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st in Translation Jul 17. 2017

Betting on the Blind Side

마이클 루이스, 2010년 3월 31일, 배니티페어

원문: Betting on the Blind Side


마이클 버리(Michael Burry)는 언제나 세상을 다르게 보았다. 어렸을 적부터 한쪽 눈을 실명한 채로 다녔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2004년,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mortgage) 채권 시장에 엄청난 버블이 생겼다고 판단을 내렸을 때 그는 고작 32세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현상을 반대로 읽어냈고 그 누구도 자신의 행동과 투자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버리는 괴짜 같은 별난 묘책으로 시장이 무너질 때 골드만 삭스와 여타 다른 은행과 협상을 벌였고 결과적으로 천문학적 수익을 거두었다. 그만의 통찰력 가득한 강박관념이 빛을 발휘한 몇 가지 진짜 이유들이 있다.


2004년 초반, 헤지펀드 매니저와 주식시장 투자자로 활동했었던 마이클 베리는 32세 때 생애 처음으로 채권 시장에 진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찌감치 그는 미국에서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형식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웠다. 자신의 새로운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단지 그는 캘리포니아 주 산호세에 위치한 자신의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책과 신문 기사, 그리고 금융 관련 잡지를 탐독했을 뿐이었다. 여러 금융 분야에서 유독 그의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작동 방식이었다. 막대한 양의 개인별 대출 목록이 하나의 고층빌딩처럼 쌓여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층빌딩의 높은 층에 투자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돈을 상환받는 구조이기 때문에 무디스(Moody's)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로부터 가장 좋은 신용등급을 받고 매우 낮은 이자율을 적용받는다. 이와 반대로 최하위층에 투자한 사람들은 맨 마지막에 대출금 상환을 받는다. 이로 인해서 문제가 터질 경우 가장 빨리 손실을 입고 무디스나 스탠더드 앤 푸어스로부터 가장 낮은 등급을 받게 된다. 리스크가 매우 큰 하층에 투자한 사람들은 그만큼 위험 요소를 수반하기 때문에 높은 이자율을 적용받는다. 모기지 채권을 구입한 투자자들은 고층빌딩의 어느 층에 투자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주류의 양상과는 다르게 마이클 버리는 모기지 채권 구입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모기지 채권에 반하는 행동을 하든지 아니면 어떻게 공매도를 할지만을 생각했다.


모든 모기지 채권에는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단조롭고 지루한 투자 내용이 들어간 130쪽의 설명서가 존재한다. 만약 당신이 이것을 읽는다면 각 채권마다 기업과 조직의 내부 이력을 볼 수 있다. 2004년 말부터 2005년 초까지 버리는 수백 개의 투자설명서를 훑어봤고 실제로 채권 몇십 개의 설명서를 꼼꼼히 정독했다. 투자설명서를 쓴 변호사들을 제외한다면 그것을 제대로 읽어본 이는 아마 마이클 버리, 단 한 명이었을 것이다. 


10kWizard.com이라는 웹사이트에 연회비 100달러를 내면 모든 설명서를 육안으로 쉽게 읽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은 정확히 분류되어야 할 각각의 사항을 매우 모호하고 어렵게 분류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예를 들어보자. 사람들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전적으로 수행하는 채권을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 대신 'A.B.S.', 혹은 '자산유동화증권(asset backed securities)'라고 불렀다. 만약 당신이 지금 도이체 증권에 가서 자산유동화증권을 담보로 한 자산을 물어본다면 담당자는 아마도 두문자어(acronym)로 쓰인 몇 가지 상품 리스트를 건네줄 것이다. 'R.M.B.S'라든가, 'hels', 혹은 'helocs', 또는 'Alt-A' 따위의 것들이다. 이것은 당신이 그간 보지 못했던 신용 종류들이다. R.M.B.S는 주택담보대출 저당증권(residential mortgage-backed securities)이다. hel은 홈 이쿼티 론(home equity loan)이고 heloc은 홈 이쿼티 크레딧 라인(home equity line of credit)이다. Alt-A는 정말로 '쓰레기 같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론'이라 불렸는데, 상환능력을 문서화하기 어려운 일반 자영업자들이 많이 사용했다. 사용자 수가 많아지니까 대출회사들은 소득 증명을 하지 않은 채 무분별하게 이것을 뿌렸다. 금융업자들은 이런 종류의 수많은 론을 그저 '서브프라임 론'이라고 대충 불렀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채권 시장은 그리 명확하지 않았다. 


2004년 초반의 대출 관련 수치를 확인한다면 대출기준이 명백하게 낮아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이클 버리의 시각에서는 대출기준은 낮아지다 못해 아예 바닥을 친 셈이었다. 심지어 그 바닥의 이름이 있었는데, 원금은 필요 없고 오직 이자만 내는 네거티브 상환 변동금리 서브프라임 모기지(the intrest-only negative-amortizing adjustable-rate subprime mortgage)였다. 이것을 선택한 주택구입자들은 돈 한 푼도 내지 않는 옵션을 실행하기 때문에 나중에 늘어난 은행 이자로 인해서 원금이 증가하는 현상을 목도했다. 소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주로 이것을 구입했다. 마이클 버리는 대출을 받으려는 사람들뿐 아니라 왜 이렇게 대출의 범위를 넓게 산정한 것인지를 두고 대출업자들의 양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채무자가 아닌 대출업자들을 예의주시 해야죠. 돈을 빌리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일을 크게 벌리기를 원해요.  이때 돈을 빌려주는 사람들은 채무자들의 행동을 자제해야 합니다. 그러니 대출업자들의 상황 판단력이 떨어질 때 우리 모두가 조심해야 합니다."


2003년 버리는 채무자들이 자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고 2005년 초반에는 채권자들도 스스로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점 역시 깨달았다. 


헤지펀드 매니저들 대다수는 투자자들과 직접적으로 대화를 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분기별로 투자 관련 서한을 보내는 일은 형식적으로 처리했다. 이와 다르게 마이클 버리는 사람들과 일대일로 이야기 나누는 것을 어려워했고 중요한 내용과 투자 계획은 이메일로 전달했다. 버리가 보낸 분기별 보고서에는 자신이 현 상황을 판단하면서 '증서를 통한 신용확대'라고 덧붙였다. 이것은 일반적인 방법론으로써, 사람들이 대출금액을 갚지 못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대출업자들이 새로운 상품을 통해 대출 확대의 진정성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대출업자들이 자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나 다름없었어요. 그들은 대출 기준을 계속 낮추는 동시에 그 규모를 널리 확장시켰습니다"라고 버리는 말했다. 그는 대출업자들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골드만삭스나 모건스탠리, 웰스파고, 혹은 다른 은행에 대출을 판매했고, 그곳에서는 대출을 채권으로 다시 포장을 해서 재판매했기 때문이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최종 구매자는 '어리석은 개인투자자'였던 것이었다. 버리는 추후에 그들에 대해 공부를 하기도 했다.


버리는 전략적인 투자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의 다양한 트란쉐들(tranches), 혹은 여러 부분들에 있어 공통점 한 가지가 있었다. 이들 채권은 공매도가 어려웠다는 점이었다. 주식이나 채권을 공매도하고 싶다면 일단 그것을 빌려야 했다. 하지만 모기지 채권은 너무나도 세분화되어 있어서, 층이나 부분이 매우 작아 단번에 찾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채권을 구입하거나 구입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채권에 대항해 독자적으로 베팅을 걸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자리가 시장에는 전혀 없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어느 시점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 시장이 완전히 망할 것이라고 생각은 할 수 있지만 미리 방지할 어떠한 수단도 보이지 않았다. 주택도 공매도 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뭐, 물론 건설회사들, 이른바 풀스 홈스(Pulte Homes)나 톨 브라더스(Toll Brothers)의 주식을 공매도하는 건 가능했지만, 비용이 매우 많이 들고 위험하며 간접적이었다. 또한 주가가 장기간 오를 경우 버리의 재정상태는 극도로 나빠질 가능성도 컸다.


그전에 버리는 '신용부도스와프(credit-default swaps)'를 발견했다. 신용부도스와프는 스와프가 아니라서 혼란만 가중되었다. 이것은 분기별 프리미엄 지불과 기한부 조건으로 기업이 발행한 채권의 상환을 보장하는, 일종의 보험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매년 20만 달러를 지불 가능하다는 조건에서 GE(제네럴 일렉트로닉)의 1억 달러 보장 채권을 10년 만기로 하는 신용부도스와프를 구매할 수가 있다. 이때 스와프 구매자의 비용은 10년 곱하기 20만 달러이므로 200만 달러가 된다. 만일 GE가 앞으로 10년 이내에 부도 처리가 될 경우, 채권을 소유한 사람은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하지만 구매자들은 1억 달러를 상환받을 수 있다. 제로섬 게임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당신이 이 스와프를 통해 1억 달러를 벌었으면, 스와프를 판매한 사람들은 1억 달러의 손실을 입는다. 또한 이것은 비대칭적인 베팅이었다. 룰렛에서 한 숫자에 돈을 거는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룰렛을 할 때 테이블 위해 놓인 칩 대부분을 잃기 마련이다. 하지만 당신이 선택한 숫자가 나올 경우 판돈의 30배, 40배, 심지어 50배나 딸 수가 있다. 마이클 버리는 "신용부도스와프는 제약 없는 위험성의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이 스와프를 구입하면 제 비용은 어느 부분까지만 처리하고 수익은 그것의 몇 배나 올릴 수 있었습니다"라고 답했다.


버리는 이미 기업신용부도스와프 시장에 진입해 있었다. 2004년에 모기지 구입회사, 모기지 보험회사 등 부동산 시장의 침체로 인해 피해를 당할 회사들을 위한 보험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부동산 시장 불황은 관련 회사들이 손해를 보게끔 만들었지만 완전히 부도를 일으킬 만한 여력은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에 반대하는 베팅을 위한 더욱 직접적인 방법론을 만들고 싶었다. 2005년 3월 19일에 버리는 자신의 사무실에 남아 홀로 의자에 앉아서 문을 닫고 커튼까지 친 채 신용파생상품과 관련된 매우 난해한 책을 읽었다. 그러던 도중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것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의 상환을 보장하는 신용부도스와프였다.


