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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st in Translation Aug 27. 2017

무엇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줄까요?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8월 19일, 가디언 

원문: Karl Ove Knausgaard: what makes life worth living?


8월 28일. 제가 이 글을 쓰지만, 당신은 그 어떤 것도 모르고 무엇이 나타날지도, 앞으로 어떤 세상에 태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나는 초음파 사진을 봤고 누워 있는 어떤 사람의 배를 살포시 포갤 뿐입니다. 당신이 태어나려면 6개월이 남았고, 그 기간 동안 어떤 일이라도 벌어질 수가 있습니다만, 저는 인생은 강하고 불굴의 성격을 띤다고 믿기 때문에 앞으로 당신은 잘 될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정상적으로 건강하고 튼튼하게 세상에 나올 겁니다. 출산에 대해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떠오릅니다. 당신의 누나인 반야(Vanja)가 태어났을 때 바깥은 소용돌이치는 눈으로 가득한 오밤중이었습니다. 그녀가 태어나기 직전에 산파 한 분이 제 손을 강하게 잡아당기며 "당신이 직접 받아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의 누나를 직접 받았습니다. 아주 작은 아기가 제 손에 미끄러지듯이 받쳐졌습니다. 물개 가죽처럼 살결은 매우 부드러웠습니다. 매우 행복한 나머지 저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로부터 1년 6개월 후에 헤이디(Heidi)가 세상에 나타났을 때 계절은 가을이었고,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과 눅눅하고 매서운 바람이 불던, 딱 10월 날씨의 전형적인 하루였습니다. 그녀는 그날 아침에 태어났기 때문에 출산 직전에 나타난 진통은 갑자기 시작되었고, 자신의 몸의 일부분이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던 상태, 머리만 슬그머니 드러냈을 때 그녀는 산모 엉덩이 부근에 작은 소리를 냈습니다. 그때는 정말로 기쁨이 가득한 순간이었습니다. 당신의 오빠는 욘(John)이라고 불렸고, 양수와 혈액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상황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출산실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어서 지하 비밀벙커 같은 느낌이 나타났고,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소식을 알리고자 밖으로 나갔습니다. 외부세계의 따스한 빛을 보자 저는 조금은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특별한 일이 없었던 것처럼 인생은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2007년 8월 15일이었고, 오후 5시나 6시였으며, 장소는 말뫼(Malmo)였습니다. 2006년 여름에 우리 가족은 말뫼로 이주했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우리 일행을 병원 산부인과 병실에 동행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저는 남동생 존의 머리에 녹색 고무로 만들어진 도마뱀을 놓으며 엄청나게 웃고 있었던 그의 누나들을 집에 데리고 가고자 다시 방문했습니다. 그때 저의 딸들의 나이는 3살과 2살이었습니다. 저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언젠가, 그 사진을 딸들에게 보여줄 생각입니다.


제 자식들이 태어난 과정은 바로 이랬습니다. 그들은 지금 보다 큰 체격으로 성장했고, 세상만사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기묘할 만큼 이상한 점은, 그들이 서로 너무나 다르다는 겁니다. 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완전체이고, 태어날 때부터 이런 차이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도 딸들과 완전히 다른 완전체로 이 세상에 나타날 거라고 예상하고, 이미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된 채로 지금 숨 쉬고 있습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자식 3명, 우리는 현재 잘 지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당신의 가족이기도 합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더욱 중요하기에 저는 이 문장을 서두에 언급합니다. 좋은 가족이든지 나쁜 가족이든지, 따스한 가족이든지 냉혈한 가족이든지, 엄격한 가족이든지 너그러운 가족이든지, 그건 별로 상관이 없을 테고. 가장 중요한 점은 당신이 가족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만의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세상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찬성과 반대를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설계한다는 것입니다. 


