중 장애를 가진 두 명의 자식들을 양육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은 저에게 짤막한 얘기를 언제나 해준답니다. '신은 당신이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아픔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 자식들은 원래 저에게 축복으로 여겨진 선물이 아니에요. 우리가 자식들을 기꺼이 선택했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의 선물인 셈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이런 선택들을 계속 내리곤 합니다. 제가 2학년이었을 때, 바비 핑클(Bobby Finkel)이 자신의 생일파티를 주최했고, 저희 반 모든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했어요. 저만 쏙 빼고요. 저의 어머니는 뭔가 착오가 생겼다고 판단한 나머지, 핑클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물어봤죠. 그분은 자신의 아들인 바비가 저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생일파티에 제가 오지 않는다고 대신 전해줬어요. 그날, 저의 어머니는 저를 근처 동물원에 데려다주었고, 그곳에서 저는 뜨거운 퍼지(설탕, 우유, 버터 등을 혼합해 만든 사탕)를 곁들인 선데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7학년이었을 때는 친구들 가운데 한 명이 저에게 "퍼시(Percy)"라는 별명을 붙여주면서 놀려대기 시작했죠. 저만의 특유한 행동과 말투 때문에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게 만든 것 같아요. 그를 비롯한 학교 아이들은 "퍼시"라는 이름을 계속 외쳤습니다. 학교 통학버스 안에서 등교할 때 걸리는 시간 45분, 하교할 때 걸리는 시간 내내 저를 "퍼시!", "퍼시!", "퍼시!"라고 조롱했습니다. 8학년이 돼서 과학수업을 받는 도중에 학교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동성애자들은 항문괄약근(anal sphincter)의 외상 때문에 대변 실금(fecal incontinence)에 걸린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학교 교내식당을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채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저의 언행 때문에 계속 비웃는 여학생들과 같이 앉아야만 했고, 여성 같은 말투 때문여 여학생들과 같이 어울려야 한다고 놀리는 남학생들과도 자주 마주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내와 회피를 적절하게 혼합하면서 저는 어린 시절로부터 살아남았습니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인내와 회피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의 문을 열어줬다는 점입니다. 의미를 만들고 나면, 그것을 체계화해서 하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과거에 겪었던 고난을 지금의 나로 설계하는 과정의 한 축으로, 삶에서 가장 최악의 순간을 현재의 성공담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아픔을 오늘날의 더 나은 자신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분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책을 쓰고자 인터뷰를 할 당시에 저는 10대 시절에 누군가로부터 강간을 당해 아이를 출산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한 명을 만나본 적이 있었습니다. 범죄의 피해를 입은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커리어 계획을 포기했고, 모든 감정적 교류 관계를 끊어버렸습니다. 제가 처음 만났을 때는 그녀의 나이가 50이었습니다. 저는 여쭈었습니다. "당신을 강간한 사람이 종종 머릿속에 떠오르세요?" 그러자 그분이 대답했습니다. "분노를 느끼면서 그를 종종 생각한 적은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그가 불쌍하다는 입장이네요."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불쌍하다고요?" 그분이 다시 대답했습니다. "예, 불쌍하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그는 한 명의 매우 아름다운 딸과 두 명의 예쁜 손주들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들의 존재 자체를 모르잖아요. 그런 면에서 저는 정말로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계속 투쟁해야 할 선천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젠더, 성적 지향, 인종, 장애 같은 것 말이죠. 또한 몇몇은 후천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정치범이 된다든가, 강간 피해자가 된다든가, 아니면 카트리나 태풍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이 된다든가 말이죠. 정체성은 한 공동체의 소속감을 대변해줍니다. 또한 공동체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오히려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이 아니라 "그리고"라고 말하는 것, 예를 들어서 "나는 여기에 있지만 암암을 앓고 있어요."라고 말하기보다는 "나는 암을 앓고 있어요. 그리고 이곳에도 왔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부끄럽다고 느끼면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말하지 못합니다. 그 이야기가 정체성 확립에 든든한 초석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의미를 만들고 정체성을 확립하세요(Forge meaning, build identity). 의미를 만들고 정체성을 확립하세요. 이 구절은 제가 명상을 할 시 되새기는 일종의 주문(mantra)이 되었습니다. 의미를 만드는 것은 당신을 변화시키는 행위이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곧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주문입니다. 사회적으로 낙인 찍힌 저와 같은 사람들은 날마다 질문 하나를 마주합니다. 사람들을 억제함으로써 사회 주류에 저 같은 사람들을 얼마나 편입시키려고 하는지, 그리고 법적으로 정당한 인생을 구현하고자 한계를 얼마나 뛰어넘으려고 하는지 궁금합니다. 의미를 찾고 정체성을 확립한다고 해서 그릇된 것을 올바르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그릇된 것을 보다 진귀하게 만들 뿐이죠.