미국 채권시장의 생성과 발전, 그리고 1990년대 중반에 J.P. 모건이 개발한 최초의 기업용 신용부도스와프를 설명한 책을 읽었을 때 마이클 버리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했다. 특히 은행들이 기업을 위한 신용부도스와프를 왜 그렇게 필요로 했는지를 알려주는 문단은 버리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GE가 혹여 상환불능에 의해  파산될 가능성을 일찌감히 없애버리는 최선의 방법은 처음부터 아예 대출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초기에 언급했듯이, 신용부도스와프는 헤지의 도구로 여겨졌다. 몇몇 은행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GE에게 대출을 해주었는데, 이는 매우 커다란 손이나  다름없는 다국적 대기업 GE의 요구를 거절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거절에 따른 후폭풍이 두려웠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어떤 은행은 GE에 대한 대출을 재고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위험 회피 수단으로 신용부도스와프가 대중에 등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매우 빠르게도, 새로운 파생상품들은 투기를 위한 도구로 변질되었고, GE의 파산 가능성에 많은 사람들이 베팅하기를 원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월스트리트도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같은 행위를 가할 거라고 버리는 갑자기 생각했다. 당시 부동산 시장의 상황과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업자들의 양태를 보았을 때 현명한 이들은 나중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의 파멸에 베팅을 할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채권 부도에 베팅하는 유일한 방법론은 바로 신용부도스와프를 구입하는 것이었다.


마이클 버리의 원대한 아이디어의 가장 큰 걸림돌인 타이밍 문제는 신용부도스와프를 구매하면 저절로 사라질 공산이 컸다. 2005년에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 만들어졌는데, 버리는 이것이 나중에 부실해질 것이라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하지만 이자율은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이 되었고 향후 2년 동안은 변동될 가능성도 많지 않기 때문에 대규모 대출 부실 사태가 나타나기까지 최소 2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거라고 내다봤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거의 언제나 변동금리를 채택했지만 사용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첫 2년 동안은 고정금리와 비슷한 '티저 금리'를 적용했다. 그래서 2005년부터 첫 2년 동안인 2007년까지는 6%의 고정금리였지만 2007년 이후, 즉 변동금리가 적용되면서부터 금리가 무려 11%에 육박해 연쇄 상환불능 사태로 이어지게 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계의 재깍거리는 소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너무나 커지자 마이클 버리와 다른 수많은 전문가들은 시계가 시한폭탄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의구심이 만연해지자 그 누구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을 구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버리는 테이블 위에 자신의 칩을 내려놓고 카지노가 제정신이 들어 이상한 규칙을 하루빨리 수정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30년 만기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에 대한 신용부도스와프는 이론상으로 30년간 지속되는 베팅이었다. 하지만 버리는 이 베팅이 고작 3년 만에 결과가 날 거라 판단했다.


유일한 문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에 신용부도스와프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버리는 월스트리트를 쑤시고 다니면서 신용부도스와프 상품을  출시해달라고 부추겼다. 그렇다면 어느 은행, 혹은 어떤 회사를 타깃으로 삼아야 할까? 버리의 예측이 딱 들어맞아 만약 부동산 시장이 망가진다면 건설업계의 중심지에 있던 기업들은 크나큰 금전적 손해를 입을 것이기에 적절하지가 않다. 보험의 효력이 입증될 순간에 과도한 빚으로 파산할 가능성이 높은 회사들로부터 스와프 상품을 구매할 수도 없다. 버리는 심지어 베어스턴스나 리먼브라더스에게 연락하지도 않았다. 이들 회사는 다른 회사들보다도 모기지 채권시장에 개입한 흔적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도이체방크, 뱅크오브아메리카, UBS, 메릴린치, 그리고 시티그룹은 부동산 시장의 파산에도 그나마  살아남을 거라고 버리는 생각 했다. 그래서 그는 이들 회사에게 연락을 했다. 이들 회사 가운데 다섯 곳은 버리의 이야기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머지 두 곳은 버리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지금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에 대한 신용부도스와프가 없지만 훗날에는 이것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알려줬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에 대한 신용부도스와프는 향후 3년 동안 1조 달러의 규모의 시장으로 발전해서, 오히려 월스트리트의 대규모 은행들이 수천억 달러의 손해를 입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버리가 2005년 초부터 수많은 투자은행들에게 끊임없이 얘기를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골드만 삭스와 도이체 방크만이 응답을 해주며 대화의 물꼬를 틀었을 뿐이었다. 월스트리트의 그 누구도, 마이클 버리가 아는 한, 그가 본 것을 전혀 보지 못했다.




마이클 버리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이유를 설명 듣기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두 살도 채 되기 전에 그는 매우 희귀한 암에 걸렸고 종양을 제거하면서 합병증으로 인해 왼쪽 눈을 잃었다. 한쪽 눈으로만 살게 된 어린 소년은 세상을 타인과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비유적 표현으로부터 사실적인 의미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소년에게 말을 할 때면 언제나 지긋이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라고 말을 했다. "한쪽 눈으로만 상대를 바라봐야 할 때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곤 했어요. 그러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때 관심 둘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죠. 제가 어떤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분의 이야기를 제대로 경청하지 않는다는 겁니다"라고 버리는 말했다. 그는 이야기를 나눌 시 상대방의 왼쪽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교류를 위한 목적으로 대화를 주고받을 때마다 상대방은 버리의 왼쪽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어떻게 하면 그것을 멈출 수 있을지 정말로 몰랐습니다. 제 왼쪽에 서기 위해서 사람들은 몸을 왼쪽으로 이동했었죠. 이제야 저는 고개를 들어서 사람들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른쪽 논만을 돌려서 콧잔등 너머로 왼쪽을 향해 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버리가 추측하기에, 자신의 왼쪽 유리 의안으로 인해 사람들과의 얼굴을 마주 보며 하는 일대일 대화가 언제나 좋지 않게 끝났다. 또한 사람들의 비언어적 표현을 읽어내기가 미칠 듯이 어려웠다. 상대방이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었는데도  말 그대로 받아들였다.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결과는 종종 매우 나쁜 양상으로 나타났다. "칭찬을 해도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한 그는 이어서 "칭찬도 잘못 전달되면 상대방의 심기를 거슬린다고 일찍 깨우쳤습니다. 덩치나 외양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저 의상에 대해 잘 차려입었다고 말하기만 하기 시작했어요." 유리 의안 때문에 버리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서툴렀다. 특히 유리 의안은 물기가 흐르고 자주 젖기 때문에 꾸준한 관리를 필요로 했다. 어렸을 적 친구들이 이런 사실을 놀림을 통해 매번 적시했기 때문에 그는 한 번이라도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점을 까먹지 않았다. 사실 버리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지만 친구들은 '사팔뜨기'라고 놀렸다. 친구들은 매 순간 그에게 유리 의안을 꺼내서 보여달라고 능청스럽게 요구했다. 버리가 바지 주머니에서 유리 의안을 꺼내 보여주면 아이들은 징그럽다고  말하면서 더욱 심하게 그를 배척했다.


버리는 자신의 유별난 성격이 유리 의안으로부터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별나게 공정성에 집착했다. NBA의 유명 선수들이 유명하지 않은 선수들보다 반칙(트래블링)을 지적당하는 횟수가 적다는 점을 깨달으면서 심판들에게 얘기하는 것 이상으로 항의를 했다. 아예 경기장에 발길을 끊었던 것이었다. 불공정한 행태가 스포츠를 향한 버리의 관심을 접게 만들었다. 그는 경쟁심이 강했고 덩치도 나름대로 큰 편이라  운동선수 유망주가 될 수 있었지만 팀 스포츠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눈 한쪽이 없었기 때문이다. 팀 스포츠 대부분은 공을 가지고 하는 것인데, 유리 의안을 사용하는 소년의 입장에서는 거리감과 주변 시야 문제 때문에 그다지 끌리지 않았을 것이다. 한때 버리는 미식축구를 하면서 공을 상대적으로 많이 다루지 않는 포지션을 맡았는데도 혹여 동료 및 다른 팀 선수와 세게 부딪힐 때면 유리 의안이 땅으로 떨어졌다. 버리는 팀 스포츠 대신 수영을 좋아했다. 사회적 교류도, 팀 동료들도, 불명확한 점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홀로 수영을 하고 승리, 아니면 패배를  맛보면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버리는 자신이 어린 시절 대부분을 홀로 보냈다는 놀라운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20대 후반이 돼서야 자신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없다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산호세의 산타 테레사 고등학교 때나 UCLA에서 학부를 다닐 때나, 밴더빌트 의대 대학원 시절까지 그는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가 진정한 유대관계를 맺을 때는 오직 글 쓰는 행위에서 시작되었는데 주로 이메일이 크나큰 역할을 담당했다. 버리의 진정한 친구 두 명은 20년 동안 관계를 지속했지만 그를 제대로 본 적은 딱 8번이었다. "제 본성은 친구 사귀기랑 거리가 멀어요. 머릿속에서 생각을 할 때가 제일 기쁘답니다"라고 말한 버리는 그간 두 번의 결혼 이력이 있다. 첫 번째 와이프는 한국인으로 부부가 서로 떨어져 살아야 했던 상황이었다. "전처는 실제의 인간관계보다는 개념적인 인간관계에 더욱 집중한다고 불평했어요." 두 번째 와이프이자 현재의 배우자인 여성은 베트남계 미국인이다. 둘은 온라인 결혼 중매 웹사이트에서 처음 만났다. 버리는 웹사이트에서 자신의 프로필을 등록하면서  '한쪽 눈이 없는 의학도이며 사회성이 약한 편이면서 학자금 대출이 14만 5천 달러나 남아 있다'라고 솔직히 적었다. 그의 이러한 솔직한 태도는 강박적인 공정성의 이웃사촌쯤이나 다름없었다.




강박성은 마이클 버리가 꼽은 자신만의 유별난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중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그는 어떤 주제가 있다면 완전히 그것에만 집중하든지, 아니면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지, 하나만을 선택했다. 이것은 확실한 단점을 지닌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나 관심사, 혹은 취향에 관심 있다는 척을 보여야 한다. 이와 반대로 꽤 괜찮은 장점도 있다. 버리는 학교에서 선생님이 옆에 있든, 없든 간에 매우 뛰어난 집중력과 관찰력을 발휘했다. 뭔가 하나에 꽂히면 학교생활은 자연스레 원활해졌다. UCLA에서 학부를 이수하면서 영문학과 경제학을 번갈아 공부했고 추가적으로 의예과 과정까지 완수를 해 결국은 대학 졸업 후 밴더빌트 의대 대학원으로부터 합격 통지서를 손에 넣었다. 버리는 자신의 뛰어난 집중력의 원인으로 타인들에 대한 관심의 절대적인 부족을 손꼽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 역시 왼쪽의 유리 의안으로 인해 촉발된 결과물이었다.


