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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st in Translation Jul 28. 2017

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폴 칼라니티, 2015년 1월 18일, 스탠퍼드 메디슨

원문: Before I go - Time warps for a young surgeon with metastatic lung cancer


레지던트들끼리 하는 얘기가 있다. 하루는 엄청 긴데 세월은 너무나 빨리 흐른다고. 신경외과에서 수련을 할 때는 새벽 6시 이전부터 근무가 시작되었고 마지막 수술 , 그것도 능력에 따라 얼마나 빨리 완수를 하느냐에 따라 하루 일과가 마무리되곤 했다.


보통 레지던트 의사의 수술 실력은 그만의 고유한 기술과 속도에 따라 판가름 난다. 대충해서도, 그렇다고 세세하게 느리게 해서도 안 된다. 환자의 상처를 봉합하면서부터 보다 정밀한 과정에 이르고자 수많은 시간을 소요하는데, 이럴 때 수술실 보조(scrub tech) 담당자들은 으레 이렇게 외치기 마련이다. "마치 우리가 성형외과 의사가 된 것 같아요.", 혹은 "선생님의 노하우를 알 것 같아요. 상처의 윗부분만 실로 꿰매 봉합한다면 나머지는 저절로 나을 거라는 거죠. 봉합을 반만 하면 된다니... 얼마나 영리한 전략이에요!" 직급이 높은 레지던트들은 신입에게 일반적으로 이런 조언을 한다. "지금 당장은 빨리 해치우는 걸 배워. 친절하게 다가가는 건 나중에 배워도 늦지 않아." 모든 사람들의 동공은 벽시계를 향해 있다. 환자를 위해서 이렇게 묻기도 한다. "이 환자를 마취한 지 얼마나 되었죠?" 수술 집도 시간이 길어지면 신경이 손상될 수도, 근육이 망가질 수도, 심지어 급성 신부전이 올 수도 있다. 환자와 의사, 모두를 위해 이렇게 묻는다. "오늘 밤 여기서 나갈 수 있게 된다면 언제가 될까요?"


시간을 절약(단축)시킬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토끼와 거북이' 일화와 비슷한 방법론이다. 토끼 같은 의사들은 일반적으로 팔이 안 보일 정도로 거동을 재빠르게 하기 때문에 수술 도구들이 수술실 바닥으로 종종 떨어질 때가 있다. 커튼을 여는 것처럼 환자 피부를 절개하고, 뼛가루가 채 바닥에 닿기 전에 절개된 두개골 피부를 용기에 먼저 내려놓기도 한다. 하지만 최적의 절개 위치를 찾아내고자 환자 피부의 틈을 1cm 이상 길게 늘여야 한다. 이와 반대로 거북이과에 해당되는 의사들은 신중하면서도 천천희 수술을 집도하는데, 미리 계산을 두 번 정도 하고 나서 실행에 옮긴다. 시간을 지체하지 않는다. 수술 단계를 재검토를 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 과정을 머릿속에 세세하게 그려났기 때문이다. 토끼들이 시간을 많이 절약하고자 사소한 실수들을 반복하고, 이를 수정할 때가 많아지면, 일단 승리는 거북이에게 돌아가는 게 당연지사다. 만약 그렇다고 해서 거북이들이 세세한 과정을 미리 머릿속에 그리고 너무 많은 시뮬레이션을 할 시에 당연히 토끼가 이기기 마련이다.


수술실에서 보내는 시간과 관련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집도의가 열광적으로 진행하든, 점진적으로 착실하게 수행하든지 간에 환자는 지금 무슨 상황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는 것에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지루함을 시간이 흐르는 인식이라고 언급했지만, 수술실의 상황은 이와 대척점에 있다. 과도한 집중력은 마치 벽시계의 분침과 초침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2시간이 한순간의 찰나처럼 다가온다. 마지막 봉합이 끝나고 상처를 소독할 때면 정상적인 일상이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다. 이때 뭔가 훅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의사는 갑자기 질문 하나를 떠올린다.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날 때까지 얼마나 남았지?" "다음 수술이 시작되기 전까지 얼마나 시간이 남았을까?", "다음 수술 전까지 얼마나 많은 환자들을 진료해야 하지?", "내가 퇴근하는 시각은 과연 언제가 될까?"