올해 1월에 저는 미얀마로 가서 정치범들을 인터뷰했습니다.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초연한 그들의 언행에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죠. 현지 정치범들 대다수는 범법 행위를 하고 있다는 점을 일찍이 인지했고 나중에 감옥에 투옥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들은 감옥에 갇힐 때에 고개를 빳빳이 들었고, 몇 년 후에 출소할 때에도 역시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미얀마의 인권활동가이면서 몇 년 간 독방에 홀로 처박혀 거의 사망 직전까지 갔던 마 티다(Ma Thida) 박사는 저에게 오랜 시간 혼자 생각할 기회를 주고, 그러면서 지혜를 알게 되어, 스스로 명상 기술을 연마하게 만들어 준 교도소장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고 말했습니다. 의미를 추구한 마 티다는 자신이 겪은 처절한 고생을 아주 중요한 정체성으로 변환했습니다. 하지만 제 예상보다 이상으로 감옥에서 초연했던 그들은 버마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일련의 개혁 조치에 대해서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마 티다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 미얀마인들은 엄청난 역경을 겪는 과정에서도 위대한 우아함을 가지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행복한 나날들이 지속되고 있어도 불평을 굳이 숨기지 않습니다." 그녀는 계속 말했습니다. "아무리 변화와 전환이 수차례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사회 곳곳에 만연된 문제는 해결되지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그런 것들을 더욱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녀의 말은, 양보는 완전한 인권이 필요로 하는 곳에 그저 단편적인 혜택만 제공하는 것입니다. 부스러기를 먹었다고 해서 식탁 위에 정찬을 먹었다는 의미는 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의미를 만들고 정체성을 확립한 후에 미친 듯이 분노를 표출해야 합니다.


저는 결코 강간을 당한 적도, 미얀마의 그 감옥과 비슷한 곳에 가본 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동성애자 미국인으로서 저는 편견과, 심지어 증오를 당했지만, 지금까지 제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제가 겪었던 고통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역경을 꿋꿋하게 극복한 사람들로부터 학습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사춘기에 진입했을 때, 저는 이성애자가 되기 위해서 극단적인 방법까지 취했습니다. "성적 대리 요법(sexual surrogacy therapy)이라는 치료를 스스로 신청해 받아보았습니다. 이 치료법은 저보고 의사라고 부르라는 사람들이 저에게 소위 연습이라는 것을 처방해주는 것이 골자인데요, 처방전은 대리모에 가까운 여성들을 저에게 붙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창녀라고 보기 어려운 분들이었지만, 꼭 그렇게 다르다고 볼 수도 없었어요.


제가 제일 선호했던 여성은 미국 동남부 출신의 금발머리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저에게 자신이 시체 성애자(necrophiliac)이라고 솔직하게 밝히더군요. 시체 안치소에 들어갔다가 문제가 돼서 이 직업을 선택했다는 후일담을 전해주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쌓고 보니까 저도 여성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몇 번 정도 맺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감사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때도 저는 제 자신과 여전히 전쟁 중이었고, 제 마음에 심각한 상처를 가했습니다.


우리는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일부러 고통스러운 경험을 추구하지 않지만, 보통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낸 후에 정체성을 확립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을 우리는 견딜 수 없지만 뭔가 훗날의 여정에 이정표가 될 수 있는 고통에 대해서는 끝까지 견딥니다. 쉬운 것은 어려운 것보다 더욱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과거의 즐거움과 상관없이, 의미를 찾게 해주는 과거의 불행이 없었더라면 현재의 우리는 아마도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약함을 즐겁게 자랑하리라..."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한 말입니다. "내가 약할 때 비로소 강해지기 때문이다."


1988년에 저는 소비에트 정권 하에서 지하단체 소속으로 활동하던 예술가들을 만나고자 모스크바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반정부 성향의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만들 거라고 내다봤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예술 작품 속 급진주의는 인권을 말살시키는 사회에서 인권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 그 자체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현재 러시아 사회가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것 같아요. 그때 만난 예술가들 가운데 한 명이 저에게 "우리는 예술가가 아니라 천사가 되도록 훈련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네요.