뛰어난 집중력으로 인해 마이클 버리는 의대생들 사이에서도 매우 똑똑한 인재라는 명성을 얻었다. 1998년 스탠퍼드 병원에서 신경학과 레지던트로 일한 버리는 14시간이나 되는 교대 근무를 하면서 자신의 선배들에게 병원 컴퓨터의 수행 속도를 높이고자 이틀 밤을 내리 새우면서 컴퓨터를 분해한 후 다시 조립했다고 말했다. 얘기를 들은 그의 선배들은 버리를 정신과 의사를 만나게 했고 결국 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고야 말았다. 정신과 의사의 진단을 버리는 오진이라고 판단했다. 한 평생 우울이라고 느껴 본 적 없는 사람이 어떻게 조울증 환자가 될 수 있는 걸까? 의학을 공부할 때는 그렇지 않지만, 회진을 돌면서 환자들에게 다가가고 관심을 많이 보이는 척을 할 때만 우울하다면, 역시 조울증 환자가 될 수 있는 걸까? 버리는 의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의학이 매우 쉬운 학문이었기에 종국에는 의사가 되었다. 의학 실습을 매우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치부한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해부학을 공부할 때를 회고했다. "사람들이 시체 다리를 어깨에 메고 싱크대에 가서 배설물을 닦을 때 진심 구토가 나 버렸어요. 완전히 질러버렸죠." 환자들에 대해서 그는 "물론 그들을 돕고 싶어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던 것 같네요."


마이클 버리는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컴퓨터 자체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주식시장의 내부 운용에 도움이 되는 수단이라는 특성에 의거해서 컴퓨터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주식시장은 평생 동안 집착의 대상이었다. 그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아버지는 신문의 맨 마지막 장에 인쇄된 주식시세표를 보여주면서 이것은 거짓이 만연되어 있는 곳이라서 투자 대상으로는 그리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버리는 주식시장이라는 새로운 곳에 단번에 사로잡혔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숫자에 논리를 가미하고자 노력했다. 취미로써 주식에 관련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주식 차트와 그래프, 홍보에만 열을 올리는 시장 옹호론자들의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점을 인식했다. "90년대 후반부터 제 자신을 '가치투자자'라고 정체성을 확립했어요. 다른 사람들 모두가 미친 짓을 하고 있었거든요"라고 그는 말했다. 대공황 때 금융시장에 적합한 방법론 가운데 하나로써 벤자민 그레이엄(Benjamin Graham)이 확립한 '가치투자'를 하려면 오래되거나 진가를 인정받지 못해 청산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서 거래되는 회사들을 계속 찾아 나서야만 했다. 가장 간단한 가치투자에는 공식이 있었지만 그 형태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종류로 변모해갔다. 그중에 하나는, 벤자민 그레이엄의 제자이면서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한 가치투자자인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의 운용방식이다.


버리는 투자라는 것이 하나의 공식으로 환원되지도 않고 누군가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워런 버핏에 대해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와 비슷하게 투자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점점 줄여나갔다. 기실 버핏으로부터 배운 교훈 한 가지는 '이례적인 성공을 일구기 위해서는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이례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위대한 투자자가 되고 싶다면 자신에게 적합한 스타일을 발견해야 합니다. 어느 지점서 저는 버핏은 그레이엄의 수업을 받는 혜택을 누렸지만 스승을 따라 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섰고, 결국 개인적인 규칙과 방식에 따라 자금을 운용했다고 알아차렸습니다. 또한 저는 그 어떤 학교도 위대한 투자자가 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구상에 그런 학교가 있다면 수업료는 엄청 비싸겠죠. 현재 그런 곳을 찾을 수가 없으니까 제 생각이 옳은 것 아닐까요."


투자는 당신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직접 체험하고 배워야 하는 것이었다. 베리에게는 투자를 할 수 있게 하는 종잣돈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의과대학원 졸업 때까지 투자에 강박관념을 보인 그이지만 현실에서는 월스트리트의 기업에 취직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금융 관련 수업이나 회계 강좌 따위를 단 한 번도 듣지 않았다. 스탠퍼드 병원에 취업했을 때  당시 그의 전 재산은 학자금 대출 14만 5천 달러와 현금 4만 달러가 다였다. 4년 동안 그는 다른 의대생처럼 학교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금융전문가로 생각했다. 1999년 어느 일요일 아침에 그는 온라인 친구에게 '시간은 변수가 다양한 연속체'라는 제목의 장문의 글을 이메일로 보냈다. 


"오후 한나절은 순식간에 흘러가버릴 수도 있거나, 5시간 더 늘어날 수도 있다고 봐. 물론 너도 그렇겠지만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킬링 타임용으로 때우는 시간을 더욱 생산적으로 이용하려고 해. 솔직히  말하자면, 생산성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나의 첫 결혼생활을 파탄 냈고, 며칠 전에는 약혼자까지 잃을 뻔했다니까.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나는 군인들은 '일반 사람들이 하루 종일 하는 일보다 더 많은 일을 저녁 9시 전까지 완수한다'라고 생각하는 식이었지. 하지만 나는 군대에서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보다 더욱 많은 일을 한다고 봐. 너도 알겠지만 다른 모든 일들을 대신할 만한 어떤 것에 대한 열정을 찾은 사람들, 즉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존재하거든."


1996년 11월의 어느 늦은 밤, 테네시 주 내쉬빌에 있는 성 도마 병원에서 심장의 교대근무를 하던 마이클 버리는 병원 컴퓨터로 techstocks.com을 접속해서 한 게시판에 '가치투자'라는 글을 올렸다. 투자와 관련해서 모든 글을 읽어본 그는 '실생활에서 제대로 투자'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인터넷 주식 열풍이 시장을 뒤흔든 시절이었기 때문에 1996년의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이 들락거리는 웹사이트는 매우 냉철한 이성을 지녀야 하는 가치투자자들이 접속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지금도 모든 글에는 리플이 달리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버리의 글에는 의사가 금융투자에 대해 아는 척을 한다는 악플이 심상찮게 달렸다. 하지만 차츰 베리가 게시판의 글을 주도해나갔다. 항상 아이디를 'Dr. 마이크 버리'라고 설정한 그는 리플을 단 네티즌들이 자신의 의견을 따라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리플을 단 사람들로부터의 토론에서 배울만한 점을 이제 더 이상 찾지 못하자 마이클 버리는 자신만의 블로그를 만들었다. 이것은 그때만 하더라도 조금 유별난 커뮤니케이션 형태였다. 병원에서는 16시간 교대근무를 했었고 홈페이지 관리와 글쓰기는 주로 자정에서 새벽 3시까지 했다. 자신의 블로그에 주식시장 거래와 주식거래에 대한 단상을 게시판에 계속 올렸다. 그러자 온라인에서 버리를 발견한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필라델피아에서 가치펀드를 하고 있는 한 신탁 매니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첫 번째로  궁금해했던 점은, 글쓴이는 과연 언제 시간이 나서 글을 올리는 것일까, 였습니다. 분명히 자신을 의과대학 인턴이라고 소개했거든요. 온라인에서만 주로 그를 봐왔기 때문에 그가 의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할 때만 봤던 셈이죠.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식거래 현황을 공개했고요. 사람들은 그를 따라 했어요. IT 버블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 그는 가치주를 구입하더군요. 우리도 그와 똑같이 했지만 돈과 고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50% 수익 달성이라는 매우 충격적인 결과를 버리는 발표 했습니다. 기묘했습니다. 그 사람 자체가 매우 기묘했어요. 그리고 우리만 이 상황을 예의 주시하지 않았죠."


마이클 버리는 자신의 투자방식을 따라 하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웹사이트에서 사람들이 오는지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무작위로 블로그를 접속한 어스링크와 AOL 독자들이 글을 읽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고 나서 무작위로 검색해 찾아온 사람들의 수는 적어졌다. 피델리티(Fidelity) 같은 무추얼 펀드 회사나 모건스탠리 등 대규모 월스트리트 투자은행 관계자들이 속속 블로그를 접속했다. 어느 날, 마이클 버리가 뱅가드(Vanguard)의 인덱스 펀드를 강하게 비난하자 즉각적으로 그 회사의 변호사로부터 엄중 경고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이름 있는 투자자들도 자신의 웹사이트를 보고 투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를 몰랐다. "시장이 버리를 발견했어요"이라면서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패턴을 마이클은 홀로 볼 수가 있었습니다"라고 필라델피아의 한 뮤추얼 펀드매니저가 얘기했다.


1998년 스탠퍼드 병원으로 직장을 옮겨 신경학과 레지던트로 일하면서도 마이클 버리는 자신만의 시간인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를 계속 고수하면서 투자에 대한 글을 자주 올렸다. 그는 가치투자 세계에서 약소하지만 의미 있는 인물로 발돋움했다. 당시 인터넷 주식 열풍은 완전한 통제를 벗어난 광기나 다를 바 없었다. 너무나 위력이 센 나머지 이상하게도 스탠퍼드 병원까지 그 영향력이 미쳤다. 


"특히 레지던트들과 병원 교수진 일부가 IT 버블에 미쳐 있었어요. 몇몇 사람들은 가능한 주식을 모두 다 사들였고요 모든 것에 대해 토론을 했습니다. 폴리콤, 코렐, 레이저피쉬, 펫츠닷컴, TibCo, 마이크로소프트, 델 컴퓨터, 인텔 등은 제가 특별히 기억합니다. 하지만 당신지금농답합니까.com의 웹사이트가 제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기 때문에 저는 그저 침묵만을 지켰습니다. 제가 부업으로 무엇을 하는지 동료 레지던트나 의대 교수님들께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100%, 혹은 110%를 다해서 의학에 열정을 퍼붓지 아니한다면 저에게 무슨 문제가 생길 거라고 봤거든요."