마지막 일과가 끝날 때까지 하루의 길이를 제대로 측정할 수가 없다. 흐느적거리며 발걸음을 또 내딛는다. 병원에서 퇴근하기 직전까지 여러 서류업무를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 자신이 마치 하나의 '모루(anvils)'처럼 느껴진다. 내일 처리하면 안 될까? 안 된다고 한다. 한숨을 쉬는 그 순간, 내가 있는 이 지구는 자전하면서 태양을 향해 계속 움직였다.


하지만 시간은 한때 우리가 염원했던 것처럼 지나가기 마련이다. 순식간에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나는 수석 레지던트라는 직함을 달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격무에 시달려서 그런지 몰라도 여러 증상을 연거푸 앓았는데, 몸무게가 빠지고 열이 났으며 잠잘 때 땀을 많이 흘렸고 요통에 끊임없이 시달리거나 기침을 빈번하게 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어떤 병의 징후라는 것을 조심스레 짐작했고, 이는 결국 '암세포가 폐에 전이되었다'라는 사실로 확진되었다. 시간의 흐름은 완전히 삐걱거렸다. 치료 과정이 끝나면 나는 매번 절룩거리며 걸었다. 고통은 끝이 없었다. 사라질 것 같으면 재발했다. 나는 화학치료를 받았고 병원에 아주 오랫동안 입원해 있었다.


병원에서 퇴원했지만 내 증상은 더욱 악화되었다. 내 몸뚱이는 이제 뼈밖에 남지 않았고, 머리숱은 듬성듬성 빠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어떠한 의사 관련된 일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 나는 집에서 요양 중이다. 의자에서 일어나거나, 아니면 물이 담긴 유리잔을 드는 것조차도 혼신의 힘과 노력을 가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하나의 물체고 고속으로 움직일 때 시간이 팽창한다면, 반대로, 거의 움직임을 나타내지 않을 때면 시간은 과연 최대한 수축할까? 만약 그렇다면 오늘 하루의 길이는 너무나 짧게 느껴진다. 하루 전체 일과는 치료와 친구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다. 남는 시간은 그저 남아 있을 뿐이다.



나를 둘러싼 시간의 흐름은 슬슬 멈춰져 있었기 때문에 오늘 하루를 어제나 내일과 구별해내기가 좀처럼 어려웠다. 영어에서 시간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 가능하다. "지금 시각은 2시 25분"과 "나는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등등. 나에게 있어 시간은 재깍재깍 거리는 소리처럼 느껴지기보다는, 그저 어떤 순간의 한 단면을 표현해주는 개념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분위기가 나른하다. 수술실에서 엄청난 집중을 요할 때 벽에 걸려있었던 시계의 분침과 초침은 제멋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 주를 구성하는 요일은 더더욱 그렇다.


이제는 문장의 동사 활용도 뒤죽박죽이 되었다. 어떤 문장이 과연 옳은 걸까? "나는 신경외과 의사입니다.", "나는 신경외과 의사였습니다.", "나는 한때 신경외과 의사였지만, 훗날에 다시 복귀할 수 있을까요?" 그레이엄 그린이 일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인생은 생애 초반 20년만 제대로 사는 것이고, 나머지는 그때의 시절을 곱씹으면서 영원히 회고하며 지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시제(tense)에서 살고 있었던 걸까? 그레이엄 그린이 강조한 대로, 한때 모든 에너지를 소비했던 나는 현재시제를 넘어서 보다 완벽했던 과거의 시제로 넘어갔었던 걸까? 미래시제는 모호하고, 다른 사람들의 무분별한 전망에 거슬릴 뿐이다. 나는 최근에 15년째 진행되던 대학 학부 졸업생 모임에 축하 메시지를 보낸 바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오래 교류한 친구들로부터 건네 온 이별 조짐에 대한 나의 반응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아 약간의 무례함을 느끼기도 했다. "우리는 25주년 모임에도 만날 거야. 나는 아마도 안 되겠지만..."