1991년, 예전에 글로써 조명했던 그 예술가들을 다시 만나러 모스크바로 향했습니다. 당시 저는 소비에트 정권이 쿠데타로 전복되는 과정을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들은 정권을 없애려는 쿠데타에 대항하는 세력의 우두머리들이었습니다. 쿠데타가 벌어진 지 3일째, 한 명이 저와 함께 스몰렌스카야(Smolenskaya)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한 저희들은 바리케이드 하나를 골라 그 앞에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이윽고, 줄 지어선 탱크들이 어디선가 나타났습니다. 선두에서 앞을 향하던 탱크가 멈추더니 거기서 군인 한 명이 나와 저희를 향해 외쳤습니다. "우리는 이 바리케이드를 무조건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너희가 길을 비키면 우리는 총을 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진지에서 꼼짝하지 않는다면 앞을 향해 돌진할 수밖에 없다." 그러자 제 옆에 있었던 예술가 한 분이 대답했습니다. "잠깐 시간 좀 주세요. 왜 우리가 여기에 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을 주세요!" 군인은 팔짱을 꼈고, 예술가는 민주주의에 대한 제퍼슨식의 찬사(Jeffersonian panegyric)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제퍼슨식 민주주의를 채택한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도 막상 설명하라고 하면 우물쭈물거릴 수밖에 없는 그 위대한 연설을 그 예술가는 군인을 향해 설명했답니다. 예술가들의 연설이 계속되자 군인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연설이 끝나자 군인은 약 1분 정도 골똘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빗줄기에 젖었던 저희를 쳐다본 그 군인은 이렇게 말을 꺼냈습니다. "여러분들의 말이 맞다. 우리 군인들은 일반 시민들의 뜻에 따라야 한다. 너희가 우리 탱크를 되돌릴 수 있는 공간을 충분히 제공만 한다면 우리는 왔던 길을 돌아가겠다." 군인들은 진짜로 돌아갔습니다. 때로는 의미를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을 설명할 수 있는 어휘들을 제공합니다.


당시 러시아는 저에게 억제는 그것을 대항할 만한 힘을 길러준다는 레모네이드처럼 아주 달콤한 사실 하나를 가르쳐줬던 것입니다. 저는 점진적으로 이 명제를 저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기반으로써 이해했습니다. 정체성은 저를 슬픔에서 구해주었습니다. 동성애 권리 운동이 상정(posit)하는 세계에서 저의 반항은 하나의 승리리로 여겨집니다. 정체성 정치학은 크게 두 가지로 기능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특성을 타고난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는 동시에 사람들이 좀 더 친절하고 신사답게 다가올 수 있는 외부의 세계를 촉진시킵니다. 이 두 가지 경향은 각기 다릅니다. 그러나 각각의 경향이 진행될수록 다른 하나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정체성 정치학은 나르시시즘 성격을 띱니다. 사람들이 차이를 그저 자신만의 것으로 극찬합니다. 타인들과 공감을 자아내지 못한 채 다른 집단을 별개로 생각하면서 세계를 더욱 협소하게 바라봅니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학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현명하게 실행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범위를 확장시킵니다. 정체성은 우쭐거리는 상표나 금메달 같은 게 아니라, 혁명 그 자체입니다.


제가 이성애자였다면 저의 삶은 보다 편안해질 수 있었겠지만, 그것은 제가 아닐 겁니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제 자신이 더욱 좋기 때문이에요.  솔직히, 저는 선택의 여지도, 이성애자로서의 삶을 완벽하게 상상할 능력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하지만 용을 제거하면 영웅이 태어나지 않듯이, 사람들인 인생에서 영웅적인 요소를 찾기 마련입니다. 저는 천연색(technicolor)으로 무장한 동성애의 자부심이 만약 없었더라면 나 자신에 대한 증오를 과연 멈출 수 있었는지 스스로 종종 자문하곤 합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 강연도 자부심의 징후라 할 수 있겠죠.


강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동성애자일 때면 비로소 나 자신이 성숙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과거에 했었던 자기혐오는 일정 크기의 공허함을 남겼고, 이것을 축하로 넘쳐 흐르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제가 우울증으로 촉발된 마음의 빚을 지금 다 갚을지라도 바깥 세계는 동성애 혐오증(호모포비아)이 가득한 세상일 뿐입니다. 인식이 바뀌려면 최소 몇십 년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도 언젠가, 동성애자라는 것은 그저 단순한 인적사항의 하나로, 축하의 파티용 모자나 비난 같은 게 필요하지 않게 될 겁니다. 물론 지금은 아닙니다. 동성애 자부심이 그 자체의 의미를 퇴색시킨다고 주장하는 제 친구 한 명이 어느 날 저에게 "동성애 겸손 주간(Gay Humility Week)"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하더군요.


좋은 아이디어예요. 하지만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우리의 동성애 자부심 운동은 절망과 축하 중간지대에 위치한 중립이라는 것이 최종단계일 겁니다.