성의를 다해 의학에 몰두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는 그들이 의학에 그다지 뜻이 없다고 판단 내린다. 버리는 의학계에 깊이 발을 들여놓을수록 인간관계 문제에 부딪혀 불편함을 호소했다. 다행스럽게도 얼마 동안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병리학과로 자리를 옮겼지만 그 효과도 금세 기운을 다하고 말았다. 그는 이에 대해서 "죽은 사람들, 시체 일부를 보았고 더 많은 죽은 사람들과 시체 일부를 보게 되었죠. 이것 말고 저는 지적인 일을 좀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시 산호세로 돌아간 버리는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고 재혼에 성공했으며  또다시 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자신의 블로그를 폐쇄한 그는 펀드매니저기 되기 위해서 병원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병원의 신경외과장은 버리가 이성을 잃었다고 판단, 그에게 약 1년 정도 어디 가서 푹 쉬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매혹적으로 다가왔고요, 나에게 맞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포트폴리오를 잘 짜면 인생의 성공을 거둘 거라고 내다봤어요. 그리고 저는 남들의 시선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고요. 제 자신을 그저 매우 좋은 사람이라고 묘사했었습니다"라고 말한 버리는 학자금 대출 14만 5천 달러에 현금을 4만 달러만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어떤 포트폴리오를 구성할지  어려워했다. 그러던 차에 버리의 아버지가 사망했다. 주치의가 X-Ray로 암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다. 병원 측과 협의한 결과 버리 가족은 소정의 합의금을 받아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주식시장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사망으로 인해 생긴 돈은 아들로 하여금 주식시장에 뛰어드는 밑천으로 작용했다. 그의 어머니는 합의금 가운데 2만 달러를 손수 지원했다. 버리의 세 형제들도 각각 1만 달러를 지원했다. 이 돈으로 그는 사이언 캐피털(Scion Capital)을 창업했다. '사이언'이라는 이름은 그가 어렸을 때 매우 좋아했던 소설 '샤나라의 후손들(The Scions of Shnnara)'에서 딴 것이다. 그리고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 혈연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을 제외하면서 매우 거창한 규칙 하나를 내세웠다. '우리의 투자자들은 최소 순자산이 1천5백만 달러 이상이어야 한다.' 이것은 자신은 물론이고 그가 알고 지낸 사람들을 제외한다는 매우 흥미로운 조건이었다.


사무실 공간을 찾고, 가구를 구입하고, 주식거래계좌를 개설하느라 바쁜 시간을 쪼개고 있을 무렵 버리는 두 통의 전화를 받는다. 첫 번째는 뉴욕에 위치한 대형 펀드회사인 고담 캐피털이었다. 가치투자 전문가인 조엘 그린블랫(Joel Greenblatt)이 이 회사를 이끌고 있었다. 버리는 그의 책인 [당신도 주택시장의 천재가 될 수 있다]를 읽은 바 있었다. 그린블랫의 사람들은 버리의 아이디어를 수용하면서 약간의 돈을 벌었다는 사실을 전해주었다.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고 덧붙여 말했다. 버리는 "그린블랫이 직접 전화를 주면서 저를 뉴욕에서 보기를 학수고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회사는 버리와 그의 아내에게 1등석 비행기 티켓을 주었다. 그로 인해 버리 부부는 처음으로 뉴욕행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그들은 인터콘티넨탈 호텔의 스위트 룸에서 잘 수 있는 특권도 얻었다. 


그린블랫을 만나러 가는 길에 버리는 사람들과의 일대일 만남을 앞두고 있을 때면 언제나 찾아오는 뭔지 모를 불안감 때문에 힘들어했다. 고담 캐피털의 사람들이 자신이 쓴 글을 그래도 읽은 것 같아 약간의 편안하고 안정되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당신이 제 글을 읽고 저랑 만난다면, 우리의 만남은 우호적으로 진행될 여지가 높아요. 이와 반대로 제 글을 읽지 않고 저를 만난다면, 만남의 끝이 그렇게 좋지는 않아요.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도 똑같았습니다. 선생님들과도 비슷한 양상이었죠." 버리는 걸어 다니는 인간 감별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눈을 마주치기 전에 마이클 버리라는 사람을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해야 했다. 이러한 경우에 버리는 유명 펀드매니저들이 처음 보는 사람의 겉모습을 어떻게 판단 내리는 지를 잘 몰랐다. 그의 온라인 친구 가운데 자칭 펀드매니저라고 소개한 사람이 그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그 펀드매니저는 "버리가 그린블랫과의 미팅을 앞두고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어떤 옷을 입어야 되는지를 물어보더군요. 그는 넥타이를 맨 적이 없었어요. 장례식에 참석할 때마다 입는 파란색의 스포츠 재킷이 그의 유일한 정장이었습니다." 버리의 기묘한 특색은 바로 옷차림이다. 그가 쓴 글을 보면 작성자가 이성적이고 형식적인 사람이라고 쉽게 판단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는 여름 해변가에서 입을 만한 옷만 고집했다. 여하튼 불안감에 허우적거린 그는 고담 캐피털로 가는 길가에서 잠시 'Tie Rack'에 들러 넥타이 하나를 마지못해 구입했다. 자신의 일생에서 처음으로 정장을 차려 입고 뉴욕의 대형 자금관리회사에 도착했던 그는 거기서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다니며 회사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이때 오고 간 대화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당신에게 100만 달러를 투자하고 싶습니다." 

"뭐라고요?" 

"당신네 헤지펀드의 자산규모 약 1/4 정도를 구입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으세요?" 

"예. 우리는 100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세후 100만 달러!"


어쨌든 버리는 언젠가 자신이 세후 100만 달러의 가치를 지닌 인물로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고담 캐피털이 후에 무엇을 요구할지 자세히 고민하기도 앞서 불쑥 마지막 얘기를 했던 것이었다. 고담 캐피털은 실제로 그 돈을 버리에게 주었다! 바로 그 순간, 버리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게시물 덕분에 순부채 10만 5천 달러에 허리가 휘던 젊은 의대 대학원생에서 엄청난 투자금을 받은 백만장자로 바뀌었다. 조엘 그린블랫이 이런 방식으로 투자금을 건네주던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버리는 이 사실을 몰랐다. 그린블랫은 이에 대해 "버리는 분명하게도 매우 영리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다지 많지가 않죠."


이런 이상야릇한 만남이 있은 직후 버리는 보험 지주회사인 화이트 마운틴(White Mountain)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화이트 마운틴의 수장은 잭 번(Jack Byrne)으로 워런 버핏의 측근이었다. 이 회사는 고담 캐피털과 이야기를 나눈 바 있었다. "당신이 회사의 일부를 판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버리는 자신도 며칠 전 어떤 사람이 세후 100만 달러를 제시하기 전까지는 매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고 답을 했다. 전후 사정을 따져 보니 화이트 마운틴도 마이클 버리라는 인물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 회사에서 근무를 한 킵 오버팅은 "무엇보다도 버리가 신경과 레지던트라는 점이 매우 끌렸습니다. 그는 도대체 시간이 언제 나서 저런 일을 해왔던 것일까요?"라고 말했다. 버리는 자기 펀드의 극소수를 화이트 마운틴에 매각했고 60만 달러를 얻었다. 이와 더불어 1천만 달러 규모의 투자 약속까지 받았다. 오버팅은 "맞아요. 인터넷에서 찾아 전화통화로 얘기한 다음 우리 회사의 돈을 받아 간 사람은 버리가 유일했어요."





하지만 마이클 버리는 자신의 사업 첫 해에 고질적인 대인관계 문제 때문에 회사 운영을 하는 데 있어 어려움에 직면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과 만나지 못한다면 돈을 모으기가 힘들죠. 그런데 저는 사람 만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잖아요. 저와 관계를 튼 사람들은 저의 특성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라고 버리가 말했다. 실제로 그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중요한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는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워런 버핏 역시 젊었을 때는 사람들과 말을 하는 걸 어려워했다. 버핏은 네트워킹과 인간관계에 능숙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그는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 강좌를 들으면서 동료 및 직원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마이클 버리는 워런 버핏과는 완전히 다른 문화에서 성장했다. 인터넷이 데일 카네기의 강좌를 대체한 것이다. 버리는 이런 강좌를 들을 필요도 없었고 투자자나 동료들을 직접 만나야 하는 의무감도 더 이상 느끼지 않았다. 온라인에서 자신을 잘 소개하고 투자자나 기관을 기다리면 되었다. 정교한 온라인에 올린 다음,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돈을 보내줄 때까지 조용히 지내면 되었다. 버리는 "워런 버핏은 유명인이나 다름없었죠. 그렇지만 저는 그분처럼 친절한 할아버지 타입이 될 수가 없었네요."라고 말했다.


마이클 버리에게 이런 자금 유치 방법은 매우 적합했다. 더욱 중요한 건, 사람들에게 제대로 먹혔다는 점이다. 어머니와 형제들로부터 받은 돈과 자기 수중에 있었던 자금을 합쳐 그는 10만 달러로 사이온 캐피털을 창립했다. 사업 첫 해인 2001년에는 S&P500 지수가 11.88%나 하락했지만 사이언 캐피털의 주가는 55%나 상승했다. 그다음 해인 2002년에는 S&P500 지수가 22.1%가 떨어졌지만 사이언 캐피털의 주가는 16%나 올랐다. 2003년에는 주식시장이 마침내 반등을 보이며 28.69%라는 상승 수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버리는 다시 한번 이겼다. 그의 회사의 투자 가치가 무려 50%나 증가했기 때문이다. 2004년 하반기에 최대 6억 달러 규모의 자금을 관리한 그는 더 이상의 돈을 외부로부터 받지 않았다. "버리가 당시 운용했던 자금의 범위를 최대한도로 늘렸다면 아마 수십억 달러에 육박했을 겁니다. 그는 자신의 회사를 사업이 아닌 투자 전용으로 만들려고 했었습니다"라면서 그의 실적을 주시할수록 결과를 점점 더 믿기 힘들었던 뉴욕 소재의 한 헤지펀드의 매니저가 말했다.


이런 몇 가지 이유로, 버리는 전형적인 헤지펀드의 투자 방식을 거절했다. 대부분의 헤지펀드 매니저들이 운용자금의 2%를 수수료로 받는 방식은 자금을 축적해준 대가에 불과했다. 이와 반대로 버리의 사이언 캐피털은 일반적으로 1% 이하의 실제 운용 비용만을 수수료로 가져갔다. 쉽게 말해서, 그가 단돈 1달러라도 수익을 더 올리기 위해서는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더 많이 제공받아야만 했다. "사이언 캐피털이 생겼을 때를 생각해 보자고요"라고 버리의 회사 초청기 시절에 투자를 했던 사람이 말했다. "당시 여러 헤지펀드가 당연시했던 수수료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습니다"라고 놀라워했다.