그러나 우리 집에는 역동성이 존재한다. 내가 병원에서 퇴원한 지 며칠 안 되어 우리 부부의 사랑스러운 딸이 태어났다.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딸은 한 송이의 꽃처럼 자랐다. 처음으로 무엇을 움켜잡았을 때,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을 때, 처음으로 크게 웃었을 때... 소아과 의사는 그녀의 성장 기록을 차트에 기록했고 시간에 따라 세부 항목을 면밀히 검사했다. 빛이 나는 새로움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다. 내 무릎에 앉아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고, 음치인 내가 노래를 부를 때 나를 계속 쳐다볼 때면 어디선가 환한 빛이 찾아와 우리의 방을 따스하게 비춘다.


나에게 있어 시간은 양날의 검이다. 새롭게 찾아오는 날들은 암이 재발해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구원해주곤 하지만, 내가 또 다른 재발에 힘겨워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도 동시에 맡기 때문이다. 끝에 가서는 죽음일 게다. 죽음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늦게 찾아오겠지만,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보다는 빨리 찾아올 것이다. 이런 인식에 대한 나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가장 확실한 답안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고자" 미칠 듯이 움직이며 삶의 끊임없는 추동을 갈구하는 것이다. 여행을 다니고, 저녁식사를 먹고, 그간 방치된 내 삶의 욕망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암이 지니는 잔혹한 악영향 가운데 하나는 환자의 시간뿐 아니라 에너지를 극도로 제한하는 데 있다. 무리하면서까지 하루 동안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을 모아두더라도 암은 그것을 엄청나게 앗아갈 뿐이다. 마치 달리기 시합 때문에 힘이 다 빠져나간 한 마리의 토끼와 같다. 만약에 나에게 좀 더 많은 힘이 남았더라면 거북이처럼 행동하지 않을까 싶다. 터벅터벅 걷는다. 곰곰이 생각한다. 며칠 동안은 나는 그저 단순하게도 계속 버티며 살아간다. 


사람들 모두는 삶의 유한성(finitude)에 굴복하고 만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과거완료 상태에 도달한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의구심이 든다. 대부분의 야망은 실현되었거나, 아니면 중간에 버려졌다. 확실한 것은, 이 모든 야망은 과거 시점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미래는 삶의 목표를 향해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닌, 끊임없이 지속되는 현재의 일상이다. 돈, 지위, 그리고 성경 전도서에 등장한 선지자가 경고했던 여러 허영심은 사소한 결과를 내놓을 뿐이다. 바람을 쫓는 삶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미래를 빼앗기지 않을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딸 케이디(Cady)다. 딸이 나에 대한 많은 기억을 가질 수 있도록 나는 가능하다면 좀 더 오래 살고 싶다. 글은 내가 가지지 못한 지속성을 지닌다. 나는 예전에 그녀를 위해 편지를 몇 장 써서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과연 쓸 말이 뭐가 있을까? 나는 케이디가 15살이 되면 과연 어떤 소녀로 성장할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고, 지금 우리가 지어 준 별명을 그때까지 그녀가 계속 가지고 있을지 조차도 의심스러웠다. 지금 이 아리따운 유아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단 한 가지이다. 미래를 암시하는 케이디의 존재는 아주 잠깐이나마, 어쩌면 현실에서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과거로만 점철된 내 인생과 겹치고 있다.  


그녀에게 줄 메시지는 단순하다. 인생을 살다 보면 여러 순간들을 맞닥뜨리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일을 그간 해왔는지, 그리고 세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할 때다. 그럴 때 네가 지금 서서히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들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채워졌다는 사실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런 기쁨은 내가 그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만큼은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만족한 채로 편안히 쉴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리고 이런 만족감은 내 삶에 있어 진실로 엄청난 일이기도 하다.


에디터 첨언: 윗글 작성자인 폴 칼라니티는 2015년 3월 9일, 37세의 젊은 나이로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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