요새는, 지난 며칠 이래로 우리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자식들이 학교에 있는 동안 나와 당신의 친모는 림함(Limhanm, 말뫼 외곽지역)에 위치한 한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늦여름의 열기, 특히 오늘은 아주 완벽할 정도로 맑은 하늘이었고, 희미하게나 가을의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자연의 수많은 색깔은 더욱 짙어진 동시에 강렬했습니다. 우리는 카페 안에서 당신을 뭐라고 부를지 대화를 나눴습니다. 만약 딸이 태어난다면 이름을 앤느(Anne)라고 해보는 것이 어떨지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자 나의 부인이자 당신의 친모인 린다는 이름이 정말로 좋다면서, 경쾌하면서도 명랑한 느낌이 난다면서, 우리가 얼마나 당신과 함께 하고 싶은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자질을 보여준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남자로 태어난다면, 우리는 이름을 에이릭(Eirik)이라고 짓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당신의 이름은 누나와 형의 이름을 부를 때와 비슷한 Y 발음을 띠게 됩니다. 당신이 그들을 큰 소리로 부르게 된다면 Y 모음을 발음할 겁니다. 반야(Vanja), 헤이디(Heidi), 그리고 욘(John).


지금 그들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 당신의 엄마도 자고 있으니까 우리 가족의 4명이 숙면을 취하고 있습니다. 저는 작업실의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작업실은 두 개의 방과 하나의 다락으로 이뤄져 있으며, 나의 가족이 현재 누워있는 집을 둘러싼 잔디밭을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집의 어두운 창문은 도로의 가로등이 없었더라면 보이지 않았을 테고, 거리의 불빛은 미세하게나마 부엌을 비춰주면서 유령이 나올 것 같은 음산한 기운을 아주 조금은 자아냅니다. 우리 가족이 지내는 집의 구조는 3개의 오두막을 하나로 합친 형태입니다. 집의 반대편, 다시 말해서 저의 작업실 뒤에는 빨간 벽돌로 만든 농장이 하나 있는데, 녹색 들판에 하나 솟은 느낌이고, 볼 때마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들게 해줍니다.


빨강과 초록.


빨강과 초록은 어쩌면 당신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저에게는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 색깔 내에 있는 어떤 것이 저에게 강력한 원동력을 제공하는데, 제가 왜 작가가 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러한 함이 매우 강력하다고 느끼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표현할 때마다 용이한 단어를 찾기 힘들워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간 시도를 했었지만,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출간한 책들은 그러한 굴복을 뜻합니다. 언젠가 당신이 나의 저서를 읽을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의미하는 바를 아마도 이해할 거라고 내다봅니다.


수액은 잎맥을 통해 흐르고, 잔디는 지면에서 자라 오르며,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리곤 합니다.


당신은 앞으로 이런 눈부신 것들을 직접 보거나 마주치게 됩니다. 하지만 으레 쉽게 잊어버리기 십상입니다. 사람들이 있는 한 눈앞에서 놓치는 현상은 많을 겁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저는 당신에 세상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리고 앞으로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저도 제 자신을 조금씩 흘끗 엿볼 수 있을 겁니다.


무엇이 삶의 가치를 만들어낼까요?


그 어떤 아이도 이 질문을 물어보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있어 인생은 자명합니다. 그들은 인생에 대해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별로 차이가 없다'라고 분명히 자각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세상 자체에 깊숙이 스며들며 자기 자신을 동일시할 뿐, 그것을 바라보거나 관찰하거나 아니면 세세하게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별을 제대로 인식하거나 자기 자신과 세상과의 차이를 구별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질문 하나를 마주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줄까요?


마치 손잡이를 누르면서 문을 열고, 경첩이 안과 밖으로 흔들리면서, 그것도 아주 손쉽게 기꺼이 새로운 방으로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느낌 아닐까 싶습니다.


맞습니다. 문은 열립니다. 날개처럼 열립니다. 바로 이것이 인생의 가치를 부여할 유일한 요소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그 문은 확실합니다. 집도 잔디밭도 확실합니다. 하늘과 바다도 확실하고 심지어 밤하늘에 달려 있으면서 지붕 위를 따스하게 비쳐주는 달 또한 확실합니다. 이 세상은 그 존재 자체로써 표현을 하지만 우리는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더 이상 스며들지 않을 때부터, 우리 자신과 분리된 무엇이라고 여겼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습니다. 우리는 문을 열지만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한 채 그저 한쪽 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할 뿐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지금 이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려고 합니다. 문, 바닥, 수도꼭지와 개수대, 부엌 창 밑의 집 벽에 놓인 정원 의자, 태양, 물, 나무들. 당신은 당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이것을 바라볼 테고, 당신을 위해 이런 것들을 직접 경험할 테며, 당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갈 겁니다. 물론 제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바로 제 자신을 위해서 입니다. 당신에게 이 세계를 보여주는 것. 비록 사소하지만 제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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