2005년 중반에 증권거래소 지수가 6.84%나 떨어졌을 때 버리의 펀드는 242%라는 대단히 고무적인 상승률을 기록했고 투자자들에게 수익을 돌려주었다. 그의 펀드에 기웃거리는 투자자들은 점차 많아졌다. 그들은 사이언 캐피털이 주식시장의 상승이나 하락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버리는 투자할 만한 회사를 날카롭고 현명하게 간파했다. 또한 버리는 레버리지나 공매도를 피했다. 전도유망한 주식을 추천하기보다는 보통주를 사면서 기다렸다. 매우 복잡한 계산을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재정보고서만을 읽었다. 그는 매년 약 100달러를 내고 '10-K Wizard'에 회원가입을 했는데, 사무실에 있는 자신만의 방의 문을 닫고 커튼을 친 다음 10-K Wizard의 공개 정보와 자료를 검토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했다. 이런 그가 사이언 캐피털의 투자방식 대부분을 결정했고 혁명 가까운 수익률을 거둔 것이었다. 법원 판결, 완료된 거래서, 그리고 정부의 규제 변화 등등 회사의 가치에 변화를 줄 만한 모든 요소들을 검토했다. 


버리는 왕왕 이른바 '이런~~' 투자대상을 찾아냈다. 2001년 10월에 그는 투자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 개념을 설명했다. "이런~~ 투자는 말이죠, 제가 무엇을 발견했을 때 '이런~~'이라며 감탄사를 말할 수 있는 주식들을 특별히 분석하는 것입니다."


당시 한 법원이 아반티(Avanti)라는 소프트웨어 업체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아반티는 경쟁업체로부터 소프트웨어 코드를 훔쳤다는 죄목으로 기소당했다. 은행에 현금 1억 달러를 예치해두고 연간 1억 달러의 잉여현금흐름을 창조하는 회사였지만 시장에서의 가치는 고작 2억 5천만 달러에 불과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버리는 곧바로 조사에 착수했다. 조사가 완료된 시점에서 버리는 지구상 그 누구보다도 아반티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으로 우뚝 섰다. 그는 만일 아바티의 임원진들이 구속되고 회사에 벌금형이 떨어져도(실제로 구속되고 벌금형을 받았다), 이 회사는 시장 가격보다 훨씬 가치가 높다는 점을 알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반티 주식으로 돈을 벌려면 단기 손실을 감내해야 했다. 부정적인 소식에 겁을 먹어 보유했던 주식을 대거 매도하려는 투자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이클 베리만의 전형적인 거래 방식이었습니다"라고 한 투자자가 얘기했다. "시작하고 나서는 주가가 아마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가 후에는 10배 이상 뛰었어요"라고 덧붙여 말했다. 이것은 매우 분명하게도 일반 투자자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방법론은 아니었다. 하지만 버리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치투자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주요 임무는 대세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때 시장의 주류적인 단기 움직임에 경도되었다면 그렇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버리는 여타 다른 헤지펀드와는 다르게 사이언 캐피털의 원칙으로써 투자자들에게 즉각적으로 자금을 다시 회수할 권리를 금지했다. 이곳에 투자한 투자자들은 최소 1년 동안 자신의 돈을 회수할 수가 없었다. 


투자를 잘 하면 위험을 다룬 대가를 받기 마련이다. 버리는 꾸준한 수익률을 기록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공명정대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IT 버블이 결국 터졌지만, 그 시발점인 산호세의 주택 가격은 여전히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는 주택 건설업체들의 주식과 PMI처럼 주택 모기지를 보장해주는 기업들의 주식을 따져봤다. 2003년 5월에 버리는 미국 동부 해안에 거주했던 한 친구에게 너무나 쉬운 대출을 용인한 모기지 대출업자들의 비이성적인 행태로 인해 부동산 버블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점을 글로 써서 보냈다.


"무한대에 거의 가깝거나, 이례적인 대출로도 시장이 더 이상 상승하지 않는 때를 주시해야 해. 시장이 약세로 돌아설 것 같은데. 나는 극도로 비관주의자이잖아. 미국의 주거용 부동산 가격이 절반 가까이 폭락하지 않을까 싶어. 사람들이 가격 상승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면 현재 가격의 주택에 대한 수요도 그만큼 사라져 버리겠지. 이에 따를 부수적인 피해 역시 현재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클 거야."




2005년 5월 19일, 마이클 버리는 처음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의 폭락에 베팅했다. 그는 도이체방크에서 1천만 달러짜리 서로 다른 채권 6개를 보장해주는 6천만 달러 규모의 신용부도스와프를 매입했다. 이것을 '리퍼런스 증권'이라고 불렀다. 이걸 구입한 당신이라면, 전체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시장에 대한 보험이 아닌 특정 채권에 대한 보험이라고 알 수 있었을까? 여하튼 버리는 베팅하기 위한 올바른 대상을 찾아내고자 노력했다. 그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랐는데, 대출 당시에 꼭 했었어야 할 과거 은행의 신용분석 방식으로 주택대출의 신용을 분석한 유일한 투자자였다. 이것은 옛날 시대의 은행가들의 목적과는 구별되었다. 그는 최상의 대출이 아닌 최악의 대출을 찾아 나섰다. 만일 찾는다면 그는 곧바로 채권 부도에 대해 베팅을 하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버리는 2005년경의 미국 주택대출이 부실해질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주택담보인정비율과 2차 대출, 주택 위치, 대출서류 부재, 그리고 채무자의 소득증명, 그 밖의 수십 가지의 요소들의 상대적인 중요도를 만들어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정말로 쓰레기 같은 최악의 대출 사례 또한 찾아 나섰다.


마이크 버리가 이렇게 홀로 혈혈단신 채권을 헤집고 다니고 있으면서도 도이체방크가 그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점은 매우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때는, 버리가 추측하기를,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들을 다 똑같이 다루었기 때문이다. 보험가액은 도이체방크의 독자적인 계산방식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스탠더드 앤 푸어스에서 결정한 채권 가격이 중요한 영향을 줬을 뿐이다. 


위험요소가 없는 트리플 A 등급의 트란쉐를 구입하고 싶다면 20 베이시스 포인트(0.2%)를 내야 한다. 이것보다 약간 위험 요소가 있다고 판단되는 A 등급의 트란쉐는 50 베이시스 포인트(0.50%)를 내고 구매한다. 트리플 A나 A  등급보다 훨씬 위험이 많을 것 같은 B 등급의 트란쉐를 만약 구매할 시 200 베이시 포인트(2%)를 지불해야 한다. (베이시스 포인트는 1/100 퍼센트를 의미한다) 당시 버리가 찾고 있었던 것은 기초 모기지 풀이 약 7% 정도 떨어져도 가치가 0이 되는 트리플 B 등급의 트란쉐였다. (트란쉐는 프랑스어 'tranche'로써 '조각', '부분'을 의미하며 기채 조건이 각기 다른 두 개 이상의 채권을 동시 발행할 경우 각각의 채권을 뜻 한다.) 



마이클 버리는 트리플 B 등급에 돈을 거는 것이 매우 신중한 행동과 전략이라고 판단했다. 분석을 통해 훨씬 더 높은 성공률을 자신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투자설명서를 대충 훑어보면 같은 트리플 B 등급 채권이라도 그 내용은 서로 다르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각 채권의 기초 모기지 풀에 들어간 이자만 내는 비율이 또한 달랐다. 그는 이러한 요소를 깨닫고 최악의 대출 사례만을 모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특정 모기지 채권들에 대해서 박식하다는 점을 투자은행들이 몰래 알아차리고 보험가액을 조정할까봐 노심초사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자 다시 또 한 번 마이클 버리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골드만 삭스가 이메일을 통해 낮은 등급의 모기지 채권들을 리스트업 해서 그에게 보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더불어 그런 채권들을 '마음껏 골라보라고'까지 얘기까지 해줬다. "매우 충격이었죠. 3대 대형 등급평가기관 중 하나가 최저등급만을 받은 모기지 채권들만 모아서 저에게 보내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거든요."라고 버리는 말했다. 자신이 이것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점을 외부에 알리지 않은 채 그는 아주 조용하게 목록에서 관심 있는 채권들을 슬그머니 빼냈다. 계곡에 위치한 가정집의 홍수 대비 보험을 산꼭대기에 위치한 가정집의 홍수 대비 보험과 맞먹는 가격에 구매하는 기분이었다.


시장이 비이성적으로 변했지만 월스트리트의 다른 몇몇 회사들은 기어코 거기에 뛰어들었다. 물론 이런 현상에는 마이클 버리가 어느 정도 유도한 감이 없지는 않다. 그는 몇 주 동안 뱅크 오브 아메리카를 꼬드겨 5천5백만 달러 규모의 신용부도스와프를 팔도록 만들었다. 이 회사는 거래확정 이메일을 그에게 보내고 나서 채 20분도 되지 않아 또 다른 이메일을 보내며 "또 거래를 할 수 있을까요?"라고 타진할 정도였다. 그로부터 몇 주 만에 버리는 500만 달러의 금액으로 은행 5~6곳으로부터 수억 달러의 신용부도스와프를 사들였다. 은행의 판매자들은 자신의 수중에 얼마나 많은 채권들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버리는 100퍼센트 변동금리 네거티브 상환 모기지로 구성된 모기지 풀을 찾아냈다. 돈을 빌린 사람들이 이자를 한 푼도 지불하지 않고 부채만 점점 더 늘어나는 옵션을 선택했다가 나중에 '불이행'을  선고받을 수밖에 없는 모기지였다. 골드만 삭스는 이런 모기지 풀에 대한 보험을 버리에게 판매했고 월스트리트 안과 밖을 통틀어 이와 같은 특정 상품을 구입한 첫 고객이라는 점을 축하한다는 기념 카드까지 동봉해서 편지를 보냈다. 버리는 이때 한 친구에게 "내가 전문가들을 교육시키고 있다."라고 으스댔다.