현재 미국의 29개 주에서는 제가 게이라는 이유로 합법적으로 해고당하거나 집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러시아에서는 반-선전(anti-propaganda) 법 때문에 거리에서 사람들이 폭력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의 27개국은 항문 섹스를 금지하는 법적 조항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동성애자를 돌로 쳐 죽일 수도 있습니다. 린치를 가하는 게 흔해졌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최근에 동성애자 두 명이 섹스를 하던 도중에 공권력에 붙잡혀 채찍으로 무려 7천대나 맞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평생 불구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의미를 만들고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을까요? 동성애자 인권은 결혼이 주가 아닙니다. 동성애가 허락되지 않는 세상에서 그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하는 전 세계의 수백 명은 존엄성조차 얻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저는 의미를 찾았고 정체성을 확립했기 때문에 꽤 운이 좋은 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엄청나게 드문 특권을 입었다고 생각합니다. 동성애자들은 반드시 부스러기 따위의 정의보다 더욱 나은 것을 전체적으로 받을 당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앞을 향한 발걸음은 매우 달콤합니다. 지난 2007년, 저와 제 파트너는 6년의 연애 끝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존(John)과 함께한 여정은 위대한 행복의 발견이자 끔찍한 불행의 배제였습니다. 그리고 종종 저는 모든 종류의 고통을 사라지게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인 나머지 기쁨을 잊어버렸습니다. 기쁨이 생기는 것보다는 부정적인 무엇이 약간은 줄어들었다는 것에 주목했던 것 같아요. 우리의 결혼은 사랑을 통해 부재가 아닌, 존재로 선언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결혼은 우리로 하여금 자식을 가지게 유도했습니다. 자식을 키운다는 것은 저희 부부와 아이들에게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저는 제 자식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그들이 슬플 때면 마음이 가장 아플 정도로 사랑을 줍니다. 게이 아빠로서 저는 아이들에게 삶에서 그릇된 지점도 바라보도록 가르치지만, 만약 제가 그들에게 다가오는 모든 아픔을 홀로 막는다면, 저는 실패한 부모일 겁니다. 한때 제가 알았던 불교학자가 저에게 말하길, 서양 사람들은 열반(nirvana)을 모든 근심을 뒤로한 채 행복만을 추구하는 상태로 착각한다네요. 그에 따르면 이것은 열반이 아닙니다. 지금의 행복이 늘 과거의 기쁨에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열반은 행복을 추구하는 동시에 과거의 슬픔처럼 보이는 것에서 기쁨의 씨앗을 찾는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결혼과 자식 양육을 쉽게 얻었다면, 지금 이 정도의 만족감을 가질 수 있었는지 자문합니다. 또한 제가 이성애자였거나, 혹은 지금보다 훨씬 젊었더라면 좀 더 쉽게 성취를 이룰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때도 만족감을 느꼈을 겁니다. 저의 이러한 복잡다단한 의문을 아마도 다른 주제에 적용시켰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의미를 만드는 것이 찾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면, 제가 반드시 답을 구해야 할 질문은, 어렸을 적에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기 때문에 지금 더욱 행복해졌는가가 아니라,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의미를 찾음으로써 지금 더욱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는가, 입니다. 저는 일상적인 기쁨에 숨겨진 황홀감을 찾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쁨이 제가 훗날 평범한 인물로 성장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과거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처럼 결혼과 가족을 꾸리는 데 행복감을 느끼는 수많은 이성애자 커플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성애자 결혼은 숨이 막힐 정도로 신선하고, 동성애자 부부의 가족은 아주 신날 정도로 새롭기 때문에  저는 그러한 놀라움에서 의미를 만듭니다.


작년 10월에 저는 50번째 생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가족은 저를 위해 파티를 열어줬죠. 한창인 도중에 아들이 저의 남편에게 짤막한 연설을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존은 "아들아, 너는 연설을 할 수가 없어. 4살밖에 안 되었잖아."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파티에서는 할아버지와 데이비드 삼촌과 나만 축하 연설을 할 거야." 하지만 아들인 조지(George)는 연설을 하고 싶다고 졸라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존은 조지에게 마이크를 주었습니다. 조지는 매우 큰 목소리로 "신사 숙녀 여러분, 잠깐 주목 좀 해주시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파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조지를 향해 몸을 돌렸습니다. 조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이 아빠 생일이라서 정말로 기뻐요. 우리 모두가 케이크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그리고 아빠, 아빠가 꼬마였다면 전 아빠의 친구가 되었을 거예요(If you were little, I'd be your friend)."

     

저는 심지어 바비 핑클에게도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힘든 시절이 오늘날의 저를 만들어주었고, 한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꾸고 싶어 했던 제 삶을 이제는 무조건적인 감사함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한 젊은 게이가 동성애 권익 운동가였던 하비 밀크(Harvey Milk)에게 동성애 증진 운동에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를 물어봤습니다. 하비 밀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 보세요." 우리 동성애자의 인권을 무단으로 탈취하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또한 탈취된 인권을 스스로 되찾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존재합니다. 우리가 보다 큰 목소리를 가진 채 살아간다면 증오를 완전히 격파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의 삶을 더욱 확장시킬 수 있을 겁니다.


의미를 만들고 정체성을 확립하십시오.

의미를 만들고 정체성을 확립하세요.

그리고 당신의 기쁨을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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