마이클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기로 소문난 투자은행의 직원들인데,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운 싼값에 보험을 판매하려는 이유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불안감에 떨지는 않았다. 이것보다는 자신의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혹여 눈치채서 기회가 사라질까 봐 걱정했다. "멍청한 척을 했었죠. 제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헷갈려서 얘기했거든요. 은행가들이 특정 사실을 알려주면 저는 '그걸 어떻게 다시 하시죠?', '우와, 그런 정보를 어디서 얻으셨어요?', '진짜입니까?'라고 리액션을 주었습니다."라고 버리가 말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고립된 삶을 선택했고, 언제나 변두리에서만 지냈기 때문에 자신이 옳고 다른 사람들 모두가 틀렸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믿을 수 있었다.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들이 새로운 비즈니스에 뛰어들수록 버리는 베팅하기가 좀 더 수월해졌다. 초반 몇 달 동안은 한 번에 많아봤자 1천만 달러를 공매도할 수가 있었다. 그러던 2005년 6월, 골드만 삭스의 한 직원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거래규모를 1억 달러로 확대하는 안을 타진했다. 버리는 이 제안을 전적으로 수용했다. 다음 날에 그는 이런 메일을 사람들에게 보냈다. "지금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거래규모인 1억 달러입니다. 이건 엄청난 액수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홉 자릿수의 단위가 아니라 세 자릿수 돈밖에 안 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6월  말쯤, 버리는 7억 5천만 달러 규모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에 대한 신용부도스와프를 소유했다. 이 사실이 자랑스러웠는지 그는 넌지시 지인에게 '척'을 했다. "포트폴리오 내용을 기준으로 한다면 전 세계의 그 어떤 헤지펀드도 이런 투자를, 이런 규모를 운용하지 못합니다."라고 버리는 자신의 투자자에게 말했다. 바야흐로 마이클 버리는 자신의 거래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부도가 될 거라 예상한 채권들의 보험을 저렇게 많이 내놓는 미친놈은 과연 누구인지 궁금했다. 신용부도스와프는 제로섬 게임이다. 버리가 만약 신용부도스와프로 인해 1억 달러를 벌어들인다면, 반대편의 어떤 사람은 반드시 1억 달러를 잃는다. 골드만 삭스는 궁극적인 판매자가 아니라고 확실히 했다. 이 회사는 보험의 구매자와 판매자를 연결해주면서 수수료만을 챙기고 있었다. 




상대편이 누군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값싼 대량의 보험을 대거 팔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이런 상황에서 마이클 버리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의 보험만 구입하는 펀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주식 선별을 목표로 둔 돈 6억 달러짜리 펀드만으로도 그는 베팅을 할 수가 있었지만 새로운 펀드를 만드는 것을 위해서 공개적인 자금 유치가 가능하다면 수십 억 달러를 끌어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해 8월에 버리는 '밀턴스 오퍼스(Milton's Opus)'라는 펀드 설립에 관하여 일종의 제안서를 투자자들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투자자들 각각으로부터 받은 첫 번째 질문은 밀턴스 오퍼스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존 밀턴의 명작인 '실낙원(Paradise Lost)'이라고 답했다. 그러면 또 다른 질문들이 연거푸 그의 고막을 때려댔다. 사이언 캐피털의 투자자들은 버리가 주식 선별에 있어 최고의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했지, 그가 신용부도스와프라는 매우 어렵고 복잡한 보험계약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투자자들 대다수가 스와프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버리가 그런 일을 하지 않기를 원했다. 소수의 눈치 빠른 투자자들은 버리가 이미 자신들의 돈을 가지고 그런 거래를 하고 있다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자신을 향한 의구심과 신용부도스와프에 대한 정확한 지식 부재로 인해 사이언 캐피털의 수장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의 신용부도스와프를 구입할 자금을 더 많이 모으기는커녕, 현재 보유한 신용부도스와프를 유지하는 일만 더 어려워졌다. 투자자들은 마이클의 주식 선별 능력을 높게 평가해서 거기에만 집중하기를 원했다. 이와 반대로 거시경제를 읽어내는 능력이나 수조 달러 규모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 시장을 이상하게 해석하는 행위에는 불만과 염려의 목소리를 보냈다. 결국 밀턴스 오퍼스라는 신설 펀드는 창립된 지 얼마 안 돼서 사라져 버렸다.



2005년 10월, 마이클 버리는 마침내 자신의 투자자들에게 메일을 보내며 그간 해왔던 일들, 최소 10억 달러 규모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의 신용부도스와프를 구매했다는 사실을 솔직히 밝혔다. 메일의 제목은 '가끔은 시장도 커다란 실수를 합니다'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장은 아메리카 온라인에 타임 워너를 사들을 자금을 제공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조지 소로스(George Soros)의 의견에 반항해서 영국 파운드화의 상승에 베팅하는 실수도 저질렀습니다. 지금 시장은 역사상 가장 커다란 신용 버블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기면서 태평하게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무한하다시피 한 자본을 투입해서 막대한 잠재 수익을 산출해낼 수 있는 기회는 그보다 더욱 적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골치 아픈 주택저당 채권들을 선별해 공매도하면 앞서 언급한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2005년 2분기에 다다르자 신용카드 대금 미납률이 절정에 올랐지만 주택 가격은 여전히 상승세를 기록했다. 다시 말하자면 일반적인 미국인들은 주택을 담보로 해서 대출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대출에 따른 채무를 갚을 능력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미국 연준은 금리 인상을 시도했지만 이상하게도 모기지 금리는 떨어지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월스트리트의 수많은 회사들이 대출을 해 줄 수 있는 방법들을 교묘하고도 다양하게 계속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버리는 10억 달러의 판돈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더욱 많은 자금을 얻지 않는 않은 한 그가 만들 수 있는 가장 많은 액수였다. 당시 모기지 채권 시장은 미국 국무부의 중기채와 단기채 시장보다 훨씬 큰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 경제는 안정을 전제로 해서 이뤄지고 있었고, 이 안정은 계속 상승하는 현지 주택 가격에 따라 달려 있었다.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자산 버블의 규모를 알아차릴 수 있다는 점은 정말로 말도 안 됩니다"라면서 그는 한 투자자에게 자신의 의견을 솔직담백하게 담아냈다. "버블이 더욱 팽창하는 과정에서 촉발되는 여러 이상 징후들이 있습니다. 사기 사건들이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이 하나의 예입니다. FBI에 따르면 모기지 관련한 사기사건이 2000년 이후 5배 정도 늘어났습니다." 이상 징후는 그나마 건전했던 경제의 변두리에 있었지만, 이제는 중심부까지 파고들었다는 게 버리의 생각이었다. "현대 주택 관련 사기의 두드러진 특징은 국가기관들의 중심부에서 일어났다는 것이지요."




마이클 버리가 그간 이메일에서 했던 말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려 하자 그의 투자자들은 그렇게 기뻐하지 않았다. 한 투자자는 이에 대해서 "마이클은 누구나 다 아는 최고의 주식 선별 가입니다. 그런데 그가 무엇을 하고 있다고요?"라며 의심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주식을 선별해달라고 고용한 사람이 쓰레기 같은 채권들만 골랐다는 사실에 너무나 당황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모기지 채권에 대한 신용부도스와프가 매우 좋은 상품인데 왜 골드만삭스가 자꾸만 매각하려고 하는지 궁금증을 나타냈다. 당시 상황은 주택시장의 70년 주기의 정점이라는 버리의 선언에 의구심이 증폭되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신용부도스와프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갈피도 못 잡고 있었다. 버리의 투자자 한 명은 그에게 이런 메일을 보냈다. "제 경험을 토대로 봤을 때, 좁은 시각으로는 미국 재정의 몰락을 예상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간 미국 시장의 몰락을 알리는 징후가 있었습니다만 누구도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버리는 메일의 답글을 보내면서 몰락을 예상은 하지만 그것에 베팅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것은 신용부도스와프의 미덕이었다. 신용부도스와프를 구매했다면 불안정한 모기지 풀이 조금이라도 금이 가기 시작하자마자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 수가 있기 때문이다.


토론을  재미없는 활동이라고 여긴 버리이지만 무의식 중에 자신의 투자자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는 "저는 토론을 싫어해요. 특히 투자자들과 하는 토론을 멀리하려고 했습니다. 토론을 하게 되면 저 스스로가 아이디어의 배수진을 치고 있었고, 사고 과정에 있어서 투자자들의 시각이 영향을 주더군요." 만약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를 방어할 때 생각의 틀을 변환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그에게 선택이라는 것은 없었다. 버리의 투자자들 사이에서 이른바 '거시적 사고(macro thinking)'라는 내부적 회의주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화이트 마운틴스가 저 보다 제 일에 더 많이 개입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그 회사가 제 일을 완전히 이해나 하는지 조금 의심스럽더라고요." 버리에게는 평범하지만 매우 확실한 사실이지만, 화이트 마운틴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 있어 신용부도스와프는 가치를 찾는 일의 여정이었다. 그는 화이트 마운틴스에게 답장을 보냈다. "한시도 쉬지 않고 가치를 찾는 중입니다. 골프나 다른 취미활동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있어요. 가치를 찾는 게 바로 제가 하는 일입니다."


버리는 자신의 회사를 창립했을 때 미래의 잠재적 투자자들에게 비주류 베팅이 주요 사업이 될 가능성이 높아서 이익은 5년 후, 즉 장기적으로 봐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하지만 현재 매 순간마다 버리의 투자자들은 그를 평가하고 있다. "사업 초기에 사람들은 저의 메일을 읽고 투자를 결정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투자를 먼저 하고 저의 메일은 쳐다보지도 않더군요"라고 버리는 말했다. 그가 매우 뛰어난 전략으로 크나큰 성공을 거두자 새로운 투자자들이 대거 몰렸다. 그들은 버리의 사업 기조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그의 주식 선별에 따른 수익의 증감만 따졌다. 매 분기마다 버리는 그들에게 자신이 선택한 주식으로 인해 얼마나 돈을 벌었는지 보고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버리는 투자자들에게 주식에서 돈을 왜 빼내야 하는지를, 그리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에 프로미엄을 따로 지불하는 이유를 설명해야만 했다. 뉴욕 소재의 한 투자자가 걱정스러운 어투로 "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투자한 금액을 회수하려고 해요"라고 통화했다. 투자자들의 자금은 계약에 의해 일정기간 동안 사이언 캐피털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버리에게 새로운 전략의 근거와 논리를 설명해달라고 한탄하는 이메일만 보낼 뿐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투자자들은 최근 2년 동안 5%의 이익과 5%의 손실이 얼마나 차이가 있을지만 생각할 뿐이죠"라면서 버리는 자신의 새로운 전략에 의구심을 보내는 한 투자자에게 이런 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정말로 고민해봐야 할 문제는 이겁니다. 앞으로 10년간 매년 5% 이상의 수익을 거둘 수 있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매년 이 정도의 이익을 거두려면 약 2년 동안은 시장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해야 할 텐데요. 이것은 제 원칙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반발해도 바꾸지 않을 겁니다." 사업을 시작한 지 5년이 되자 S&P500 지수는 6,84% 정도 하락했다. 하지만 버리의 회사는 242%나 상승했다. 이 수치를 보면서 그는 자신을 꼭 잡아 줄 로프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는 이런 메일도 썼다. "현재 저는 매우 위태로운 모래성을 짓고 있습니다. 하지만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막을 방법이 없네요."




마이클 버리의 투자자들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차 강한 비난을 퍼부었을 때 월스트리트는 오히려 그들과는 반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의 전략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2005년 10월 골드만삭스의 한 서브프라임 트레이더는 버리에게 전화를 해서 왜 자꾸 특정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의 신용부도스와프를 구입하는지 이유를 물었다. 그 트레이더는 자신의 많은 헤지펀드 동료들이 주택시장 붕괴에 많은 돈을 건 사이언 캐피털의 전략을 전화해서 많이 물어본다고 통화 도중 말했다. 문의를 한 사람들 가운데는 버리가 밀턴스 오퍼스를 개설하기 위해 직접 도움을 부탁한 이들도 있었다. 자신의 재무담당 책임자에게 이메일을 보내면서 버리는 "사람들은 저만의 거래 방식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골드만삭스에 손을 내밀어 저와 똑같은 방식으로 거래를 하려고 했어요. 골드만삭스는 인정하지 않지만 제가 보기에는 손 좀 써준 것 같아요." 이제야 그는 밀턴스 오퍼스 설립이 어려웠는지를 알 수 있었다. 버리는 한 절친한 온라인 친구에게 "저의 거래 방식을 잘 설명하면 매우 논리적으로 보여 다른 사람들이 따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설명을 잘 못한다면 매우 괴기하고 이원론적인 얘기로 들려 사람들이 포기를 해요. 그래서 펀드 자금을 모으지 못했나 봅니다." 버리는 영업에 소질이 없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시장의 본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11월 4일 도이체방크의 서브프라임 담당자인 그렉 리프먼(Greg Lippmann)으로부터 느닷없이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당시 상황은 도이체방크가 마이클 버리와의 관계를 청산한 지 5개월이 지나가는 시점이었다. 버리가 너무나도 많은 담보물을 요구했다는 게 그들의 이유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도이체 방크의 잘 나가는 트레이더 한 명이 5월쯤 사이언 캐피털에 팔았던 신용부도스와프 6개를 다시 구입하고 싶다고 전했다. 그가 요구했던 6천만 달러 규모의 신용부도스와프는 버리의 포트폴리오로 볼 때 매우 작은 부분이었고, 도이체방크와 더 이상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는 이유까지 합쳐 그는 5월에 샀던 값보다 더욱 비싸게 신용부도스와프를 되팔았다. 그러자 리프먼은 다급하게 답신을 보냈다. "우리가 원하는 값에 다른 채권들도 좀 팔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렉 리프먼은 버리의 10억 달러 짜리의 신용부도스와프를 구매하고 싶어 했다. 버리는 이에 대해서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이렇게 운용하고자 합니다"라고 답변을 보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정말로 이상하네. 최근 5달 동안 도이체방크랑 거래를 한 적이 결코 없었는데, 어떻게 해서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


영화 [빅쇼트]에서 주인공 마이클 버리가 골드만삭스 직원들과 논의 하면서 신용부도스와프를 사려는 장면


리프먼의 통화가 있은지 3일 후, 이번에는 골드만삭스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베로니카 그린스타인(Veronica Grinstein)이었다. 그녀는 회사의 녹음을 피하기 위해 개인 휴대폰으로 버리와 통화를 했다. "특별한 부탁이 있습니다"라고 운을 뗀 그녀는 버리의 신용부도스와프를 사고 싶다고 말했다. "경영진이 염려하고 있네요"라고 덧붙여 말했다. 그린스타인이 언급한 그 '경영진'은 자사 트레이더들이 더 이상 되살 수 있는 여지도 남겨두지 않은 채 보험을 모두 판매했다고 봤다. 마이클 버리가 자신이 선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에 대한 2천500만 달러 규모의 상품을 관대롭게 팔 수 있을까? 그저 골드만삭스 경영진의 걱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그린스타인와의 통화를 마무리하면서 버리는 뭔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게 있어 곧바로 뱅크오브아메리카의 담당자와 연락을 취한 뒤, 신용부도스와프의 추가 구매가 가능한지 물었다. 예상한 대로 뱅크오브아메리카는 더 이상 팔지 않는다고 답했다. 골드만삭스처럼 어떻게 하면 스와프를 거두어들일 수 있을지만 고민만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모건스탠리도 갑자기 버리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모건스탠리와 마이클 버리와의 관계는 그다지 별 볼일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모건스탠리는 마이클 버리의 상품을 대거 구입하고 싶다는 뜻을 보였다. 버리는 갑자기 미국의 유수 은행들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 보증보험을 구매하려고 애쓰는 이유를 정확하게는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 이유는 알 수 있었다. 대출 부도사태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5월에 마이클 버리는 인간 행동을 분석해서 도출한 자신만의 결론, 즉 대출받은 사람들이 돈을 못 갚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베팅을 했다. 그리고 11월이 돼서야 그의 이론은 현실화가 되고야 말았다.


다음날 아침에 버리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지면을 펼쳤다가 변동금리 모기지가 9달 이내에 채무 불이행이 되는 비율이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될 거라고 대서특필 한 기사를 봤다. 중산층 이하의 미국인들이 대거 파산할 거라는 얘기였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매우 바쁜 나머지 기사를 제대로 정독하기 어려운 독자들을  위해지면 구석에 조그마한 차트도 심어주었다. 이제는 버리 혼자만이 알고 있었던 비밀이 공식적으로 세상에 다 알려졌다(He thought, The cat's out of the bag). 이제는 세상이 달라질 터였다. 대출업자들은 그간 고수했던 대출 기준을 바꿔 좀 더 높게 책정할 것이다. 신용평가기관들은 과거와 다르게 더욱 철저하게 조사할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합리적인 정신이 깃든 딜러들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의 보험을 옛날 가격으로 더 이상 판매하지 않을 것이다. 버리는 이에 대해 짧은 코멘트를 남겼다.


"언젠가 나타날 일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정말로 똑똑한 관계자들은 이 거래에서 손을 떼자고 얘기를 벌써부터 나누고 있겠죠."


월스트리트의 트레이더들 대다수는 엄청난 금액의 손실에 직면해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은 여기서 예외일 가능성이 높았다. 버리는 자사의 투자자 한 명으로부터 이런 메일을 받았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도이체방크는 다른 투자은행들과 달리 마이클 버리의 남다른 식견을 받아들인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도이체방크의 트레이더인 그렉 리프먼이 며칠 전에 여기에 왔었습니다. 10억 달러 규모의 상품의 하락에 베팅을 해서 '바다처럼' 엄청난 돈을 싹쓸이했다고 하더군요. 그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엄청난 부를 쌓았습니다."




2007년 2월쯤이 되자 서브프라임 대출의 채무 불이행이 미국 역사상 최고조로 오르게 되자, 그와 관련된 대출기관들의 신용도와 안정성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고 주변인들 그 누구도 마이클 버리의 언행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버리는 투자자들에게 조금만 더욱 인내의 시간을 가져달라고 요청했다. 2005년도 모기지의 티저 금리 기간이 끝나야 수익을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자자들 대다수는 인내의 시간을 참지 못했다. 하루빨리 수익을 가져오라고 이구동성이었다. 결과론적으로 그들은 버리를 믿지 않았고, 이에 대해 버리는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다. 버리는 중간과정을 다 빼버리고 싶었다. 베팅의 최후의 순간만을 기다렸다. "푹 자고 나서 2007년에 깨어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라고 버리는 말했다.  그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의 하락에 베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 안 되는 직원들의 절반을 해고했고 관련 회사들의 파산에 베팅을 한 수십억 달러를 팔아야만 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더욱 외롭고 고립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과거와 다른 점은 스스로를 고립에 처한 그만의 이유였다.


그런 가운데 버리는 아내의 손에 이끌려 본의 아니게 스탠퍼드의 심리학자 사무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버리의 4살짜리 아들은 당시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를 담당하는 교사가 부모님으로 하여금 자식을 데리고 심리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유했던 것이었다. 아들의 이름은 니콜라스였다. 니콜라스는 다른 또래 친구들이 잠을 잘 때 쉽게 잠에 빠지지 못했고 수업 시간에도 그리 집중하지 못했다고 한다. 니콜라스의 심리 상태는 '너무나도 활동적'이었다. 버리는 유치원 교사의 진단에 분노를 나타내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또한 교사는 의사인 아버지가 아들의 주의력결핍장애(attention-defict disorder)를 미리 눈치재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어 했다. 버리는 "과거 저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클리닉에서 근무했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이상하리만큼 이런 진단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저 또한 아들의 진단이 틀렸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체로 부모님들은 아이를 약물로 치료하고자 의학적 소견을 받아내려고 해요. 이것이 아니면 자식들의 나쁜 행동을 설명해줄 변명거리를 원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지도 모르고요." 그는 자신의 아들이 여타 다른 동년배 아이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물론 다르다는 생각에는 긍정적인 이유가 깃들어 있었다. "많은 질문들을 아들에게 했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세상을 회의했기 때문에 수많은 질문들을 품고 자랐거든요. 그런데 아들로부터 답변을 듣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그제야 버리는 자신의 아들을 더욱 세심하게 지켜봤다. 자신의 아들은 똑똑한 편이지만 다른 친구들과 제대로 못 어울린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아들은 친구들과 놀 때 아무런 야비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화를 돋우었어요." 버리는 집에 돌아가서 아내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괜찮으니까 걱정 마!"


아내는 버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알아?"

그때는 의사 신분으로 바뀐 버리가 이렇게 답했다. "왜냐하면 나랑 똑같잖아. 내가 어렸을 때 저랬다고."


버리 부부는 아들 니콜라스를 유치원 몇 군데 입학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그때마다 설명을 제대로 듣지도 못한 채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한 유치원은 니콜라스에 대해 모터에 남다른 소질이 있지만 다른 부분에서 현저히 부족한 면이 많다고 설명해주었다. "아들이 미술과 가위 사용법에 대해 매우 낮은 점수를 얻었어요. 이것을 보고 저는 큰일이라 생각했습니다. 현재 저는 그림을 4살 배기 아이처럼 그리거든요. 그래서 제가 미술을 좀처럼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버리는 말했다. 아내의 불안감을 누그러뜨리고자 그는 아들의 상태를 검사해보기로 결정했다. "니콜라스가 영리한 아이라는 결과가 나올 겁니다. 그는 '건망증이 심한 천재'이거든요."


하지만 아동심리학자의 검사 결과는 달랐다. 니콜라스가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s Syndrome)'이라고 진단 내렸다. 그 심리학자는 원칙적으로 이런 부류의 아이들은 일반학교가 아닌 특수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권고했다. 버리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의대에서 배웠던 이 증후군의 이름이 희미하게나마 떠올랐다. 그의 아내는 자폐와 관련된 모든 책들을 모아서 주었다. 책 더미의 맨 위에 있었던 것은 토니 애드우드의 [야스퍼거 증후군 가이드]와 애트우드의 [야스퍼거 증후군, 부모와 전문가용 가이드]였다. 


'다양한 비언어적 행동장애가 있어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거나....' 

체크

'또래들과 관계를 잘 맺지 못하고....'

체크

'타인의 눈빛에 드러난 사회정서적 메시지를 잘 읽어내지 못함'

체크

'컴퓨터를 좋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어울릴 필요가 없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컴퓨터가 논리적이고 일관적이며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컴퓨터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겪는 사람에게 이상적인 도구이며...'

체크

'많은 사람들이 취미를 갖고 있고.... 정상과 아스퍼거 증후군에서 촉발되는 이상 행동의 차이는 종종 고립적이고 특이하며, 개인의 시간과 대화를 완전히 장악한다는 의미다.'

체크

체크...  체크.... 체크...




영화 [빅쇼트]에서 배우 크리스천 베일은 실제인물 마이클 버리 역할을 맡아 연기를 했다


책의 몇 페이지를 읽다 보니 아들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성격을 설명하는 내용이라는 점을 버리는 그제야 깨달았다.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고작 책 한 권으로 자기 인생의 가이드라인으로 찾아낼 수 있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의 성격을 쓴 책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간 저는 제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해왔는데, 그 책에서는 제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고 합니다. 저와 아내는 전형적인 아스퍼거 증후군 부부였던 거예요. 우리 아들도 그래서 아스퍼거 증후군이었고요."

이제는 그 어떤 일도 유리 의안 탓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유리 의안이 장애가 된 적이 있기나 했는지 다시 되돌아봤다. 뛰어난 수영선수가 물밑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서 깊은 물을 병적으로 두려워하는 이유를 어떻게 유리 의안으로 설명할 수가 있을까? 돈을 세탁하는 어린아이의 행동을 어떻게 유리 의안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버리는 지폐를 씻은 다음 수건으로 닦아 물기를 제거하고 책 속에 끼워 놓은 다음, 그 책 위에 다른 책들을 겹겹이 쌓아놓았다. 그렇게 하면 헌 돈이 마치 '새 돈'처럼 변했다. 


"그 순간 저는 재빨리 '서투른 모방자(caricature)'로 변모했습니다. 저는 어떤 공부를 하든지 간에 그 누구보다도 더욱 빨리 최고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만의 특별한 능력이라고 봤는데, 지금까지 말이죠. 그런데 책들을 보니 저 말고도 다른 아스퍼거 증후군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유별난 성격은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설명 가능해요." 


버리는 새롭게 발견한 사실을 처음에는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에게는 관심 많은 주제를 찾아 관련 정보를 검색하고 분석해 나아가는 능력이 있었다. 또한 그는 자기 자신에 남다른 관심과 정보를 가졌다. 34살이 된 지금, 그는 또 한 번, 자신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만 셈이다. 그런데 버리의 첫 반응은 그런 정보를 수용하기가 싫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장애를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 제일 먼저 머릿속에서 떠올랐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저만의 새로운 정보를 발견한 것이 정말로 좋은 일인지 의심했어요. 진실로 저한테 좋았을까요?"라고 버리는 말했다. 


버리는 자신의 아스퍼거 증후군 증상이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고 싶어서 정신과 주치의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직장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예를 들어 투자 전략이나 의사소통 방식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투자자들에게 자신이 앓고 있는 증후군을 알리지 않았다. 꼭 밝혀야 할 소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반드시 알려야 할 중요한 뉴스는 아니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전혀 듣지도 못했던 새로운 병명도 아니었고요. 항상 지니고 있던 장애를 공식적으로 알게 된 것뿐이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와는 다르게 보자면, 마이클 버리의 직업과 업무 방법론은 아스퍼거 증후군에 의해 설명될 수가 있었다. 통계자료를 발 빠르게 수집하고 논리를 고집하면서 내용이 지루한 금융보고서 더미를 선별하는 능력이 모두 이 증후군에서 비롯되었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원하는 대로 관심분야를 정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일단 어느 분야에 갑자기 관심을 가지게 되면 거기서 벗어날 여지가 매우 낮기 때문이다. 매우 운이 좋았던 것일까. 그는 잔디깎이 카탈로그를 수집하는 일 대신 금융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스퍼거 증후군의 특성을 알게 되자, 현대의 복잡다단한 금융시장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는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가 매우 커다란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버리는 이에 대해서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들만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의 투자 설명서를 읽을 수 있답니다"라고 짤막하게 얘기했다.




2007년 봄이 되자 세상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무엇이 달라졌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우선 6월 14일 베어스턴스 소유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 헤지펀드 두 곳이 사라졌다. 그리고 2주 동안 트리플 B 등급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의 거래 지수가 20% 하락했다. 버리는 이때 골드만삭스도 심각한 존폐 위기에 놓여 있다고 느꼈다. 버리의 대규모 포지션은 골드만삭스와 연관되어 있었고, 이 회사는 포지션들의 매입과 관련해서 아예 가격을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담보가 필요한지를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었다. 6월 15일 금요일, 골드만삭스의 영업 담당인 베로니카 그린스타인이 종적을 감췄다. 전화통화를 시도하거나 이메일을 보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 "회사에 나와 있지 않다"라는 자동응답기 목소리만 울렸다. 


"시장의 크나큰 변동이 있을 시 자주, 그리고 빈번하게 일어나는 현상이죠"라고 버리가 썼다. "아프다고 하거나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핑계를 대곤 하죠."


6월 20일이 돼서야 그린스타인이 전화를 걸어와 "시스템 오류"로 인해 그간 연락을 못했다고 말했다. 버리는 그녀의 답변이 참으로 재밌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모건스탠리 담당자도 그와 똑같은 해명을 했기 때문이다. 뱅크오브아메리카 담당자는 심지어 "전력이 나갔다"라고 둘러댔다.


"제가 보기에 '시스템 오류'라는 말은 그저 내부 상황을 정리할 시간을 벌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라고 버리는 말했다. 골드만삭스의 영업 담당인 베로니카 그린스타인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의 지수가 완전히 폭락하는 것과  상관없이 보험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얘기를 회사의 공식적인 유선 전화가 아닌 개인 휴대폰으로 전했을 뿐이다. (참고로, 그린스타인은 나의 인터뷰 요청에 일절 답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버리는 지난 2년 동안 월스트리트의 트레이더들이 월말마다 자신의 포지션을 손해 보는 상태로 평가하는 광경을 쭉 지켜봤다. 다시 말해서 그가 베팅한 부도 관련 가치가 이상하리라만큼 평가절하되고 있었다. 월말은 또한 월스트리트의 트레이더들이 손익계산서를 매니저와 위험 관리 매니저들에게 보내는 기간이었다. 6월 29일, 마이클 버리는 모건 스탠리의 영업 담당인 아트 링네스(Art Ringness)로부터 지금이라도 스와프 평가가 공정한지 알아보고 싶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다음 날은 골드만삭스도 모건스탠리와 똑같은 행동을 취했다. 2년 만에 골드만삭스는 처음으로 월말에 버리의 포지션을 손실이 나는 상태가 아니라고 평가 내렸다. "그 회사가 처음으로 제대로 평가를 내린 셈이죠. 왜냐하면 그 사람들도 제 거래에 참여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버리가 적었다. 시장 스스로가 문제점을 파악한 순간이었다. 


마이클 버리가 지난 2005년 여름에 자사 투자자들에게 기다리라고 했던 그때가 바로 이 시점이었다. 4천 억 달러에 해당하는 똥 투성의 모기지(crappy mortgage)의 티저 금리가 끝나고 훨씬 높은 이자율이 새롭게 적용되었다. 7월 말이 되자 월스트리트의 판을 뒤흔든 그의 소식이 소위 유명 인사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때 버리는 1년 정도 시작이 늦었지만 자신과 똑같은 거래에 뛰어든 존 폴슨(John Paulson)과 같은 사람들의 기사들을 읽고 있었다. 블룸버그 뉴스 서비스는 재앙을 미리 예상한 사람들을 다루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월스트리트의 대규모 은행에서 채권 트레이더로 근무했다. 도이체 방크에서 자산담보부증권(asset-backed-bond) 트레이더였던 그렉 리프먼이었다. 하지만 기사에는 혼자서 1억 달러의 수익을 거두고, 투자자들에게는 총 7억 2천 달러를 안겨 준, 가장 두드러진 사람이 빠져 있었다. 지금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의 한 사무실에서 의자에 앉아 조용히 있는 사람 말이다.


사이언 캐피털이 창립되었을 때, 즉 2000년 11월 1일에 돈을 맡긴 투자자들은 2008년 6월 30일이 되자 세금과 비용 제외하고 무려 489.34%의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 펀드의 세전 이익의 상승률은 726%였다. 동일한 기간에 S&P500 지수는 고작 2%만 상승했다.


마이클 버리는 아까 언급한 블룸버그 뉴스 서비스의 기사를 복사한 다음에 한 줄을 덧 붙여 오피스 구성원들에게 이메일로 발송했다. "리프먼, 이 양반은 내 아이디어를 가져가더니 마치 자기 것인 양 말했네요." 한편 2배가 넘는 수익을 거둔 버리의 투자자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아니면 매우 고맙다는 얘기도 전혀 없었다. 


"돌아와서 '당신이 옳았네요'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매우 조용했습니다. 정말로 조용했어요. 미칠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